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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3강, 합의
[김만권 정치철학 <정치를 이해하기 위한 여섯 가지 키워드2>] 3강(1/27),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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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각각 사회의 주인으로 남아있게 하는 힘, 합의
안녕하세요. 김만권 선생님 정치철학 세번째 강좌, ‘합의’에 대한 후기 시작하겠습니다~
<강의내용>
수업은 우선 지난 시간과 관련된 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다음 시를 잠깐 보실까요.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어느 날/한 자칭 맑스주의자가/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노동자 출신이라고 얘기해 주었다/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허둥대며 그가 말했다/조국해방전선에 함께하게 된 것을/영광으로 생각하라고/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하지 않았다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고/저 꽃잎 안에서 날마다 흔들리고/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읽고 각자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에 나온 학력, 출신성분 뿐만 아니라 재산, 지역, 외모, 성정체성 등 우리들의 다양한 차이들을 잘못 이해하고 차별의 근거로 쓰고 있지는 않은지 새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만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차별하려는 무의식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한 이후에야, 이성적으로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등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우리 모두가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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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수업으로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은 1)‘모멸감’과 ‘평등’의 관계에 대해서, 2)경제 정책이 ‘평등’이라는 키워드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맥락에 대해서 부연설명한 이후, 지난 시간의 질문들에 대해 대답해주셨습니다.
먼저, 모멸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타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 그 개인은 모멸감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생존을 넘어서 표현을 통해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표현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차별당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 소수자 및 약자가) 느끼는 모멸감은 그 감정이 지속될 경우 폭력으로 악화될 수 있기에 위험합니다. 여기에 정치적, 법적 평등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에서 태어난 구성원들의 평등을 보장하여 사회의 균열 및 붕괴를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회의 구성원리인 민주주의는 의사 결정의 한 방식에 불과한 다수결과는 다른 것입니다. 개인(그리고 개인의 의견)이 동등하게 중요한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적인 결정방식이라기보다는, 차선책으로 결정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되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다수결이 민주주의 사회의 표상처럼 된 이유는, 아마도 개인의 의견이 너무도 다양한 사회에서 그만큼 합의하기가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 결정의 과정에서 때로 ‘다수’의 이름으로 사회 전체의 가치에 해로운 결정이 내려질 수 있기에 민주사회의 헌법은 단순히 과반수의 이름으로 바꿀 수 없는 사항들을 글의 형태로 남겨놓았습니다.
다음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제 정책이 평등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맥락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기반이 ‘표현하는 인간’에 있다고 한다면, 민주주의 국가는 당연히 개인이 표현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안전망을 구축해놓아야 합니다. 즉, 정치적 평등에 기반한 국가이기에 경제정책이 그 정치적 평등을 유지하기 위한 방향으로 존립되고 있어야 함은 당연할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정치적 평등의 원리하에서 경제정책이 (정치적 평등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평등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여기서 말하는 경제적 평등이 단순한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적합한’ 평등임을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첫 댓글을 달아주신(!) 찌마님의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만권선생님의 대답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Q. 정치적 평등, 경제적 평등이 상호보완적이며 동시다발적인 개념일수 있겠으나, 그 중 어떤 것이 제도를 만드는 현실정치에 있어 먼저 집중해야 할 사안이 될까요?
A. 정치적 평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해서 경제적 평등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경제적 평등을 우선으로 해서 정치적 평등으로 나아간다면, 독재든 민주국가든 일단 먹고 살게 해주는 것(‘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적절한 경제적 상황까지 도달하게 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갖게 되어버립니다. 이 경우, 적절한 경제적 상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사용한 과정에 대해서, 어떤 시점을 계기로 그 과정과 단절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면, 정치적 평등을 통해 경제적 평등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민주주의가 밥먹여준다’는 논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 평등과 연관된 맥락에서 찌마님의 다른 질문도 보실까요.
Q. 복지는 경제적 평등의 문제를 보완하는 사회적 장치라 생각합니다. 한국사회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보편적이냐 선별적이냐의 복지논쟁에 있어 기준이 되어야할 철학적 근거는 무엇일까요?
A. 보편적, 선별적 복지의 논쟁에서 실제 제도에 보편적 복지를 도입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가 보편적 복지를 선언하는 행위의 상징성입니다. 모든 제도가 보편적 복지를 도입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대신 국가는 국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적인 제도에 보편적 복지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이 행위는 단순히 일부 제도에 보편적 복지를 도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보편적 복지 정신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민주사회의 구성원들이 보편적 복지를 적용할 영역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서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간의 추구 순서, 보편적 복지 논쟁에서의 주안점 등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질문은 정치적 원리에 따른 경제적 재분배(즉, 복지)의 현실적인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Q. 우리나라의 재정상태에서, 북유럽국가와 같은 포괄적인 복지정책이 실현가능한가요?
A. 우리나라는 전세계적으로 세금이 낮게 징수되는 편입니다. 북유럽 국가들만큼 세금을 많이 걷으면 그에 상응하는 복지제도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다만, 세금을 내는 것이 아깝지 않도록 국민의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 결정과정과 지출내역을 투명하게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증세하는 과정에서 복지를 위해서 증세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복지제도를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일하지 않는 사람으로의 부의 이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사람은 해당 가구의 비경제활동 인구를 대표해서 세금을 내는 것이고, 임금을 받는 사람만 노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가사 노동 등). 어떤 활동을 ‘일하고 있다’고 볼 지도 사실 애매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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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수업의 보충설명 및 질의응답은 이와 같았고, 오늘의 키워드인 ‘합의’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볼까요.
“합의란 단순히 의견일치에 관한 게 아니다. 이는 우리 주변의 것을 변화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의 제안을 들고, 어떤 것을 이해하고,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여 여러분은 창조적인 종합을 이룬다. 그리고 그끝에 모든 사람들이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떠올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것, 하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 데이비드 그레버
그레버의 다음 발언은 합의의 의미를 잘 나타내어주고 있습니다. 합의는 어떤 사안에 대해 구성원들이 승낙한 상태이지만, 단순히 그 결과(의견일치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어떤 결과가 ‘합의된’ 결과라고 할 때, 이는 이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 토론의 상태를 거쳤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서 토론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지혜를 모으는 것이지요. 때문에 가장 ‘현명하게’ ‘민주적으로’ 의견이 결정된 상태를 합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합의는 중요한데, 왜냐하면 합의가 된 상태에서 구성원들의 불만이 최소화되며, 구성원들이 그 결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가 사회를 구성합니다.
한편, 합의에 이르기 위해 논쟁하는 과정을 토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토론은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 자신의 의견에 대한 비판까지도 합리적이라면 경청하는 것이 토론입니다. 토론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는 사안을 보다 완전하게 이해하고, 잘못된 생각과 관행을 바로잡아갑니다. 이러한 생각의 교환과정에서 보다 현명한 결론에 합의하게 되는 것이지요. 토론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당면하는 사안의 의미가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리하자면, 합의에 이르기 위해 논쟁하는 과정, 그리고 시간이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지속적으로 합의된 결과를 검증하는 과정이 토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견(다른 의견/소수 의견)에 귀기울이는 것은 토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토론의 목적이 지혜를 모으는 것이라면, 각각의 이견들이 지혜를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견은 기존 주장에 대한 반대주장으로써 기존 주장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고, 대상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견은 주류의 의견에 밀려 묵살당하기 쉽습니다. 선스타인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들에게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된 생각이나 행위패턴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옳지 않은 의견임을 알면서도 따라가는 쏠림 현상, 각 집단이 자기들이 가진 정보만을 신봉하는 집단 극단화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합의가 강요될 경우, 더 이상 합의는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합의가 아니며 맹목적인 폭력에 불과한 것으로 변질됩니다.
적절한 토론(이견에 경청하며 논쟁)과정을 통해서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그 합의는 소수 의견 또한 포함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때문에 입장의 다름을 존중하며 합리적인 개인이 합의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개인은 합의내용에 동의하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도덕적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 동의와 약속이 바로 법의 정신이며, 시민들이 동의한 근본 원리를 담은 것이 헌법입니다. 그리고 이 근본 원리의 핵심으로 다원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즉, 민주사회의 구성원들은 ‘누구나 합당하게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원리에 이미 합의한 상태로 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근본적/원리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의견과 의지의 차이를 짚으면서 강의 내용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로 본다면, 의견이 opinion 또는 suggestion인 반면 의지는 will로 표현합니다. 영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의견은 이성에 따른 제안인 반면 의지는 자신의 주관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의견인 반면 합리성 여부와 관계없이 존속되는 것을 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합의는 의견을 모으는 일이지, 의지를 결집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의견들이 합의 안에 온전히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합의로 가는 토론과정에서 결국 우리는 의견의 다양성, 각각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합의를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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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이후에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토론 주제는 ‘비관용도 관용할 수 있을까’였고, 일베 현상과 관련하여 논의하여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대화하는 것이 참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 사례에 적용해보니 비관용의 경계가 모호할 뿐더러,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가 갖는 파급효과 및 의미까지 여러 면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현실에서 이론을 적합하게 적용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습니다.
<저의 감상 및 질문할 거리>
1. 의사결정 과정에서 개인의 의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수업의 내용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의견의 조율과정인 토론을 통해서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지만 수업시간에 말씀하셨던 다른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어떤 사안에 대한 결정에는 의견 이상으로 의지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령, 어떤 정치인이 합리적으로 보았을 때 적절하지 못한 의견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에 대한 지지의 의지가 바뀌는 경우는 드뭅니다(특히 한국사회에서). 그 지지의 의지는 정말로 합리성을 충분히 압도하고 남을 정도로 굳건한 경우도 많구요. 그리고 때로는 그 의지가 단순한 심리적인 것(과거에 대한 향수 등)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기반한 굳건한 것인 경우도 많습니다. 이 경우에 민주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 개인들의 의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요? 민주사회에 대한 의지를 가진 시민의 입장에서 또는 국가(사회)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관련된 논의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