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소식 l ※ 광고성 게시나 게시판 도배, 저작권 침해 게시글은 삭제됩니다.
인생은 아름다워 연극을 보고...
<<연극 보러 가는 길>>
-이경숙
마음이 조급했던 걸까. 달력에는 제 날짜에 기록을 해놓고 내 머릿속의 날짜 계산은 내 일정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성신여대 역에 내려 소박한 이름의 연극 장소를 찾는데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네이버씨는 친절하게 '역에서 내려 3분 거리'라고 가리키고 있는데, 도무지 사람들로 넘쳐나는 이 상업지구에서 '성북마을극장'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참 예쁜 꽃을 마련하고 싶었는데, 급하게 서두르느라 근처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꽃집 아주머니께 장소를 여쭙고 찾아가는데 거기는 이미 닫혀진 공연장이었다. 다시 네어버씨의 지도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다른 블로그의 글도 참조하니, '4층에 위치해 있고, 근처에 상가가 많아 지나치기 쉽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공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런...그렇게 나는 공연보다 일주일 전에 이미 답사를 끝낸 상태였다.
다시 연극을 보러 가는 날, 내 관심사는 연극을 보러 가기 전에 먼저 꽃집 아주머니와의 대면이었다. 지난번 날짜를 잘못 알았노라고, 꽃을 다시 가져갔더니 정말이지 '이상한 여자'라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셨다. 그래도 돈을 내주려고 하시기에 '아니, 제가 담주 이 시간에 또 와야 하거든요, 그때 다시 꽃을 주세요' 했더니 반색을 하시던 아주머니의 눈길이 떠오른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눈을 주시한 거 말고는 꽃을 돌려주었다든가 돈을 받았다든가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과연, 아주머니는 나를 알아보실까, 나오기는 하셨을까 갑자기 의심이 폭발하면서 마음은 두근두근하였다. 그러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오늘 연극의 값은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설픈 객기였지만 사람에 대한 신뢰의 회복으로 마음은 충분히 말랑말랑해져 있었다.
연극보러 가는 길은 배려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입구에서부터 따뜻한 환대, 친절한 설명 그리고 공연장에 들어설 때, 낯설지 않은 얼굴이 있어 또 안심이 되었다.
배우들을 만나기 전, 훤칠하게 생긴 청년이 아마도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청소년이라고 해야 맞을까, 친절하게 ‘앞자리 발로 차지 마세요’공익 홍보도 해주었다. 그 청년은 단순히 공익 홍보맨이 아니라 극 전체의 조율을 담당했다고 할까, 특별히 막이 없는 공연의 순서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극의 구성원들이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이었다면 이 공연의 순서지같은 안내자는 청소년이었다는 것도 색다른 조합이었다.
처음, 각자 편지를 받아든 배우들은 한 사람씩 자기가 맡은 주제에 따라 자기를 보여주었다. 주제가 모두 달랐던지 ‘나’를 드러낸다는 커다란 주제에 소제목이 확연히 드러나도록 배우들 각자각자는 자기 색깔이 분명했다.
처음에 ‘싫어’를 세상 떠나가도록 외치던 경상도 사투리가 확 들어오던 여자분, 코끼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여인은 진취적인 자세로 열심히 운동하고 슬림한 몸으로 만들어 활력있는 인생을 살게 되신 분, 그리고 자신이 입던 치마를 찢고 붙이고 오리고 하는 일도 가능해진 자유로운 춤의 여인, 사방이 막힌 곳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울부짖으나 결국 아직은 해결을 보지 못한 처절한 자아를 보여주신 분,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었으나 방방마다 열어보며 결국 자기의 출구를 찾아내신 분, 애기같은 목소리가 귀에 감기는 물고기가 된 그녀, 그리고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제목에 정점을 찍으신 살구색 바바리코트의 그녀까지. 무대 위의 배우들은 또다른 내가 되어 마음을 읽어 주고, 지나왔던 시간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모두의 삶이 담겨있다고 하지만, 다큐로 흐르지 않고 한편의 극으로 담아내는 힘은 다양한 무대연출에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배우들 한분한분이 모여 함께 무대의 도구가 되고, 훌륭한 음향이 되는 구조였다. 나의 고민들에 에코처럼 한마디 한마디 보태져서, 고민에 휩싸이게도 하고, 해결을 주기도 했다.
훤칠한 홍보맨 청소년은 꽤 긴 독백 혹은 방백을 막힘없이 읊었는데, 컴컴한 객석이었지만 적고 싶을 정도로 좋은 문구가 많았다. 나중에 배우들과의 대화에서 연출 말씀이 시에서 가져온 글들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억나는 싯구를 살려 찾아보니, 연극을 통해 멋진 시도 두 편이나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 이슬에 새벽 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간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시들을 들여다보니, 고민과 회환에 싸여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지만 회피하지 말라고, 지금 여기 내가 마주서 있는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하는 거 같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굳이 아주 잘~ 살려고 애쓰지 말고, 묵묵히 걸어나가라. 그것이 삶이라는 말을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연극의 배우들도 한때 내 삶에서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오늘 나는 그때 반짝이는 시절 후에 더 나아지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여기 살아가고 있노라고 우리에게 담담히 들려주었다.
‘인생은 아름다워’연극은 삶의 진정성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살구색 바바리코트’의 그녀 편에서는 엄마와의 추억을 되살리며 ‘엄마와 나의 소망? 욕망? 이 담긴 옷’이라고 하셨을 때, 먹먹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아마도 이런 소망을 안고 계시기에 지금도 소녀같은 웃음을 간직하시는 게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이상스럽게 바쁘고 많은 일이 겹쳐 있는 지금, 컴컴한 객석에서 오롯이 나와 함께한 연극, ‘인생은 아름다워’는 삶에 대한 찬양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