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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시대에 던지는 여섯 가지 불편한 질문] 제3강. 저성장시대, 민주주의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가을비와 갑작스러운 찬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일러주던 날.
'저성장 시대에 던지는 여섯 가지 불편한 질문'도 벌써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두 번의 강의를 통해 경제학적 관점에서 진단하는 저성장 시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면, 세 번째 시간에는 구조적 저성장과 고령화가 민주주의에 가져올 변화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고려대학교 김윤태 교수님의 강의내용을 요약하여 강의록을 작성하였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도래한 저성장시대의 특징으로는 성장률 하락, 투자 감소, 고용률 정체, 소득 증가율 정체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저축률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가계대출이 급증한 것은 중대한 변화이다. 가계에서는 저축을 하고 기업은 대출을 받아 투자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기업은 사내유보금을 쌓아두고 가계에서는 대출을 받아 소비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고용불안의 심화, 중산층의 약화,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또한 저성장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는 시각이 존재한다.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기치로 내건 민주주의와 '보상의 차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자본주의는 상호 조화되기 어려운 긴장/갈등관계에 있기 때문에, 저성장으로 인한 불평등과 양극화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성장의 주된 원인으로는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경제구조'를 들 수 있다. 신자유주의와 함께 금융자본이 시장의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가계대출과 연계한 금융상품들이 개발되었고 이로써 생산성이나 소득이 아닌 부채가 성장을 주도하였다. 그 밖에도 탈산업화와 기술의 변화로 인한 제조업의 침체 및 고용 없는 생산의 증가, 제조업의 침체로 인한 수출주도성장의 둔화,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한 소비감소와 내수침체 등이 저성장의 원인이다.
고용률의 정체, 청년실업 증가, 가계부채 급증, 중소기업과 자영업의 몰락과 같은 저성장의 결과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저성장이 가져온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저성장으로 인하여 정부재원과 복지지출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복지축소의 문제가 발생하고, 한정된 재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를 둘러싼 사회갈등이 심화되어 결과적으로 사회통합이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경기침체, 경제위기가 민주주의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정부정책, 사회 내부의 다양한 균열, 세대간 성비, 지역갈등과 같은 경제 외적인 환경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7년의 정치적 민주화 이후 형식적 차원의 민주주의는 정착했지만, 재벌중심의 경제구조, 미약한 복지제도 등으로 인하여 시민의 보편적인 권리를 보호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 차례 이상의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공고화 되었음에도 적대적 정치갈등은 심화되었고, 복지제도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이는 노동시장에서의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어 복지제도를 통한 재분배만으로는 그 불평등을 해소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원인 중의 하나는 소선거구제 및 지역주의 정당정책으로 인하여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소선거구제를 채택할 경우, 사표의 비중이 높아 투표율이 저조하기 때문에 대표성은 약화되고 소수자 보호가 어려워진다. 또, 특권화된 정치계급이 국민의 권리나 공공선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형식화된다. 노동조합이 미약하여 저소득층 및 노동자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할 수 없는 것 또한 미성숙한 민주주의의 원인이다.
한편,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 개인적 스펙 쌓기에 집중하면서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문제, 빈부격차, 계급갈등, 도농갈등과 같은 사회갈등의 심화는 저성장시대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험요소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고용과 임금, 복지문제를 둘러싼 사회갈등을 세대갈등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견해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용연장, 임금피크제, 기초연금 등과 같은 문제를 세대갈등의 이슈로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대'를 단순한 '연령'이 아닌 사회문화적 범주로서 '정치적 세대'의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사람이 20대에 어떠한 정치적 경험을 했는가'가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고령화되면 보수화된다'는 명제는 지나치게 일반화된 것으로,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요소들의 영향을 배제한 것이다. 또, 선거는 세대적 구분 외에도 계층, 성별, 지역, 종교 등 다양한 변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한 가지의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인구 고령화의 요소에만 주목하여 유권자의 보수화를 단정짓는 것은 위험하다. 즉, 고령화가 진보 및 민주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하거나 노인 통치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세대갈등의 담론은 사실상 존재하는 계층갈등의 문제를 은폐하며 동일 계층간의 연대(예. 비정규직 청년과 비정규직 장년층)를 약화시킨다. 노인세대가 보수적인 이유는 반공주의 및 지역주의 정치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기 때문이고, 청년세대 또한 부모의 소득수준이나 교육수준에 따라 상이한 정치성향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정년연장이 청년실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거나 임금피크제로 청년고용이 증가한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고용을 세대간 제로섬 게임으로 파악하여 경제상황, 기업전략 등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인 문제와 계층갈등을 은폐한다.
기초연금의 도입 또한 보수정당의 선거전략으로 채택되었을 뿐, 노인들의 적극적이고 조직화된 행동의 결과는 아니며, 보수정당의 지배를 받는 다수의 노인은 오히려 복지확대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복지에 대한 견해는 교육수준이나 정치적 이념성향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초연금제도가 세대갈등의 이슈로 보여지는 것은 정치적 전략에 의한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청년실업, 비정규직 문제, 소득불평등과 같은 문제를 해소할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실현되어야 하고, 경제성장의 담론을 넘어 고용률, 환경, 임금 등의 사회발전 이슈에 집중해야 한다. 또한, 교육, 공적자본투자 등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회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며, 저소득층에 중점을 둔 선별복지를 넘어 평등한 시민권을 보장할 수 있는 보편복지를 이루어야 한다.
이에 새로운 진보세력은 경제성장을 촉진하는 자유기업을 존중하면서도 모든 국민이 번영을 공유하는 적극적인 공공정책의 역할을 지지해야 한다. 경제민주화 및 복지국가의 담론을 넘어 생활밀착형 정책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정교한 조세, 복지, 주택, 교육정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소득주도성장, 공공투자 확대, 공정한 조세정책을 수립, 금융산업에 대한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규제장치 마련에 주력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