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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독서클럽-공화국의 위기] 2강, 시민불복종
9.13 노사정합의안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마르크스주의 국가관대로, 국가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생각도 들었다. 이어서 9.16 새누리당의 입법발의 내용은 노사정합의 조차도 지키지 않는 대국적인 정치행태를 보였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조항과 이어지는 기본권의 내용들을 비웃기나 하듯 벌어지는 행위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바로 어제(9/23) 시민들은 거리에 나갔지만 경찰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수많은 시민들이 연행됐다. 아렌트의 [시민불복종] 강의를 듣는 순간에 시민불복종 행위가 거리에서 발생한 건 놀라운 우연의 일치였다.
시민불복종과 혁명, 두 개념은 비슷한 개념으로 인식되고 특히 시민불복종은 불복종이라는 말에만 집중해서 혁명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둘은 다른 개념이다. 혁명은 시스템을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고 시민불복종은 시스템의 왜곡을 막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합법과 불법은 기존의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헌법은 단순히 쓰여진 문서가 아니라 우리가 시스템을 구성한 흔적이며 앞으로의 시스템을 구성하려는 약속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의 원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나왔을 때, 시민들은 깨어나게 되고 불가피하게 사소한 법률을 어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시민불복종으로 이어진다. 집회 자체를 꺼리는 사람들은 시위하는 사람들이 도로교통법을 어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시민불복종의 경우 헌법 정신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기에 법의 단계상 도로교통법과 같은 사소한 법률은 어길 수도 있다. 시민불복종의 순간이 초일상의 순간이므로 합법과 불법이라는 일상의 법 개념을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시민불복종 행위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위기의 순간인 건 맞는데 나쁘지 않다. 분명 시민들이 법조문을 어긴 건 맞다. 하지만, 법조문과 체제에 대해 문제제기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법(法) 정신”이다. 시민들이 우리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거리로 나오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위이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의 장점은 풀뿌리 조직(자발적결사체)이 금방 만들어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늘 강조하듯 아렌트도 강조했다시피, 시민불복종 행위가 폭력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정치체제에 들어가 원리를 만들고 그 원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치적 인간이 되지 않는다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이다. 현 체제에서 가장 민주적인 순간이 시민불복종인 반면, 일상의 순간과는 다른 형태의 혁명의 시간은 법이나 제도가 그 자체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이다. 공적영역(합법)과 사적영역(불법)의 경계선이 혁명의 순간에, 즉 초일상의 순간에 일그러지게 되고 그 일그러진 빈틈에서 초법적 영역이 발생한다. 이는 일반적인 법 개념(합법과 불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일상의 정치에선 엘리트가 권력을 독점한다. 하지만, 초일상의 순간엔 주권자인 시민이 주권을 되찾는다. 셸든 월린(Sheldon wolin)의 ‘도망자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이 일상의 정치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것 같다. ‘도망자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엔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의도했던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제 민주정체에서 시민의 참여란 혁명 혹은 저항이라는 일시적인 순간에만 존재할 뿐이고 정치가 일상으로 접어들면 참여는 모습을 감춘다. 웰린은 이러한 현실을 도망자(fugitive)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초일상의 순간, 즉 주권자가 다시 등장하게 되는 순간은 매우 소중한 순간이다.
아렌트는 [시민불복종] 초반부에 ‘양심적 거부’와 ‘시민불복종’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두 개념은 완벽히 다른 개념이지만 혼동해서 사용되는 개념이다. 첫 번째로, 세상과의 관계에서 차이가 있다. 양심적 거부의 경우 나의 양심에 묻고 아닐 경우 행위하지 않는 것이다. 즉, 세상과 관련되지 않은 나의 행위일 뿐이다. 반면, 시민불복종의 경우 바깥 세계와 나의 양심을 일치시키는 일, 다수의 정의감에 호소해서 세계와 함께 하는 행위이다. 두 번째로, 단위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철저히 개인이 하는 것으로,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와 소로의 예를 들어 말한다. 반면에, 후자는 집단이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양심적 거부’는 대안을 주지 않지만, ‘시민불복종’은 대안을 가진다는 차이가 있다. 네 번째로, 전자는 소극적, 후자는 적극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늘 변화한다. 따라서, 변화되는 시대에 맞게 법과 체제가 따라가야 한다. 베블런(Veblen)은 보수와 진보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보수는 이전의 시스템을 유지하자는 것이고, 진보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를 구성했던 집단은 대개 자신이 만든 사회를 새롭게 형성하려는 행위가 사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기고 더 나아가 사회를 새롭게 구성하려는 행위 자체를 차단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는 메디슨과 제퍼슨의 유명한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메디슨은 사회를 새롭게 만드는 구성행위를 하는 것이 사회를 위험에 노출시킨다 생각한 반면, 제퍼슨은 자신의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18년마다 각 세대가 자신들의 헌법을 구성할 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메디슨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퍼슨의 주장은 후 세대가 기존 헌법을 수정할 권리로 남았다. 이전 세대의 잘못된 것을 바꾸는 것, 주권자인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 결코 사회에 해롭지 않은 것, 그것이 시민불복종이다.
시민불복종 행위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말한다. 왜 법의 과정을 활용하지 않는 거냐고. 정치에 참여해서 법을 바꾸면 되고 일상적인 과정을 거쳐 세상을 바꾸면 되지 왜 거리로 나와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거냐고. 맞는 말이면서도 틀린 말이다. 법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세상은 행동함으로 바뀐다. 정상적인 과정으로 왕이 시민들에게 권력을 주었나? 이승만이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는가, 박정희가 61년에 약속했던 민정이양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는가, 전두환을 법을 바꿔서 끌어내렸나하는 것이다. 모든 소수자의 역사를 보라. 일상적인 정치의 과정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9월 5일 박상훈 정치발전소학교장은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촛불 10번 드는 것보다 좋은 정당이 더 중요하죠”라는 말을 했다. 그의 강의를 여러 번 들었고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점은 많지만, 시민의 주권자로써의 등장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그의 주장엔 공감하지 않아 짧게 반박해보고 싶다. 첫 번째로, 그는 우리나라의 양당제를 비판하며 유럽의 예를 들며 300개가 넘는 정당이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우리나라도 이처럼 많은 정당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정당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정당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경로 300개가 모든 논의를 정치에 반영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건강한 시민단체 300개도 없는 나라에서 300개의 정당이 있어야 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두 번째로, 일상의 정치는 엘리트들이 독점하는데, 정당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의 해결책이라 주장하는 것은 결국 엘리트를 다른 엘리트로 교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로, 하나의 당은 하나의 의견으로 수렴하려는 성질을 가진다. 다시 말해, 정당이 목소리의 다양성을 지운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의 차이를 구분해낼 수 없다. 결국, 제도권 정치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같이 들린다.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선 의회정치의 정상화가 필요하다는 것엔 동감하지만, 그렇다고 시민참여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견을 제기하는 것이 사회를 바람직하게 만든다는 것엔 그도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견을 제기하는 통로가 제도권 정치 하나밖에 없다면, 결국 주권자의 참여를 제한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의제 정부는 그 자체로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다. 한편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시민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모든 제도를 잃어왔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 제도가 모든 것을 대표할 것이라는 믿음의 질병에 막대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한나아렌트-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법이 생겨나면, 법은 실제 변화를 안정화하고 합법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변화 그 자체는 언제나 초법적인 행위의 결과이다.[한나아렌트-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
“일상의 정치는 정치 엘리트가 독점한다. 반면 민주적인 초일상의 정치는 의식 있는 대중의 정치 참여와 초일상적인 제도적이며 자발적인 집단적 개입에 공간을 연다. 이 초일상의 순간에, 잠자던 인민주권이 깨어나 자신이 자기의사결정과 자치정부에서 최고의 권력임을 재확인하고, 일상의 입법과 제도화된 정치를 규율하는 근본적인 규범, 가치, 제도를 실질적으로 다시 정비하거나 바꾼다.[안드레아스 칼리바스-민주주의와 초일상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