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들어가며
제 4강의 드라마는 얼마전 막을 내린 드라마 '추노' 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붙잡는 추노꾼 이대길, 소현세자를 보필했던 장군 송태하, 노비에서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꾀한 김혜원 등의 등장인물로 기존 왕실 이야기를 다룬 사극과는 달리 민초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신선했다는 반응과 함께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입니다. 인기와 더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추노꾼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당시 양반을 죽이기 위한 노비들의 비밀 결사대가 존재했는가? 등의 많은 궁금증 또한 만들어 냈습니다.
'추노'라는 드라마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부분의 사극드라마와 마찬가지로 '추노' 역시 사실과 허구가 조화된 드라마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시대를 중심으로 소현세자와 노비문제를 다룬 것은 사실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전개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3째 아들인 석견을 제주에서 구해오고 청으로 데리고 가는 설정. 그리고 노비들의 해방공간인 월악산, 노비들이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양반을 죽이는 장면은 허구로 볼 수 있는 것이죠. 또한 좌의정은 가공인물이지만 좌의정이 주장했던 북벌. 즉 청나라는 오랑캐가 구성원이기 때문에 순응할 수 없다는 설정은 사실로 볼 수 있습니다. 인조 이후에 왕이 된 효종이 주장했던 북벌 주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명기 교수님 께서는 '추노'라는 드라마는 사실과 허구를 잘 조화시켜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는 평가를 내려주셨습니다.
▲ 한명기 교수
소현세자는 누구인가?
이제 드라마를 떠나 당시 조선사회와 대외관계에 대해서 알아 볼텐데요.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소현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아야 이야기를 풀어 갈 수 있겠죠? 소현세자는 조선 후기 왕족으로 1625년에 세자로 책봉되지만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는 인물입니다. 당시 인조(제 16대 왕)는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를 무척이나 아꼈다고 합니다. 청군 장교에게 부탁하여 압록강을 건널때까지 온돌에서 재워 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대목이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욕하면서 배운다." 교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그들의 생활 양식을 보게 됩니다. 조선과 달리 능력있는 자가 선발되어 나라의 왕이 되거나 축제를 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질박함을 보고 청나라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에 가정은 필요없지만 만약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의 인식과 근대화가 앞당겨지지 않았을까'라는 말씀도 함께 해주셨죠. 시간이 지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는 더 이상 조선이 청나라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두달 후에 죽고 맙니다. 돌아온 당시 인조는 소현세자를 외면했다고 합니다. 청에서 광범위한 인맥과 신임을 쌓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자신을 내치고 소현을 왕으로 올릴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인듯 합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독살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인조의 행동에서 그 개연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소현의 사망원인을 조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3일만에 입관. 그리고 당시 주치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친이라 하기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의 조선
조선 전기의 양인(양반, 중인, 양민)과 천민(노비, 재인, 기생) 그리고 조선 후기의 양반, 중인, 양민, 천민. 즉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을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양난을 겪은 이후 신분에 붕괴가 생기게 됩니다. 일부 양반은 가세가 기울어 영향력이 약화되어 양민의 생활을 하는가 하면 부를 축적한 노비가 양반행세를 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양난을 겪은 조선 사회가 혼란했음을 뜻하는 것이죠.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현재의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계를 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구조 작업중 돌아가신 故 한주호 준위님을 보며 우리사회의 전반적인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을 느끼셨는데 당시 조선 사회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번 사고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시 양난으로 인한 고통은 일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 되었죠.
앞서 언급한 신분 붕괴의 한 예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자료를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경상도 감사 공문을 보내 온 가운데 평안도 감찰사에게 보냈다. 초계군(경상의령) 이 수추(체포된 죄수) 죄인 이숙회(정확하지는 않지만 동물의 암수 구별의 숫개라는 뜻으로 노비 이름을 뜻합니다)의 건. 이자는 정원벽 집안의 노비가 양인과 결혼해서 낳은 사람으로 가세가 풍요로워지더니 스스로를 양반이라 칭했다. 그런데 재수 없게 정원벽의 부인을 만나 너는 우리 집 노비이지 않았는가? 라 면박을 주었고 남의 앞길을 막아버렸다는 분통이 쌓여 감정이 격해졌다. 식솔을 인솔하여 정원벽의 처를 얕보고 처들어가서 위협하니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이 무지하게 괴롭혔다. 그래서 백여사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평안감형계녹(平安監營啓綠) 1844년>
노비가 도망을 선택하게 된 까닭은?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질적 토대는 토지와 노비였습니다. 토지와 다르게 노비는 살아있는 동안 결혼을 통해 증식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던 것이죠. 노비의 숫자에 대해서는 설들이 분분하지만 17세기에는 약 3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600만이었으니 절반이 노비라는 이야기 입니다. 노비도 여러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궁궐, 관청이 소유한 '공노비'와 개인이 거느리는 '사노비'. 사노비 중에서도 함께 동거하는 '솔거노비'와 바깥에서 독립하며 사는 '외거노비'가 있습니다.
17세기 이후 노비들의 도망이 증가됩니다. 양난을 통해 국가의 통제가 느슨해진 이유도 있고 도망을 통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양인의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노비들에게 부과되는 부담이 너무 과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비에게는 크게 신공(자신의 주인에게 특정 물품을 납부)과 입역(일정한 시간동안 몸으로 노동력을 제공)이 있습니다. 이것을 화폐나 쌀로 대신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왕조실록에는 사노비 관련 자료가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노비의 경우 입역을 마치면 집안이 거덜나는 정도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 부정이 많이 일어 나기 때문에 그 부담은 가중될 수 밖에 없었고 이를 미루어 볼때 부담을 회피하기 위해 도망을 택한 경우의 비율이 많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더하게 됩니다.
'추노꾼'은 과연 존재했는가?
수많은 도망 노비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의 '추노꾼' 이대길과 같은 인물이 실제로 존재 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는 허구입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는 일은 정부의 몫이었습니다. 1655년 효종 6년차 도망간 노비를 잡기 위해 추세도감이 설치 됩니다. 도망간 노비를 잡는 일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임시 관청으로 추세도감은 조선 전기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효종이 추세도감을 설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집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효종은 북벌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조선이 청나라와 전투를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력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재정적자 상태였습니다. 국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벌은 무의미했고 단기간에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세도감을 생각해 낸 것 입니다. 당시 장부상의 공노비는 19만, 하지만 신공을 바치는 노비는 2만 7천명에 불과했습니다. 16만에 노비에게 신공을 받는 다면 재정에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계산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문제가 생깁니다. 양난을 겪을 당시 공을 세워 노비 신분을 면해주었던 납속책. 이에 대한 증명서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드물었고 이를 선별하는 것 또한 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노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해서 아들과 손자는 양반이 된 사례 등 문제점이 너무 컸던 것이죠. 결국 1만명 이내로 신공을 거둬드렸지만 사회적 혼란은 가중 되었고 결과적으로 추세도감을 폐지하게 됩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대외적 관계
한반도는 조선시대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일본까지 대륙과 해양에 끼어있는 존재입니다. 현재에 와서도 G7으로 대변되는 강대국이 있죠? 지금은 G2라고도 이야기 되는데 미국과 중국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중국내의 한족이 중심이 된 왕족이 계속 장악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거란과 몽골 만주등의 비 한족의 힘이 커질 때 한반도는 한족과 북방민족의 압력에 많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현세자가 희생됬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개의 강대국 중 한쪽이 열세에 놓이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양쪽이 비등해져 사사건건 부딪치게 되면 한반도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다다르게 됩니다. 현재보다는 조선시대가 더 심했다고 볼 수있습니다. 양난의 근본적인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입니다. 또한 양난을 극복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외교적 실패로 인한 모든 고통이 민중에게 전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 항해원조? 그리고 항미원조
임진왜란은 당시 동아시아 제패를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그 목표는 조선이 아니라 명나라 였습니다. 명나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참전이었지만 이를 빌미로 항해원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왜구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와준 전투. 즉 도왔다는 것에 비중을 두었고 보답하라는 늬앙스를 강조한 것입니다. 再造之恩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의 지배층을 짖누르게 됩니다.
이러한 사례는 6.25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항미원조라고 하는데 북한에 국한 된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할 당시 중국은 한국의 국군이 38도선을 넘으면 가만이있지 않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미 1950년 7월 북한군이 승승장구 할 때 중공군은 이미 15만의 군사를 열차편으로 압록강 두만강에 배치해둔 상황이 었습니다. 전세가 역전될 것이라는 예상을 모택동은 이미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해 10월 모택동의 아들 모한영도 참전하게 되는데 미군폭격으로 인해 모한영은 죽고 그 무덤을 평양에 만들었습니다. 이는 결국 조선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지배층에 대한 압박이었고 현재의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병자호란 직전 상황을 보면 오늘이 보인다.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하지만 결국 최종 결론은 통치자가 내리는 것입니다. 통치자는 상당히 고독하고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당시 인조는 대국을 종합적으로 보는 인물은 못되었다는 평입니다. 이것이 조선의 또 다른 비극이었습니다. 결국 척화파들이 목을 치자고 주장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이었지만 대책은 없었던 것입니다.당시 최명길 [崔鳴吉, 1586 ~ 1647] 은 진짜로 싸울 것이라면 강화도를 불태우고 거기서 압록강에서 결판을 내자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더라도 조약을 맺을 수 있으므로 백성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습니다.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청나라는 압록강이 얼자마자 돌격을 해왔고 강화도로의 도망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최명길은 목숨을 걸고 시간을 끌었고 그 시간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몸을 피하게 됩니다. 45일만에 군량이 떨어지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1637년 삼전도의 치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상황으로 돌아 옵니다. 현재 세계의 패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는 중국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을 누루고 패권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도 일각에서 일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그 안에 한반도가 있습니다. 시대만 다를 뿐이지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와 달리 전쟁이 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그것보다는 경제적 관점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중국 사이에 한반도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명기 교수님께서는 하이에나(?)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일반화 시켜보겠습니다. 현재 두 국가의 사이가 100이라고 한다면 40이 어디에 붙느냐에 따라서 무게의 추가 기울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구려를 제외하면 125를 넘어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한반도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강대국의 세력이 비등비등하면 언제나 피해를 보는 것은 그 가운데에 끼어있는 한반도 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의 결과가 그대로 현재에 와서 재연되지 않도록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과거처럼 모든 고통은 일반 국민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제 4강 소현세자는 누가 죽였나? 후기를 마치며
한명기 교수님은 제주도로 출장을 다녀오셨음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하나 없이 강의를 진행해주셨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강의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거의 문제를 현재에 대입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또한 요즘 세대가 두려워(?)하는 한문을 이용해 당시의 시대상황과 한문이 갖는 고유의 장점도 설명해주셨지요 ^^
후기작성은 처음인지라, 부족한 점이 참 많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더 노력해서 제대로 된 후기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