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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사회 인터뷰 ㅣ'우리, 촉촉하게 혁명해볼까요?' 현경
우리,
촉촉하게 혁명해볼까요?
현경 여성·환경·평화 운동가
글. 박유안 사진. 박영록
우리의 일상이 수상하다. 이런 일상으로는 평범하게 살기가 힘들어 보일 정도로 팍팍해진 지 오래다. 거기엔 어른 아이가 따로 없고, 직장인 자영업자가 한결같으며, 일터와 가정, 학교가 도긴개긴 위태롭다. 탈출구 없이 가파른 일상을 견뎌내기. 모두가 힘들다며 신음 중인 모습. 이 시대의 자화상이 그러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모두가 앓고 있는 고단함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근본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 골든타임이 아닐까.
이번 통인 인터뷰에서 만난 현경 교수는 신학 교수답게 명상, 영성 분야에서 세계적인 입지를 다진 분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미국의 유니언신학대학 종신교수로 일하는 그는 거기서 가르치는 과목 중 하나인 ‘영성과 혁명(Mysticism and Revolutionary Social Change)’을 방학 때마다 한국에 하나씩 소개하고 있다.
문제의 근본을 건드림으로써 치유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현경 교수의 에코페미니즘과 영성 접근법, 그만의 ‘살림’ 처방은 어쩌면 입시와 성형, 자기계발의 채찍질에 시달리는 2016년의 대한민국 일상인들에게 진짜 ‘보물지도’ 하나를 건네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깊이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전속력 자본주의의 아우토반에서 홀연 샛길로 빠져나온 그대. 그렇게 멈춰, 깊이 호흡을 가다듬고 귀 기울여 보자. 남북여성 평화통일 모임 ‘조각보’의 공동창립자로 평양도 방문했지만, 법륜 스님의 표현으로는 “북한이 가장 싫어할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한 현경 교수의 이야기에.
너나 할 것 없이 힐링의 필요성을 외치는 요즘이다. 선생의 ‘살림이스트’ 접근법은 개인의 치유와 사회의 변화를 함께 고민한다는 점에서 특별해 보인다.
한국어 중 가장 글로벌한 말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살림’이다. 살림살이라는 의미도 되지만 자신과 타인, 지구를 살리는 일도 살림이 된다. 한국은 상처가 많은 곳이다. 돌아보고 돌봐야 할 것들이 많다. 내 안의 신성을 돌보고 내 이웃, 사회, 지구 전체 등 주변의 생명체들을 돌보는 게 바로 살림이다. 에코페미니즘이 지구와 사람을 살리는 걸 지향한다면, 그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가장 좋은 한국말이 바로 ‘살림’인 것이다. 공격과 충돌이 아니라, 상생과 대화를 믿는 게 바로 살림이스트다. 죽음과 폭력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는 살림의 에너지로 만들어내야 한다.
방학 때마다 한국에 오면 ‘살림이스트 워크샵’을 진행하신다고 들었다.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신학자로 일하지만, 학교 측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독일에 가서 ‘홀로트로픽 숨 작업(Holotropic Breathwork)’이라는 심층심리 프로그램을 공부하거나 이슬람 17개국 순례를 떠나 무슬림 여성을 인터뷰하거나 하는 일을 계속했다.
살림의 방법 중 요즘은 심층심리 워크숍을 통해 우리 무의식의 깊은 트라우마를 드러내보는 일을 하고 있다. 고함과 통곡, 몸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등 심층심리 치유 워크숍 도중 일제 강점기, 6.25, 4.3때의 제주도 등 온갖 근대사의 귀신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라. 집단무의식 속에서 우리의 업보로 남아 있는 상처들을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우리의 무의식, 우리의 내면을 그렇게 깊이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 모두가 다 다르다는 깨달음이다. 사람만이 아니다. 나무 잎사귀, 수많은 동물들, 바닷가의 모래알, 흔하디흔한 눈의 결정체도 다 다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진리, 그 유니크함은 인생의 선물이다. 예수는 외경 도마복음서에서 “만약 네가 네 안의 그것을 내어놓으면 그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요, 그것을 내어놓지 못하면 그것이 너를 파괴하리라”고 말했다. 이 짧은 인생에서 표현해야 할 유일무이한 그것을 우리 모두 각자 가지고 나온다. 힌두교에서는 그걸 ‘신적인 불꽃’,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 이슬람에서는 ‘할리페’ 즉 “이 세상에 온 존재의 이유”라고 부른다. 모든 지知의 전통, 종교의 전통에서 그것을 이야기한다. 제일 좋은 사회는 내 안의 그것을 아무 제약 없이 꺼낼 수 있는 사회다.
참여연대 워크숍에서 ‘영성과 혁명’을 얘기한다니, 아주 신선했다. 하지만 그 둘이 끝내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 수도 있지 않나 싶은데?
‘나의 살림’은 ‘사회의 살림’과 떼놓을 수 없다. 심층심리, 명상, 수행, 자기성찰 없이 사회운동을 하면 결국 바싹 말라버린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좀 촉촉하게 할 수 없을까? (웃음) 예수의 힘은 다른 사람들의 힘과 달랐다. 폭력적인 힘, 남을 컨트롤하는 파워 오버(power over)가 아니라 남을 감동시키는 힘이었다. 가장 깊은 신성, 생명력과 연결된 힘이었다. 최근에 펴낸 책 『연약함의 힘』에 썼던 게 바로 그런 힘이다. 제일 중요한 생명의 힘을 접하며 어부가 그물을 놓고 그의 뒤를 쫓았다.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더 큰 일을 할 것이다.” 자기 걸 끄집어내 더 큰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대신 예수에게 기도만 하고 있다. 혁명과 영성은 개인변화, 사회변화의 두 수레바퀴이다. 불교에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수행이라 하듯, 둘이 같이 가야 사건이 일어나고 역사가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그런다. “참여연대가 영성을 얘기하네? 야, 참 많이 왔네, 참여연대?” 정말 좋은 징후 아닌가. 나쁜 놈들이 말아먹고 있는데 침묵하는 건 말도 못할 업보다. 정의를 외치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행동이다. 내가 말하는 게 업보를 만들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왕따 당하는 걸 수도, 감옥 가는 걸 수도, 종북좌파 딱지를 받게 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일 무서운 업보는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데도 입 딱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다.
연약함의 힘을, 사회운동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떡하면 좀 더 촉촉해질 수 있다는 건가?
부정의를 향해 싸우다보면 그들과 똑같이 닮아가기 십상이다. 똑같은 괴물이 되기 않기 위해선 일단 멈추고, 깊이 숨 쉬어야 한다. 내 존재의 밑바닥까지 가는 깊은 숨을. 그 다음에 깊이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사회운동 하는 사람일수록 그런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괴물적 판단과 괴물적 감성에 따른 운동을 피해갈 수 있다.
체제에서 자진해 뛰어내린 사람들을 자주 보는데 그들의 생기, 그들의 아름다움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갈 것이다. 연약함의 힘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생명의 부드러운 속살에 닿아 있어 연약할 뿐, 이 힘의 소유자는 힘 있는 사람 앞에서 쫄지 않고, 힘 없는 사람 앞에서 우쭐대거나 갑질하지 않는다.
신학, 심리학을 접목한 영적인 가이드(spiritual direction)를 하면서 늘 얘기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나는 스스로에게 진실한가(Am I true to myself)?”를 물어야 한다.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이 진정한 자아로부터 반응하는 건지를 점검해야 한다. 둘째, 그게 정말 내 목소리, 내 진실, 내 안의 그것이라면 그걸 드러내야 한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고, 사랑을 사랑이라 말해야 한다. 셋째는 책임지기다. 그게 억압이든 뭐든 다 받아들이고 책임져라. 왜냐하면 표현하지 않으면 이미 내가 나 자신을 파괴하는 거니까.
교육에 대해서도 “넘버원No.1이 아닌 온리원Only One”을 이야기하신다. 이 시대의 교육도 곳에 따라 다를 텐데?
북한엘 갔을 때다. 탁아소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완벽한 네 살짜리 아이들의 공연을 보고 가슴이 철렁하며 눈물이 흘렀다. 공연에 감동한 게 아니라, ‘아, 저 아이들이 통일한국의 아이들이 된다니’ 싶어서 안타까웠던 거다.
독일에서 심층심리 트레이닝을 할 때 만난 40대 청년은 과거 동독의 공동육아 과정을 통해 성장한 탓에 결국 분노조절을 잘 못하는 성인이 되었고, 남과의 관계에 있어 자기경계(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남인지)를 만드는 데도 서툴러서 늘 공격당하거나 공격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다. 3년을 나랑 같이 트레이닝하면서 그가 통곡하는 걸 보며 너무 가슴 아팠다. 그런데 북한에서 아이들이 바로 그렇게 자라고 있더라. 아이 양육을 탁아소에서 다 맡아 키워주기 때문에 영아를 주말에만 집에 데려 오는 걸 대단한 여성해방으로 이야기하던 북한 여성을 만났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접촉을 통해 일상적으로 백만 번의 긍정과 어울림 속에서 스스로 자신이 누군지를 느끼고, 사랑받는 존재, 존중받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남한 애들은? 창조적으로 자란 적이 없는데 갑자기 어떻게 창조경제를 하나? 북한 같은 탁아소에서 ‘우리 안의 그것’을 꺼내줄 수 없다. 한국 같은 교육 시스템에서도 이걸 못 꺼낸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 같은 도그마 종교에도 그런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메마르기 십상인 현 체제에 갇혀 있는 우리 아이들이 당장 어떻게 해야 그런 생명의 치유, 살림의 치유를 누릴 수 있을까?
소풍을 많이 가는 건 어떨까. 자연과의 교감은 가장 근본적인 치유이다. 다 죽어가는 자연이 아니라 살아 있는 땅,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과 접하게 해야 한다. 그런 자연은 이미 치유이기 때문이다. 또 예능, 체육 교육이 참 중요하다. 음악, 미술, 스포츠가 입시 때문에 다 없어지면 안 된다. 모두 김연아가 될 필요는 없다. 스포츠를 통해 아이들은 협동과 판단력을 배우고, 팀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방법도 배운다.
마이클 무어의 최신작 ‘다음 침공은 어디(where to invade next)?’에서 소개하는 핀란드의 교육은 학교 밖 현장 중심이다. 12시간씩 꼼짝없이 의자에 앉혀두는 데서 인지발달이 나오는 게 아니다. 삶과 바로 연결되는 현장에서 오감을 다 열어 접하는 핀란드의 아이들이 가장 행복하고 창조적인 아이들로 자란다는 거다.
다른 곳에서 “어떤 권력도 한 개인의 자발성을 끄집어내지는 못한다”고 말했는데, 결국 그걸 끄집어내는 건 뭔가?
매혹적인 힘이다. 생명의 힘! 살아 있는 힘!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라는 책 서문에 그렇게 썼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 과학혁명으로 진리를 추구했고, 20세기에는 정의란 무엇인가, 인권은 무엇인가 등 선善을 추구했다면, 21세기는 미美를 추구할 거라고 했다. 진과 선은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 모두 진리와 선함을 갖추기는 힘드니까 말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영혼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다. 아름다움도 다 다르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기 본질에 얼마나 가까우냐”에 있다. 미술이나 음악이 자기 본질에 가장 가까울 때 아름답듯, 사람도 자기 본질에 가장 가까워야 아름답다. ‘가장 자기다운 것’을 끄집어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 그들에겐 생명력이 있다. 내적 파괴의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아름다움은 자기 본질의 생명력과 연결되어 있는 데서 나온다.
현경 교수의 책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와 『연약함의 힘』.
국민의 바라는 바와 무관하게 진영으로 사분오열된 정치권을 보면서도 아쉬운 게 많을 것 같다.
난 트라우마가 많은 박근혜 대통령이 트라우마로부터 치유 받기를 기도하고 있다. 리더의 트라우마는 아래로 흘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국회의원 등 정치권은 비폭력으로 서로 대화하고 소통, 공감하는 법을 트레이닝 받아야 한다. 이제는 재래적이고 완력적인 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사드 배치만 해도 그렇다. 전 국민의 합의가 필요한 일을 성주 주민들도 모르게 은근슬쩍 결정한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그랬다.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건 랭킹(Ranking)이 아니라 링킹(Lingking)”이라고. 누가 더 위인지를 가리는 위계질서의 랭킹이 아니라 각자의 특장을 지니고 수평적으로 만나는 링킹이다. 그것은 상생의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나가는 여행과도 같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게 페미니즘의 가르침 중 하나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를 얘기할 수 있다. 우선, 국회의원과 정치가들한테 마치 숙제를 내주듯 순례와 수행을 꼭 시켜야 한다.
정치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운동에 거는 기대로 말씀 마무리했으면 한다.
지역주의(regionalism) 얘기에 귀 기울일 때다. 지역우수주의가 아니다. 내 고장 자치를 하자, 내 고장 살려내자, 내 고장에서 나는 제철음식 먹자, 버스 타고 다닐만한 휴먼스케일의 고장에 필요한 모든 걸 갖추게 하자, 그런 살만한 고장을 만들기 위해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주민자치·주민운동·시민운동을 키우자는 거다. 이런 지역주의 블록이 정치를 이루는 기본단위가 되어야 한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그렇게 물들여 가야 한다. 이런 운동들이 올라가 정치적 결정을 하면 정치의 겉모습만이 아닌 그 핵심이 바뀐다. 정치가들이 지역운동, 마을운동을 무서워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선택할 것이기에.
볼리비아, 에콰도르에서는 인권만이 아니라 ‘자연권’을 선포했다.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와 나무와 숲, 강에도 투표권을 주라는 에코페미니즘이 나는 가장 깊은 민주주의라고 본다. 저 깊은 풀뿌리에서 올라오는 민주주의가 미래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글. 박유안
기웃기웃 번역가. ‘알트’ 출판사에서 일하는 그는 “까칠해도 친절하게”가 삶의 모토이며, “쟌 모리스를 번역한 작가”로 기억되길 바란다. 밤엔 주로 땅고 추며 논다. 맘 놓고 춤 출 좋은 세상을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