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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현대사] 2강, 전통과 서구가 만나 만들어간 국민 국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2강(4/10), 전통과 서구가 만나 만들어간 국민 국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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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자활을 하면서 강의를 들었다.
요번에는 3국의 전통과 서구의 문화가 만나 국가와 국민의 모습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제일 먼저 청나라가 어땠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선생님께서 청이 제일 먼저 시작을 하여서 청의 이야기를 제일 첫번째로 하신다고 하셨다.
청나라는 태평천국운동(1851-1864)아래로 혁명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운동을 다른 말로 하면 내란이나 다를 것 없다고 하셨고, 이때 한족이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해 한족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홍수전이 기독교로 중국을 구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종교는 사이비종교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한다.
태평천국이 주장한 것은 사유재산 부정, 토지균분, 형제애와 평증주의 가조 청조는 타도의 대상, 서구와는 우호(양형제)이다.
양형제는 '서양은 형제'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라고 말씀하셨다.
태평천국이 주장한 것은 이후 동학농민운동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고 하셨다.
1864년 홍수전의 사망과 함께 없어졌고, 2천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조선과 일본의 외란보다 내란이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고 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양무운동이 시작되었다.
1861년에 총리각국사무아문이 설치되었다.
이곳은 외교담당기구이고, 양무사업을 추진하며 외교사절을 파견(1868)하기도 하였다.
양무파 관료들은 태평천국운동 진압에 성공한 한인관료층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군사기술을 도입하고 철도, 항만등 기반시설을 도입하기도 했다.
철도와 항만을 도입하는 것이 근대화의 포인트라고 한다.
또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이 철도를 놓는 것이 풍수지리에 맞지 않다며 불평을 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가 러시아와 일본의 계몽 전제 군주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랸치차오 등과 학회를 설립하고, 신문삽시 발행 등으로 여론 형성을 통해 운동이 확산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일본과 관계되어 있어 청나라 관료의 미움을 사기도 하였고, 민중이 거부감이 들어 지지를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무술정변은 (103일 천하)실패하게 되었다.
또 무술정변에서 캉유웨이는 입헌군주제를 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있었다.
바쿠후 반대파가 왕정복고 쿠데타로 신정부를 수립하였고, 천왕 중심의 근대 국가 수립과 적극적인 개국을 추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징병제와 지조개정, 의무교육제를 실행했다고 한다.
지조개정은 토지조사사업을 하고 세금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또 1871년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하여 많은 것을 배우게 했다고 한다.
헌법은 독일식으로 일상은 영국처럼 하였다고 한다.
결국 미국과는 친했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혼=천왕', '법=독일', '일상=영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주의라고 한다.
일본 메이지 유신과정에서 대규모 내란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는 공론문화를 형성하고 천황을 매개로한 일본이란 일체감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은 1876년 개항 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별기군을 창설했다고 한다.
통리기무아문은 외교기관이고, 별기군은 군사력을 높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갑신정변(1884)은 문구가 상당히 선진적이었다고 한다.
위로부터의 근대 개혁 운동, 근대 국가 수립이 주요 사상이었다고 한다.
또 동학농민운동(1894)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다고 한다.
아래로부터의 근대 개혁운동, 신분제를 폐지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갑오개혁(1894)에서는 왕실과 정부의 분리를 원했고 내각제 수립, 조세 제도 합리과, 신분제 폐지를 말했다고 한다.
내각제 수립은 갑신정변에서부터 있었던 말이라고 한다.
1898년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시민단체의 원조라고 볼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