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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 1강
박노자 교수의 [국경을 넘어 혁명의 불을 지펴라 - 국내외 ‘세계혁명’의 전사들] 1강(7/21)
1강 - 세계 혁명의 돈키호테, 수질로프스키와 그의 오딧세이
-1강에서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러시아의 혁명적 지식인들의 활동에 대해 수질로프스키를 중심으로 강연.
[강의내용정리]
1. 혁명의 일반적 특징과 러시아의 상황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맞은 혁명.
혁명은 사회주의적 색채와 민족주의적 추동력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남민전(76.12~79.11까지 활동했던 지하운동조직)의 예를 들며 민족주의적, 국제주의적 특징이 혁명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설명. 혁명이란 것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더라도 국제적 맥락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입헌군주제 도입과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던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토지국유화, 토지균등배분, 농민공동체에 의한 사회주의를 혁명의 목표로 내세움.
188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수렴, 노동자 헤게모니 잡고 사회주의 혁명 당위성 설파하며 국제주의적 냄새가 강해짐. 1825년 군사혁명 패배 이후 자유주의 사상이 강해진 것은 프랑스혁명의 경험이 크게 작용.
2.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
-니콜라이 투르게네프
12월 혁명 비밀결사 요원으로 반란 시도 후 귀국을 포기하고 외국에 머무른 니콜라이 투르게네프는 재정러시아를 국제적으로 고발하는 등 여러 서구 국가에서 활발하게 활동.
러시아에 유럽 신사상이 도입되는데 힘썼으며 사회주의를 최초로 언급한 인물. 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자유주의자였는데 1830년대에 사회주의를 인정했다 함.
-알렉산드로 헤르첸
1848년 혁명 지켜본 초기 사회주의자. 전제왕권 산업발전까지 거부한 인물.
-미하일 바쿠닌
1840년대 헤겔주의 학파. 서구에 나가 활동, 1848년 혁명 직접 참여.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헤르첸과 달리 바쿠닌은 독일 체코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자유주의적이면서 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독일의 통일, 체코의 보존, 자치를 지지했으며 반슬라브주의자로 슬라브민족의 혁명 지원에 힘씀,
바쿠닌은 체코 혁명가들,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주장했던 폴란드 혁명가들과도 연대했는데 혁명가들의 국제성을 보여준 인물이었음.
이런 바쿠닌의 활동은 레닌의 민족주의론에 일정 정도 기여.
1860년대 이후에는 반슬라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변모.
바쿠닌은 중국에 대해서는 회의적, 일본에 대해선 관심을 가졌지만 슬라브, 로만계 혁명가들과만 교류한 철저히 서구적 시각을 가진 인물로 동아시아의 부상을 두려워해 동아시아를 타자화 했음.
러시아 초기 혁명가들은 폭넓은 국제연대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 대해선 부정적 인식이 강했다고 함.
-매치니코프
바쿠닌 추종자, 아나키스트. <일본제국>을 저술해 일본에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불러오게 함. 1870년대, 80년대 말 일본 자유민권운동에서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이 하나의 본보기였다고 함.
러시아인민주의자들은 피억압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했는데(보스니아, 세르비아, 터키, 오스트리아 등과 연대) 1870년대 해외 러시아 망명가들의 특징이라 함.
3. 동아시아와의 만남 : 니콜라이 수질로프스키(1850~1930)
지금의 벨라로시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학생운동 연루, 브나로드 운동을 펼치며 혁명 선전했지만 계속된 체포 위협으로 1875년 국외망명.
첫 망명지 런던은 당시 전 세계 혁명가들이 집결했던 곳으로 런던에서 마르크스 만나 혁명의 전선으로 가겠다 결심 루마니아로 이동, 루마니아 사회주의 보급 창시자. 루마니아에서 니콜라스 러셀(‘러셀’ 루마니아 어로 ‘러시아인’)이란 필명으로 활동.
불가리아 혁명가들과 친분, 불가리아 “4월 투쟁” 참여. 터키, 그리스 혁명 운동에도 참여.
이상적 사회주의, 농촌공동체 건립을 꾀하던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미국사회에 대해 긍정적이었는데 수질로프스키도 처음엔 미국에 우호적이었음.
샌프란시스코 이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현지 희랍 정교회 주교와 갈등을 일으켜 그를 고발, 러시아 이미지 실추시켰단 등등의 이유로 러시아 정교회로부터 파문. 교회, 종교는 지배이데올로기일 뿐이란 것이 그의 생각,
1892년 미국국적 받고 쉬겠다며 하와이로 이주. 하지만 인종주의에 비판적이었기에 하와이에서도 원주민 권리 옹호에 앞장서고 미국의료복지정책에 관한 책도 씀. 하와이 의회 상원의 초대 의장까지 지내지만 미 중앙 권력과 갈등으로 사임. 하와이에서 반미활동.
1905년 러일 전쟁 시 메이지일본을 러시아보다 좋게 평가. 재일본 러시아군 포로를 상대로 혁명 선전을 통해 혁명전쟁 벌일 계획 세웠다 포기.
당시 일본과 러시아 혁명가들 동상이몽 협력관계 유지했다 함.
다른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일본에서 러시아혁명 신문 <볼랴> 창간, 일본 사회주의 언론에 기고. 일본 아나키즘 창시자 쿠쓰미 켓손 등 일본 혁명가와의 연대는 손문과 같은 중국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침.
일본 초기 사회주의운동 처음에는 사민주의였다 러시아 영향으로 무정부주의로 빠져나감. 1910년 신해혁명 이전 직접 행동론, 농민혁명론, 농촌혁명론은 손문과 모택동에까지 영향.
신해혁명 태동기 인민사회주의자와 교류가 있었다는 것 중요.
이후 필리핀으로 이주, 필리핀 자치운동에 참가했다 중국 천진으로 다시 이주, 중국혁명운동 관여. 제1차 세계대전 시 반독일친프랑스적 입장, 이후 반전운동을 펼치다 볼셰비키혁명 터지자 러시아 혁명지지.
혁명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평생 실천하며 살았던 수질로프스키, 말년 귀국하려던 계획 실현되지 못하고 천진에서 사망.
4. 국제연대의 한계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국제연대 무너지고 민족국가 단위 혁명 활동으로 바뀜.
러시아의 경우 1920년 이후 보수화로 접어듦. 스탈린주의는 보수화 징후 하나일 뿐. 사회보수화로 국내개발이 세계혁명보다 중시되어 혁명운동은 철저히 민족 국가 위주로 변함.
7시부터 8시 25분까지 강의. 5분 휴식 후 질의응답 시간 가짐.
[몇몇 질문 정리]
질문1. 한국사회주의에 대한 수질로프스키의 생각은 어땠는지?
초기 메이지일본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수질로프스키는 조선은 완전히 발전이 힘든 사회라 보았으며 식민화가 불가피하다 생각함. 조선을 주체로 보지 않고 타자로 봄.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지는 못함.
질문2. 자본제휴의 시대에 연대 가능성은?
직업적 혁명가가 현 자본주의사회에선 존재하기 힘들다. 정당보다는 시민사회가 그 역할을 떠안아야 하며 연대 폭이 훨씬 넓을 것 같다. 강정마을, 오키나와 연대나 한국노조와 일본중핵파의 연대의 예.
질문3 이 강좌가 기획된 의도는?
혁명사를 기억해야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 동아시아 긴장 전 세계적 관심. 최근 망언 남발하고 있는 아베총리 일본정부에 대해 동아시아는 민중연대 밖에 없다. 국가 환상 떠나 밑으로부터 민중운동, 국가를 상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수질로프스키에게는 ‘국가’ 개념이 없었다.
[소소한 감상]
거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혁명가들에 대한 강의가 지금의 우리 현실에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사실 처음엔 의문이 많았음. 하지만 혁명사를 기억해야 위기에 대처할 수 있다는 질의응답 시간 답변으로 강의를 다시 이해하게 됨.
개인적으로 이국의 혁명가들도 낯설었지만 오랜만에 듣는 ‘혁명’이란 단어가 낯설고 아련하게 느껴져 기분이 묘했음.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복지가 우롱당하고 있는 요즘, 국가 개념의 탈피가 우리 사회엔 정말 필요하단 생각 많이 들었음.
어느 참가자 분 말씀처럼... 여러 국가를 넘다들며 곳곳에서 연대의 노력을 펼치고 있는 박노자 교수의 모습이 수질로프스키를 많이 닮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