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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페미니즘, 한국 남자를 말하다 참여 후기
1. <페미니즘, 한국 남자를 말하다> 강연 참가 후기
참여연대에서 진행한 <페미니즘, 한국 남자를 말하다> 수업을 듣고 왔다.
최태섭과 손희정 선생님 강연이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할까.
짬에서 흘러나오는 바이브를 그저 열심히 귀담아 듣고 필기했다.
마지막엔 싸인을 받아볼까 고민했지만 괜히 민망하여 집에 돌아와 소감으로 대신한다.
일단 강연은 1, 2회 차 모두 참여자가 풀방에 가까울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두 쌤은 그에 보답하듯 지식을 쏟아내 주셨고 덕분에 속기는 가뿐히 열 장을 넘었다. 핸드폰도 반으로 접히는 시대에 대체 왜 아직도 인공지능 필기 기술은 대중화 되지 않은 걸까.
페미니즘 대중 강연을 들으러 꽤 싸돌아다닌 편인 것 같은데, 이렇게 ‘남성’을 주제로 또 대상으로 하는 강연은 처음인 것 같았다. 실제로 남성 참여자들도 적잖았다. 그래도 이런 강연이 하나 둘 생기고 강연을 들으러 오는 남성들도 조금씩 늘어난다는 건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좋은 징조가 아닐까? 꿈은 크고 위로가 흔했지만 험난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위해선 스스로라도 잦은 다독임이 필요하다.
2. 페미니즘이 말하는 한국 남자
두 분의 강연 내용은 제목에 충실히 ‘한국 남성’을 다루었다.
봉건적 남성성, 식민지 남성성, 해방과 건국 이후 국가주의 남성성, 70년대 군사주의 남성성, 80년대 자본주의 남성성, IMF이후 신자유주의 남성성, 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일베st 남성성(정확한 용어를 모르겠다.) 등. 유구한 역사 속에서 남성성은 어떻게, 얼마나 꾸준하고 부지런히 다채로운 똥을 싸 왔는가.
강연 분위기는 자못 유쾌했으나 마음 한 편은 뒤를 닦지 않고 나온 것처럼 찝찝했다.
지금 강연을 들으며 웃고 있는 나도 남성성에서 자유롭다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손절했다고 해도 관성은 여전하다.
언제고 다시 그 굴레로 돌아갈지 모른다.
특히 지금 활동이 자신의 이익과 배치될 때에도 묵묵히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까.
남페미 활동을 둘러싼 우려와 회의는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손희정 선생님은 이 우려를 아래와 같이 말씀해 주셨다.
개인적으로 남페미가 필요하고 반갑고 동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성들이 여성을 위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해서 평생 운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성들 역시 자신의 해방을 위해서 페미니즘이라는 방법론,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게 가능할 때 본인의 부조리와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해방을 위해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이롭다고 생각한다.
기존 사회 규범에 저항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활동 특성상 그 길이 늘 꽃밭이기만을 바랄 수 없음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페미의 태도가 언제까지 삼궤구고두례로 스스로 이마에 빵꾸 내는 행위에만 그친다면, 그 길은 결코 지속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효율적이지도 않다. 심지어는 그런 태도마저 자기연민에 불과할지 모른다.
남성에게도 페미니즘이 왜 꼭 필요한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주변에 그 필요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남페미의 언어가, 활동 동력이 될 것이다. 결국 남성들이 지난 과오를 반복하거나 저 혼자 가시면류관을 쓰고 죄인 행색으로 동정을 구걸하는 걸인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3. 한국 남자가 만난 페미니즘
나는 땅콩과 아몬드 맛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대체로 미각이 둔한 편이라 다양한 맛의 오묘함 앞에서도 그저 ‘맛있네’와 ‘그저 그렇네’ 정도로 귀결될 뿐이었다. 미학에 대해서도 둔감했다. 미술작품이나 전시물을 두고도 큰 감흥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이 아름답고 예쁜지, 무엇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 무관심했다. 나는 이것이 내 특유의 무감각함, 무심함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난 후, 이런 내 삶의 태도가 일종의 부정적인 남성성에 기인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린 감성, 다채로운 감정표현, 까다로운 선호는 주변인들에게 ‘유난’이라 낙인찍히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그저 씩씩하게 무엇이나 잘 주워 먹고 아프나 슬프나 호탕하게 웃어재끼는 쿨~한 남성을 주변에서도 원했고 스스로도 되고 싶었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은 오랫동안 정들었던 해외봉사 활동을 정리하고 오면서였다. 슬픈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수도꼭지 같이 눈물 흘리진 않을지라도 아쉬움을 털어내며 눈물어린 환송을 상상했는데, 멀뚱히 서서 눈만 끔뻑였다. 몰아치는 부정적인 감정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몰라 외면하고 또 도피했다.
온전한 나로 살지 못하는 불행한 삶이었다.
주변 친구들을 만나 꽃을 구경하고 쇼핑을 다녀도,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늘 감흥이 덜했다. 효율과 비효율, 좋음과 나쁨, 옳고 그름.
0과 1의 세상, 흑백의 세상에서 살았다.
다행히 좋은 친구들을 만나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변하게 됐다. 내가 바라보던 여성성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만큼 내가 지향하던 남성성도 의심할 수 있었다. 나아가 여성과 남성 기존 정상성에 의문을 품을 수 있게 되며, 0과 1 그 밖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효율과 당위, 호오의 이분법을 지나 중간과 과정, 절차와 감정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이내 세상이 다채롭게 물들기 시작했다. 미식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카페와 식당이 생겼다. 잘 어울리는 옷과 색깔이 있음을 알게 됐다. 여전히 예술은 어렵지만 그래도 시도함이 이전만큼 어렵지 않다. 내 취향이 무엇인지 찾고 고민할 수 있게 됐다.
4. 페미니즘, 한국 남자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변한 게 어디 그 뿐 일까.
남성 집단 내 위계적인 문화와 나를 옥죄던 강박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고
관계와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했다.
하다못해 아주 작은 습관까지도 조금씩 변하고 달라졌다.
물론 늦게 배운 만큼 자주 어려움을 맞닥뜨리고 한계에 부딪히기도 한다.
배움과 실천의 괴리에서 고통 받을 때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젠 더 이상 페미니즘을 배우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나도, 주변도, 세상도 이미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절박하게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남성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서로의 필요를 함께 배우고 나누어 언젠가 이런 필요가 주변까지 널리 옮아가 도저히 페미니즘을 배우지 않고는 모임에, 이야기에 낄 수가 없어 또 다시 절박하게 공부하는 남성들이 생길거라 믿는다.
페미니즘이 한국 남자를 말했다.
이제는 한국 남자가 대답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