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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4강
지난 5월 6일 <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4번째 강의가 있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조선시대 여성들이 살아간 모습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같은 조선시대라도 전기와 후기 여성의 삶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갔습니다. 원래 원시 유학은 음과 양에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양과 음, 천과 지, 남과 여의 위치와 높이를 구별하고 이런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순리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성리학이 조선 유학 사상의 중심으로 자리하면서 조선 여성의 지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조선이 막 건국되었을 때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고려 시대에 비해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정도전은 혼인 제도에 대해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친영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왕실에서는 친영을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고자 하였지만 실제로 사대부나 백성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여성의 행동에 제약을 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경국대전에서는 과부의 재가를 금지합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그 자손이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하였기 때문에, 자식이 재혼하는 어머니를 막고자 재혼 상대와 싸우는 등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같은 성종 대의 어우동 이야기에서도 여성에게 제약이 늘어가는 모습을 살필 수 있습니다. 어우동은 양반가의 딸로, 왕족과 결혼하였으나 여러 남자와의 성 편력으로 처형당했습니다. 비슷한 시대에 여성의 간음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 시대에 갑자기 여성의 간음이 늘었다기보다는 원래 비교적 자유롭던 여성의 성적 의사결정에 대해서 갑자기 규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 외에도 국가 차원의 풍속 교화로 여성의 행동에 제약이 늘었습니다. 부녀자의 상사, 음사를 금지하면서 여성들은 이전까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외출과 유희를 규제받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의 '내외법' 역시 여성의 자유를 축소, 규제하는 법령이었습니다.
족보 기록에서도 여성의 지위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초의 족보들은 난 순서대로 딸의 이름과 함께 여부(사위), 후부(딸의 재가 상대) 등도 기록하였던 반면, 후기에는 선남후녀식으로 작성하거나 딸의 이름은 아예 쓰지 않고 사위만 명기하며 외손에 대한 기록을 축소하는 등 여성에 대한 차별이 커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유와 지위를 잃은 여성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요? 반가 여성들이 수행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봉제사 접빈객', 즉 제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손님맞이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어 개인의 집에서 공적인 얘기를 나누는 경우가 많았던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손님을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해당 양반의 정치적, 사회적 입장을 좌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봉제사와 접빈객을 위해 각 가문마다 음식 차리는 법이 발전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종가 음식'입니다. '음식디미방'과 같은 요리 비법을 출가외인이 될 딸 대신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모습에서 조선시대 여성의 정체성이 딸에서 며느리로 변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가정의 경제권 역시 여성이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붕당정치에서 특정 당파가 득세하고 다른 당파는 탈락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경제를 지탱하는 가정이 생겨났습니다. 몰락한 당파의 양반은 과거를 봐도 희망이 없지만, 4대 동안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 지위를 박탈당하기에 과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과거 공부만 하느라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남편 대신 아내가 가계를 꾸려가는 경우가 많아진 것입니다. '성호사설'을 쓴 이익의 글에서는 여성의 경제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드러나는데, 여기서 여성과 남성의 경제력 변화로 인한 긴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여성의 경제력이 상승하면서 이혼율이 상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처럼 여성이 경제적 문제 때문에 힘든 점이 있어도 이혼하지 못하는 일이 많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양란 이후 여성의 삶은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호란 때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들을 환향녀('화냥년'의 어원)라 부르며 '정절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홍제원에 큰 목욕시설을 두고 거기 들어갔다 나오면 정결해진 것으로 한다는 식의 정책도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호란에서의 피해는 남성 지배층이 무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책임을 극단적 정절의식으로 여성에게 떠넘긴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호란 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제시대 소위 '위안부'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 역시 마찬가지로 가혹한 시선을 받았습니다. 최근에야 이 문제가 주목을 받고 있지만, 자기반성 없이 일본에 대한 증오로 끝나서는 의미없는 피해의식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요? 이 사회의 책임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고민하고, 또한 개인으로서도 내가 다수자로서 다른 이를 소외시키거나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부담해서' 다른 소수자를 배려할 생각이 있는지 끊임없이 확장해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제약과 억압이 늘어나는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조선 여성을 그저 수동적이고 남편의 가문에 구속된 존재로만 볼 것은 또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여성의 정체성이 딸에서 며느리, 출가외인으로 변해갔다고 하지만 실제로 딸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에게 영창대군 대신 친정 식구들을 살려달라는 서한을 보냈던 것이나, 신사임당이 친정에서 생활한 것, 혜경궁 홍씨가 벽파인 친정식구들을 살리고자 쓴 '한중록' 등에서 딸로서의 정체감이나 친정에 대한 소속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달리 여성이 성(姓)을 그대로 썼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출판물에서도 여성이 나름의 영역을 발전시켜나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이후 등장한 소설문학의 경우 한글로 쓰인 경우가 많고 판타지적 요소를 포함하며 때로는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도 있는데, 주 독자층이 여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대부가 여성의 경우 드러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유학에 대해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숨기다가 나중에 글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지만 생전에 본인의 문집이 발간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위에 쓴 '음식디미방' 등도 여성이 만들고 전승한 내용이 책으로 나온 예입니다. 조선시대 여성을 마냥 한 맺혀 살아간 피해자, 수동적인 존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나름의 영역을 구가한 능동적 주체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