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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 번째┃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느티나무 백인보 스물일곱 번째 - 염지혜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얘들아! 엄마가 좋아하는 볼펜 어딨어? 좀 찾아봐~”
아이들 문제집을 채점하거나 메모할 때 혹은 느티나무에서 강의 들을 때, 내가 즐겨 쓰는 볼펜이 있다. ‘bic’. 가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볼펜똥이 거의 안 나와서 손이나 옷에 잉크 묻힐 일이 거의 없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아이다. 손이나 옷에 묻은 볼펜 자국을 힘들게 지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방울의 볼펜똥이 가지는 파괴력을 잘 알 것이다. 그런 날은 평소 잘 바르지도 않는 물파스를 찾아 온 집안을 다 뒤져야 한다. ‘bic'이 지닌 미덕은 이렇듯 전혀 사소하지가 않아서 펜이 필요한 순간 난 어떻게든 이 녀석을 찾는다. 하여 우리 집에선 본명보다 훨씬 더 긴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름하야 ‘엄마가 좋아하는 볼펜’이다. 인터뷰 초장부터 웬 볼펜 타령이냐고?
그날, 나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주황색 볼펜 한 자루를 보았다. 그것은 ‘bic'이었다.
자기소개
그렇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인터뷰이를 만나 초장부터 볼펜 얘기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간에 생각나면 아무렇지 않은 척, 무척 사소한 질문인 척 물어봐야지 하며 질문지 한켠에 bic이라 쓰고는 동그라미를 쳐두었다.
지혜씨, 이름은 숱하게 들었어요, 느티나무에서 무지 유명하시던데요. 자기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올해 한국나이로 32살 됐구요,” 말을 끊으려했던 것은 아닌데 입과 혀가 자동으로 돌아간다. 네? 32살이라구요? 난 대학생인줄 알았어요. 아줌마란 이 리액션 통제에 실패한 자들 일지도 모른다.
“(함박웃음) 참여연대 와서 그런 소리 너무 많이 들어서 행복했어요. 결혼은 안 했구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이 좋아서 계속 그림 그리다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어요. 사실 졸업하고 런던에서 6년 정도 살다가, 한국 들어온 지는 얼마 안돼요.”
런던과 예술가 그리고 20대라는 세 단어의 조합이 내 머릿속에서 파스텔 톤으로 섞인다. 태어나 한번 가본적도 없는 런던의 거리가 눈앞에 아련하게 펼쳐지고... 고흐도 20대의 한 자락을 런던의 한 화랑에서 보냈다 했던가. 그런 생각들을 하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강렬한 유화물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 영국에서도 미술 공부한 거예요? 회화?
“그쪽은 우리나라처럼 미술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고 그냥 전체적으로 파인 아트(fine art)라고 해요. 제가 다닌 두 학교도 사정이 비슷해서 그런 장르적인 구분에 억매이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봤어요.”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다 보니 평소 알지 못하는 전문용어들을 접할 때가 많다. 뭐, 파인 아트가 전문용어냐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술을 회화와 조소 정도로 밖에 구분 못하는 내겐 무척 낯선 단어다. 이참에 알고 넘어가자. 파인 아트란, 응용미술 혹은 장식미술에 반대되는 의미로 ‘보다 고급스럽고’ 비실용적인 예술을 지칭하는 용어란다. 일반적으로는 회화, 조각, 건축 분야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어떨 때는 시나 음악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쓰이기도 한단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어쨌거나 내 식대로 짧고 무식하게 요약해 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순수미술이라는 게 파인 아트인가 부다.
런던에서 진짜 순수한 ‘예술’을 하셨군요. 그것도 6년씩이나?
“인생을 계획해서 사는 편이 아니라서요, 순간순간 주어진 관심사를 따라 가다보니까 본의 아니게 오래 머물게 됐네요. 근데 사실 학교를 6년씩 다닌 건 아니고, 학생으로 있었던 기간은 다 합쳐서 3년 쯤? 중간 중간 그냥 쉬기도 하고 개인 작업도 하고 또 제가 하는 작업들이 여행하고 관련이 많아서 여행을 많이 다녔죠. 런던의 지정학적 위치가 여행 다니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했지만...”
느티나무 강의에서였나, 누군가 그녀에게 직업을 물었을 때 그녀는 짧게 ‘예술가’라 했다. 건성으로 듣고 있다 순간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예술가라구?
저는 예술가입니다
난 왜 그녀를 돌아다봤던 걸까? 왜 그토록 그 대답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일까? 보통 한국에서는 직업이 예술가여도 흔히들 ‘전 음악을 합니다, 전 사진작업을 해요’ 혹은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정도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데 익숙해져서일까. ‘전 예술가입니다’라는 대답은 내게 무척이나 ‘전복적’으로 들렸다.
“2011년 9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아티스트들이 모여 함께 생활도 하고 작업도 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많이 참여했어요. 주로 유럽과 남미 쪽에서 작업했는데, 브라질에서 3개월 있었고 콜롬비아에서도 한 달 반 정도 지냈고...”
체류비용은 대체 어떻게 감당했어요?
“레지던스 프로그램마다 지원해주는 내용이 조금씩 달라요. 어느 곳은 주거 부분을 지원해주고 어느 곳은 체류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주기도 하고, 한국 같은 경우는 정부에서 지원해 주기도 하는데, 특정기간 동안 이런 곳을 이런 목적으로 가고 싶다하면 해당 서류를 제출해서 일정 금액을 받기도 해요. 그렇게 해도 기본적으로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부분은 있죠. 저도 그런 프로그램들을 이용하긴 했는데, 워낙 다닌 곳이 많아서 결국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모두 갚아야할 빚이죠.”
그때 받았던 도움이 지금은 빚으로 남았다. 한국에 들어오고 부모님 얼굴을 마주대하자 그 빚은 실체가 더 또렷해졌고 압박의 수위는 하루하루 높아져만 갔다. 그냥 평범한 이삼십대로 살아도 힘든 한국이다. 연애, 취직, 결혼, 출산 그 어느 하나도 만만하지 이 시대에 그녀는 ‘예술’을 한다. 안 겪어 봐도 가시밭길이다.
“집이 부유하진 않지만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난 덕분에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어요. 제가 공부하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그런 제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시며 그래 너 하나만은 하고 싶은 공부 실컷 해봐라, 그러셨죠.”
묵묵히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주신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진 모양이다. 인터뷰 내내 침착하던 목소리가 더욱더 낮게 깔린다.
“근데, 지금은 제 자존감이 거의 바닥이라서 그런지 길에 지나다가 길바닥의 껌딱지를 보면, 그래 저게 내 모습이지 해요. 무뇌상태라고 해야 하나?”
짧은 대답.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그녀가 미처 말하지 않은 긴 이야기들을, 지금 그녀가 놓인 사회적 조건들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지적하지 않아도, 가까운 친척들이 심술궂게 이것저것 캐묻지 않아도, 그녀는 지금 힘들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20대를 살았어도, 하고 싶은 것을 나중으로 유예하지 않는 삶을 살았어도,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에 시달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건 대한민국의 여느 청춘들과 다르지 않다. 인생의 큰 분기점인 서른을 몇 해 전에 넘겼으나 여전히 나아가야할 길들은 희뿌옇기만 한, 그녀의 무뇌상태는 대한민국 청춘들이 사는 모습을 닮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의 가림막 아래서 세상 곳곳을 누볐던 화려한 청춘. 그러나 그 청춘의 끝자락에 돌아와 다시 거울 앞에 선 지금, 그녀는 자신을 껌딱지라 부른다. 대체 어떤 성장을 강요받기에 그녀의 자존감은 껌이 되어 바닥에 붙어버렸는가.
“제 직업이 예술가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계획을 세울 수가 없어요. 특히 장기적인 계획은 더더욱 힘들어요.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니 수입도 일정치 않고... 학교에 있을 때는 그 틀이 싫기만 했는데, 정작 틀이 없어진 지금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거죠. 어떻게든 작업에 대한 열정이 있으면 이런 상황을 버텨내야 하는데, 주변에 작업하는 친구들이 그러더라구요. 점점 떨어져나가는 것 같다고. 함께 작업하고 예술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하던 친구들이 주변에서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어요. 취직하러 떠난 거죠. 그런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나 자신의 무능력함을 떠올리게 되고, 점점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해요. 작업을 하다가도 이런 걸 하느니 부모님으로부터 재정적인 독립을 준비하는 게 내 자신에게 더 떳떳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제목: Gray Matter (뇌)
The more information, the less knowledge
32살에 돌아온 한국. 그녀는 준비가 부족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30대 초반에 들어선 사람에게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내기에는 준비가 부족했다고... 그러면서 덧붙인다. 주위에 자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알바를 하거나 미술학원 강사를 하기도 한다고. 정부나 사회로부터 어떠한 안전망도 제공받지 못하는 한국의 예술가들 혹은 예술지망생들은 모두 비정규직인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가로 사는 한 죽을 때까지 남아 있을 또 하나의 이름이 되었다.
들어는 봤나? ‘미디어 아트’라고
주로 어떤 작업들을 해요?
“대학 다닐 땐 주어진 공부는 잘 안 하고 이것저것 했었어요. 연극무대에서 연기도 해 보고, 참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았는데... 근데 성격이 변하더라구요. 요즘에는 혼자 있는 게 너무 편해요. 졸업하고는 개인 작업을 많이 했는데 주로 여행을 다니면서 하는 거죠.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주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걸 매개로 타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서 그런 고민을 담아내는 작업을 기획하고 실험하고... 그런 작업들이 제가 지향하는 예술의 바탕이에요.”
디지털 카메라 같은 것이 없는 지역에 갔을 땐, 그 동네사람들에게 일회용 카메라를 나누어 주고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찍힌 필름들은 현상을 해서 함께 나누어 가졌다.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땐, 그때가 2월이라 그런지 너무 황량해서 마치 죽어있는 섬 같았어요. 그런 그곳의 풍경들을 드로잉하고 편지도 함께 써서 집 앞에다 두고 오고, 가는 길마다 그런 작업을 했었어요.”
집?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 집 앞에 그림과 편지를 두고 왔다구요?
“네. 편지에 네가 이걸 보고 나와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내게 이메일이나 편지를 보내달라고 했죠.”
연락한 사람이 있었어요?
“그럼요. 메일도 2통 오고 편지도 2통이나 왔어요. 그중에는 꼬마 아이의 장난도 있긴 했지만...”
어느 날 문득 내게 그런 그림과 편지가 온다면, 그날 하루만큼은 내 인생도 영화와 같지 않을까. 낯선 이가 보낸 그림 한 장은 일상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파문은 생각보다 깊게 베어들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흔들어대는 것이었구나...
“보통 그런 작업은 방문할 지역도 여러 가지들을 고려해서 선택하고, 예술을 매개로 그곳사람들과 1:1로 소통할 작업방식들을 고민해서 미리 만들어 가는 식으로 진행해요. 2007년에는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작업들도 했지만, 그곳에 가기 전에 내가 미리 조사한 것들과 실제로 내가 그곳에 가서 보고 경험한 것들 그리고 갔다 와서 내게 남겨진 추억들과 이미지들을 가지고 영상작업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책으로 만들기도 하고... 그런 작업들을 했어요.”
가는 길마다 풍경들을 드로잉하고 편지도 함께 써서 집 앞에다 두고 오는 작업을 했고, 답을 하는 이메일과 편지가 도착 했었다고 한다.
잠깐의 실수가 아프리카의 한 나라를 ‘유토피아’로 만들었다. 에티오피아라는 말을 유토피아로 읽은 순간, 그녀는 그곳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술이라는 것, 매체라는 것은 사실 하나의 도구인 것이고 그것보다는 내용을 찾으려고 더 노력하고 있죠. 꼭 가본 곳이 아니더라도, 망망대해에 3D로 섬 하나를 만들어 놓고...”
지금에야 인터뷰 내용들을 천천히 다시 들으며 글로 정리까지 하니 이해가 쉽지만, 인터뷰 당시에는 그녀가 쏟아놓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하며 몇 번씩 되풀이해서 물었다. 그런 내가 무식해 보이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고, 그랬나보다. 하긴 내가 미디어 아트에 대해 뭘 알겠는가.
“(멍 때리고 있는 나를 보며 근심스럽게) 지금 듣고 계신 표정이, 제가 뭔가 설득을 시켜야할 것 같고... 이런 작업을 하면서 많이 느낀 건데요, 사실 사람들은 전통회화예술에 비해 이런 작업은 이해하기 힘들어 하고, 미술이라 하면 뭔가 미술‘품’ 같은 것을 기대해요. 실제로 관객이 제가 하는 작업에 개입해서 뭔가를 한다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죠. 그 지점이 저도 무척 고민이 되는데, 앞으로 제가 풀어내야할 숙제겠죠.”
그럼, 한국에 들어온 지금도 그런 작업들을 계속 하고 있는 건가요?
“한국에 들어오고 나선 한동안 작업을 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남들이 엘리트코스라 부르는 제도권 내에서 내내 공부하고 그림 그리고, 다시 한국 들어온 것도 말로만 들어가야지 했다가 막상 진짜로 들어오게 되니 실감도 안 나고,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요즈음 그냥 가만히 있어요. 그동안의 것들을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다녔던 곳, 모아둔 자료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어요.”
예고를 나오고 미대에 입학하고 외국유학도 다녀왔다. 흔히들 말하는 엘리트코스를 밟았지만 그렇게 쉽게 재단해버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정작 틀 밖에서 이루어진 그녀의 작업들을 보며 사람들은 이해하기가 어렵다했다. 소통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가지고 다시 사람들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다.
“현실은, 내가 하고 싶은 작업들만 해서는 남들을 설득시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소통을 목적으로 하고 작업을 하는데 처음부터 내 작업의 의도나 내용을 이해조차 못 하는 상황인 거죠. 이해가 되어야 소통이든 설득이든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주위에 미술하는 사람들한테는 몇 마디만 해도 모두 내 의도를 알아채는데, 그런 사람들을 조금만 벗어나도,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물어오면 내 의도를 설명하느라 진땀이 다 나고, 소통도 잘 안돼서 나중에는 설명이 아니라 거의 내 의도를 강압적으로 전달하는 상황까지 가더라구요. 작가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녀의 고민이 한곳에 멈춰서 있다. 그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녀가 그린 그림이, 그녀가 만들어낸 작품이 혹은 작업이 그 이야기들을 더 풍부하게 만들었으면 할 뿐이다. 미디어 아트라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속해 있는 그녀이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예술은 이처럼 무척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 보는 걸 좋아하는 나와 미디어 아트를 하는 그녀 사이에 접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 접점을 향해 나가고 있다.
“사람마다 예술에 대해 각자가 지닌 고유의 방식으로 접근을 하는 게 결국 예술을 진정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길이라 생각해요. 근데, 미술계를 움직이는 상위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정해놓은 그들만의 언어를 쓰고 있는 상황이죠. 겉으로는 대중과 함께 가야한다고 하면서 대중예술을 말하고 고급예술이라는 것은 없다 선언하지만 사실 ‘고급예술’이라는 성은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어요. 이것도 제 고민의 한 축이죠.”
예술가라면 한번쯤은 해보았을 고민이네요.
“그쵸.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런 고민들을 하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분명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도 예술가라는 그 위대한 이름을 붙여 불러줘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에도 예술을 향한 그녀의 고민은 이어지고 있었다.
“지나가다 어떤 작품을 봤을 때 ‘어, 이건 뭐지?’ 정도의 질문만이라도 이끌어낸다면 전 그 작품이 예술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의 관심만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저 깊은 곳에서 마음이 짠했다.
염지혜님이 여행을 다니면서 이방인의 얼굴을 그려주고, 그들에게 나의 얼굴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여, 서로의 초상화를 맞바꾼 드로잉 작업입니다.
첫 번째 순서부터 티벳, 가나, 이란입니다.
지구의 반대편
지구 반대편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어떤가요? 그들의 삶도 역시 팍팍하던가요?
“아,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렇게까지 비슷할 수가 있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특히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생활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아요. 물론 이렇게 삶의 조건의 비슷하다는 게 좋을 때도 있어요. 세계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 친구와 얘기를 해도 서로 너무 잘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 아이나 나나 비슷한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으니까. 또 영어라는 단 하나의 언어로 제국화된 세계에서 소통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도 한번 씩 뜨악하고 놀라요. 얘가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지? 그러고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도 차이점은 있을 텐데요?
“유럽의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젊은이들은 개인주의가 정말 끝까지 갔다고 할 수 있죠. 끝없는 냉소, 무관심... 근데 이런 점도 있어요. 유럽이라는 곳이 워낙 이민자들도 많고 다민족 사회다 보니까 삶의 방식이 굉장히 다원화되어 있는 데 반해 한국은 아직도 하나의 줄에 모두가 쭉 늘어서서 가고 있다는 느낌?"
그러다 불쑥 그녀가 먼저, 내가 아니고, 그녀가, ‘bic' 볼펜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에서 만든 휴대폰은 질적으로 세계 최고잖아요. 근데 어제 모나미 볼펜을 쓰면서 너무 화가 나서 못 쓰겠는 거예요(그녀는 bic 볼펜을 쓴다, 나처럼). 발전에도 순서와 균형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한국사회는 마치 팝업창이 여기저기서 팡팡 뜨는 것처럼, 어떤 것은 굉장히 뛰어나고 또 어떤 부분의 발전은 형편이 없고, 지하철은 세계최고 수준인데 막상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의 문화 수준은 바닥이고... 이건 뭐지? 계속 혼란스럽기만 하죠.”
이러한 불균형의 문제는 결국 삶의 불평등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팝업창처럼 팡팡 터지는 인생들이 있는 반면 대다수의 삶은 바닥에 붙은 껌이다.
“유럽사회의 극우화 문제 같은 경우도 제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예요. 정권이 바뀌면 정책도 어느 한순간 바꿔버리고, 영국 같은 경우도 보면 유럽출신 학생들과 비유럽권 학생들의 학비가 달라요. 비유럽권 학생들이 거의 3배나 더 내야하죠.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정부지원금은 줄어들고 학교는 그 차액을 비유럽권 아이들에게 전가하고... 교육을 가지고 장사를 하고 있는 거죠. 제가 다니던 학교는 그나마 비교적 진보적인 분위기였는데도 그 정도였어요. 겉으로는 문화의 다양성을 외치고 관용을 말하지만 사실 그 안은 우월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거죠.”
아, 지구 반대편도 무너지고 있구나...
“점점 더 한국학생들을 많이 뽑고 있어요. 처음에는 학비시스템이 그런 지도 모르고 갔어요. 나중에 알고 나서는 같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사인데도 걔네들이 휴지 쓰는 걸 보면서, 아, 저거 다 내가 낸 돈으로 산 건데, 아깝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아프리카에선 피부색의 짙고 옅은 정도로 계급이 갈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피부가 더 흴수록 더 우월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삶의 질이 달라진다. 하긴, 그건 그나마 명확한 기준이라도 있지,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앞에 붙는 글자 하나 차이로 인생이 갈리지 않던가. 사람들을 이런저런 이유로 끊임없이 분류하고 차별해대는 이 빌어먹을 세상...
“2009년이었던가, 교육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된 적이 있어요. 그러자 영국학생들이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하더라구요. 보수적 성향이 강한 영국에서는 그 시위가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이라고들 했어요. 어떻게 보면 영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모두의 문제인데, 불평등한 학비 시스템 때문인지 비유럽권 학생들은 참여도는 굉장히 낮았죠. 저도 친구 따라서 잠깐 시위현장에 나갔었는데 심경이 무척 복잡했어요, 그곳에 나와 있는 영국 애들과 나는 사실 입장이 다른데, 나는 쟤네들하고 비교해도 더 많은 차별을 받고 있는데... 괴리감이 들었죠.”
그 시위는 실패했다. 정부의 정책은 그대로 실행되었고 정부의 지원예산이 빠져나간 부분은 학비를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 짐은 피부색이 더 어두운, 더 먼 곳에서 찾아온 이들의 어깨에 더 많이, 더 무겁게 실렸다.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침반이라면 길을 잃을 리 없다는 회회국의 문구를 사랑해왔다. 그러면서 세상이 흔들릴 때마다 그 신념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러나 흔들리는 세상은 균형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 속 세상은 그랬다.
제목: A Hollow Land, The Contact Zone
이 작업은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있는 알-파하라 난민캠프에서 니하야라는 이름의 주민과 인터뷰한
영상. 그녀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작가는 아랍어를 하지 못해서 5시간 동안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대화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다른 공부
지난해 9월 귀국하자마자 그녀는 제일 먼저 참여연대에 강의를 들으러왔다. 그리곤 지난 가을학기의 웬만한 강의는 전부 들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듣다보니까 재밌어서 하나씩 하나씩 더 듣게 되고 그렇게 된 거죠. 재밌는 강의도 많았고, 또 많은 강의를 들었던 만큼 다양하고 재밌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지난 학기 느티나무 최다수강자의 영예를 차지한 그녀, 대체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몇 년 전 아는 친구의 소개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오고 싶었는데 사정상 그렇게 하지 못해서 나름 벼르고 있던 것도 있구요. 그러다 이번에 한국 들어오면서 바로 신청해 듣기 시작했죠. 그 친구가 좋다고 했던 건 스타일링 강의하고 이재형 선생님 강의였는데, 워낙 신뢰하는 친구라서 등록할 때 강의 내용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신청한 것들이 많아요. 소심한 사람들의 유쾌한 꼼지락 강의도 좋았고 중남미문학 강의도 좋았어요.”
수동적인 편이라 꼼지락 강의를 들을 때 스트레스도 무지 받았단다, 자꾸 이것저것 하라고 해서 ㅎㅎ...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스타일이라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도 적었고 그래서 관련 용어나 좌파 우파 이런 말에도 익숙하지 않은 편이에요. 근데 주위의 함께 작업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저더러 ‘넌 극좌야’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워낙에 예술 쪽에 진보인 척 가면을 쓴 이들이 많아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굉장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작업을 하고 그런 결과물들을 내놓는 사람들도 실제 만나 보면 이상하게도 나랑 잘 안 맞고 불편하더라구요. 지금 와 생각해보니 그들은 무늬만 그랬던 거 아닌가 싶어요. 예술이라는 게 일단 진보적이어야 상품성이 있으니까...”
사회비판을 전면에 내세워야 작가로서 예술성을 인정받고 그래야 물건이 팔린다는 말씀.
“근데 그 사람들의 그런 미운 면을 나도 내 안에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더 쉽게 읽어내고 불편해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하지만 전 그것 때문에 괴롭고 힘들어 하는데 그런 일말의 반성도 없이 그저 겉으로 고뇌하는 척만 하고 그러면서 그걸 끝까지 이용만 해 먹는 예술가들도 생각보다 많은 현실이에요. 실제로 미술계에서 이름이 나고 유명한 작가들 중엔 그런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가까운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너도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처럼 해야 한다고. ‘그래야 하나? 나도....?’ 느티나무 밑으로 여태껏 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공부를 위해 찾아든 그녀의 마음속은 이렇듯 무거운 질문들로 시끄러웠다.
“‘세계경제위기와 경제민주화'라는 강의를 들었을 땐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고 또 실제로 눈앞에서 그런 모습들을 지켜봤었는데도 난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읽어낼 줄 몰랐구나, 그리스 친구가 카드가 정지되고 무척이나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말이죠. 강의를 통해 그동안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도 되고 또 내가 그동안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되고... 갈증이 많이 풀렸어요.”
갈증만 풀린 게 아니다. ‘유쾌한 꼼지락’ 강의를 맡아주셨던 이래은 선생님과는 인연이 깊어져 함께 연극의 무대 작업을 하기로 했단다. 함께 강의를 들었던 이들과 사석에서 따로 만나 놀기도 했다고 자랑하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느티나무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 서로 너무나 다른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는데도 이렇게 비슷한 생각들과 고민들을 하고 있다는 거,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한 점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그래요. 꼼지락 강의 같은 경우는 긴장을 풀기 위한 강의라 듣고 갔는데 한껏 긴장만 하다 온 셈이 됐죠, 하지만 그 긴장은 기분 좋은 긴장이었어요.”
그 긴장이 어느 날 삶의 에너지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고, 억지로라도 내 얘기를 해야 하는 것 또한 자꾸 안으로만 파고들려는 나를 깨뜨리는 또 하나의 작업이었다고 그녀는 고백했다. 그 작업을 가능하게 만든 건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몸을 부딪었던 경험과 그렇게 조금씩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과 눈을 마주치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 들이었다.
내가 그녀를 제대로(?) 본 것 또한 느티나무 겨울강좌로 열린 ‘생활정치’ 세미나 자리에서였다. 그녀가 바로 ‘그’ 염지혜라는 것을 안 순간 틈틈이 그녀를 힐끗거렸고 내 눈에, 그것이 들어왔던 것이다. 그 볼펜, bic. 문득 그녀도 나와 같은 답답함을 안고 저 볼펜을 쓰는 건 아닌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섬
“점을 본 적이 있어요. 저더러 하는 말이 20대를 혼자서 너무 빠르게 살아왔다 하더라구요. 남들이 두고두고 겪을 일을 너무 이른 시기에 한꺼번에 치렀다는 거죠. 이제 그것들을 끊어냈으니 앞으로는 다 잘 될 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위로받는 느낌이었어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떠들어대는 낯선 점쟁이의 한 마디 말에도 위안을 받는 인생. 인터뷰 내내 그녀를 바라보며 사람이 성장을 하고 독립을 한다는 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 그녀가 그 기로에 위태롭게 서 있기도 해서이겠지만 그녀와 내가 함께 공부했던 생활정치 세미나 때문이기도 했다. 세미나 형식으로 이뤄졌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자료와 책들을 읽어야 했던 강의. 그 중에서 유독 가슴을 쓰라리게 만든 한 권의 책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의 많은 구절들이 그녀의 이야기 위로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성장이 과연 무엇인지, 그 성장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우리의 정치가 누구에게만 정치이며 왜 다른 이에겐 정치가 되지 못하는지 묻지 않는다. …… 각자의 삶이란 각자가 던지는 질문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이해하려 하지 않은 채 그 답만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판단한다. 질문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나 페다고지가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곳에는 다만 날것의 폭력과 존재에 대한 모독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구절을 가슴에 새기지 않았다면 인터뷰 마지막에 던진 질문에 그녀가 들려준 대답을 난 모독했을 지도 모른다. 지금 가장 절실한 문제가 무엇이냐 물었을 때, 그녀는 서슴없이 “돈.”이라 했다. 그 답이 돈이 아니라 예술이었다면 상황은 어쩌면 더 우스워졌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난 그들에게 성장만을 이야기하던 중년의 아줌마가 아니다. 왜 그리 어른스럽지 못하냐고 비난하던 꼰대가 아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세상에 대해 동일한 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눈높이가 같다는 뜻이라는 걸 알게 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을 공유한 공동체가 아니라 질문을 공유한 공동체이고 그렇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공동체만이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에 난 아무런 제스처도 취할 수 없었다. 그것의 의미는 공감이었다는 걸 그녀는 알까?
“외국에 혼자 살러 갈 때 자신 있었어요, 혼자 잘 살 자신. 그런데 돌이켜보니 런던에 그렇게 오래 살았는데도 항상 머리맡에 짐가방을 놓고 잤더라구요. 그곳이 내가 마냥 머물 곳이 아니라는, 언젠가는 떠나야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노마드의 삶을 산 것이 거의 7년. 떠도는 삶이 남긴 습관들 때문인지 문득 문득 어딘가로 떠나야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던 그녀는 얼마 후 다시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저 곧 떠나요.”
큰 기대 없이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했는데 다행히도 합격해서 대부도로 떠나게 되었다고... 아, 이번에는 섬으로 가는구나라고 말하려는 순간, 내게 그토록 많은 감동을 주었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책의 마지막 문장이 팝업창처럼 튀어 올랐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삶. 비록 지금은 껌딱지여도,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의 온갖 먼지로 때 묻어도, 가슴에 품은 질문들을 함께 부둥켜안고 바닥을 구르는... 그런 그녀를 위해, ‘인간이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발견하는 것, 그것보다 더 인문학적인 발견이 어디에 있겠느냐’ 했던 책의 한 구절을 소리 내 읽는다. 부디 섬에 가서도 성찰의 언어를 잃지 않기를 그리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야말로 바로 내가 뛰어야할 ‘로두스’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세상의 많은 곳을 헤매고 다니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이 품고 있던 그 질문 앞에 다시 돌아와 서기를...
언 땅이 풀리고 봄이 오면 그녀가 있는 섬에 하루 다녀와야겠다.
예술과 철학 그리고 삶이 찰랑찰랑한 인터뷰입니다.
지혜님의 삶은 스펙터클하지만 잔잔하게 흘러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흐르다 보면 언젠가 또 다시 만난다는 점이겠지요 ^^
좋은 글과 사람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유로운 젊음이 부러웠습니다.
아트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한 사람을 알아가고.. 하나를 또 배웠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좋은 사람들이 있네요.
조은 글 . 조은 사람 잘 보았습니다
단장님 쵝오 ^^
ㅋㅋㅋ 상규샘, 그렇게 대놓고 칭찬을 하시면, 많이 부끄러워요^^ ㅋㅋㅋ
우오...
참 만나면 좋은 사람, 만나면 좋은 글 이었습니다.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
느티나무의 가장 큰 매력, 그것은 어쩌면
뭔가 새로운 길을 가는 참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아닐까요?
만남의 기회를 주신 느티나무지기 기자단 여러분, 탱큐 탱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