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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배움은 어떤 여행인가요
<시사인> 10월9일
아래 글을 보다가, 저자의 글에 참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에 오시는 분들과 함께 읽고 싶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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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팔릴까 봐’ 질문 못하는 한국의 교실한국의 교육은
가이드북에 나온 내용을 확인하러 다니는 여행과 같다.
교육을 통해 무지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고 만다.
- 엄기호 (덕성여대 강사·문화인류학과)
교육이 문제라고, 학교가 문제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정작 관심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에만 머문다.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어떤 일상이 펼쳐지고 있을까.
대개가 그곳을 거쳐왔지만 제대로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 굳이 대안을 말하려 애쓰지는 않기로 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까지, 다섯 필자가 ‘교육 현장의 속살’을 날것으로 전하는 새 연재를 시작한다.
나는 배움이란 여행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자신이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만나기 위해 아예 낯선 땅으로 떠나는 것도 여행이고, 자신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도 여행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반경 10마일(약 16㎞)의 산책 가능한 거리 안에 있는 경치와 인간의 칠십 평생이 가지는 공통점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익숙한 일상 안에서도 끊임없이 몰랐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언컨대, 여행의 재미는 발견의 재미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대다수는 가이드북이 알려준 대로 이미 알고 있던 것이 거기 진짜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러 온 경우가 많다. 다비드 상이 거기에 있고,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거기에 있다. 그 게르니카와 다비드를 보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 즉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만 하고 가버린다. 이런 여행에는 배움이 없다. 배운 것이 없으니 여행을 다녀와서도 할 말이 없다. 새로운 것을 경험했으면 무궁무진하게 할 이야기가 많아야 하는데 아는 것만 확인하고 왔으니 여행의 끝에 이야기의 빈곤만 실감한다.
'우수한' 자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환영받아야
한국의 교육은 이렇게 발견이 아니라 확인하러 다니는 여행과 비슷하다. 여행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배움은 자신이 지금까지 몰랐던 것을 발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무지한 자로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앎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배우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지를 드러내는 ‘용기’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교실이 무지를 드러내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용기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수한 자’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환영받을 때 그 공간은 배움의 공간이 될 수 있다. 교실에서 배우는 자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말하기가 무엇인가? 질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실에서 질문은 억압되고 있다. 수업을 마치면서 질문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가만히 있는다. 재미없는 수업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흥미진진하게 듣는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다 알아들어서 질문이 없을 리가 없다. 학생들과 왜 수업 시간에 질문하지 않는지를 이야기해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쪽팔릴까 봐 겁이 나서’였다. 수업을 듣다 보면 ‘저건 아닌데?’나 ‘어 저건 왜 저렇지?’라는 의문이 당연히 든다. 그런데 그 순간 대부분 이걸 질문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망설이게 된다고 한다. 한국의 학교에서는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에서부터 ‘그걸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조롱까지를 감수해야 겨우 질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들 한번쯤은 이런 ‘개망신’당한 경험이 있기에 학교에서 배운 것은 ‘모르면 질문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질문하는 것이 창피한 일이 된 이유는 한국의 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무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시험이다. 시험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해 치르는 게 아니라 아는 것이 무엇이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치른다. 그래서 시험을 치고 나면 ‘알았다/몰랐다’가 아니라 ‘맞았다/틀렸다’고 말한다. 모르는 것은 틀린 것이기 때문에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되고 그것은 감추어야 한다. 그러니 질문을 하는 것은 꺼려진다. 한국의 교실은 발견의 재미는 사라지고 확인의 강박에만 시달리는 여행과 꼭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