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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3강, 정의: 공평한 세상을 향한 농민항쟁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3강(1/27), 정의: 공평한 세상을 향한 농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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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대였다. 한 세기 내내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계속되었고 변란(1811년 평안도농민전쟁), 민란(1862년 농민항쟁)을 거쳐 전쟁(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진화해 나갔다. 지금까지 농민항쟁을 다룬 연구들을 살펴보면 개별 봉기의 파편에만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며 연속성에 주목한 논문은 거의 없다고 한다. 농민항쟁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박한데, 이는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보는 오류를 범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날 강의에서는 농민항쟁의 근본적 원인과 변화 양상을 전체적으로 공부해보았다. 아울러 시민의식을 지니고 근대로 나아가던 민중들, 그들이 아무리 저항해도 바뀌지 않는 조선 정부를 나란히 보며 권력 안팎의 세계가 이토록 달랐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농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다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이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네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갔다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 정약용 <哀絶陽(애절양: 남근을 자른 일을 슬퍼함)> 中 -
농민의 저항 방식은 국가의 부역 의무에 응하나 고의로 일을 방해하는 일상적 투쟁과 족보를 사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개별투쟁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관`리들의 비리를 소문으로 퍼뜨리거나 산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폭로하기, 집회, 상소 등 온건한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 봉기였다.
농민항쟁의 원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신분해방 등 평등 의식의 고조와 부정의하고 불공정한 국가권력의 부정부패다. 이중 실질적으로 민중의 삶을 고달프게 했던 것은 후자였다. 세도정치는 몇몇 가문이 중앙 관직을 독점하는 기형적인 정치 형태였다. 실력이 있어도 이들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관직에 진출할 수가 없기에 좌절한 지식인들이 봉기에 가담하거나 지도자가 되는 일이 많았다. 삼정의 문란은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지방 수령들이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던 시대상과 직결되어 있다. 삼정이란 전정(토지세), 군정(군포), 환곡을 일컫는다. 위에 인용한 정약용의 시는 16세부터 60세까지의 남성들이 병역의무 대신 내던 세금 군정의 문란을 짐작케 하는 작품이다. 또한 삼정 중 가장 악질적이고 19세기를 뒤흔든 주범으로 지목받는 것이 환곡이다. 본래는 춘궁기에 곡식을 꾸어주고 가을 추수 후에 갚게 하던 구휼제도마저 탐관오리들의 이자놀이로 변질된 것이다.
일찍이 18세기에 정약용은 “만일의 상황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작당하여 변란을 일으키면 그 누가 막을 것인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도 정부는 변화하지 않았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오지영에 따르면 1894년에는 백성들이 이 나라는 망해야 한다며 날마다 망국가를 불렀다고 했다. 사회를 재구성할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백성들의 불만이 최초로 폭발한 지점은 1800년 안동 관아 습격 사건과 1801년 하동 괘서 사건이었다. 뒤이어 서북지방(함경도, 황해도, 평안도)에서 변란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역, 수공업, 광산 등으로 새로운 부민의 등장과 이들에 대한 수령의 수탈이 배경이었다. ‘홍경래의 난’으로 유명한 평안도 농민전쟁(1811)은 비록 패배했지만 4개월 넘게 정주성에서 저항하며 버텼다.
재조명이 필요한 임술농민항쟁
1862년, 단성민란과 진주민란을 도화선 삼아 전국 72개 군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합법적인 등소운동(等訴運動)을 통한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못하면 전면 봉기하여 관청을 공격하고 읍권을 장악한 후, 진압을 피해 자진 해산하는 전개방식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참가 계층은 몰락양반과 농촌 지식인, 그리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빈농이었다. 이때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도 함께 일어났는데, 불공정한 조세제도는 부민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정부는 강경대응으로 일관하였으며 권력자들이 민생을 위해 한 일은 거의 없다. 일례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겠다며 삼정이정청을 설치했으나 결국 없던 일로 만들고 말았다. “백성은 수령에 대해 부모를 받들 듯 해야 하거늘 구타하고 짓밟기를 이에 이르렀는가.”라는 철종의 발언에서 알 수 있는 권력자들의 가치관은 굉장히 전통적인 유교 사상이다. 백성은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데 권력은 여전히 봉건적 세계라는 자기들만의 성 안에 갇혀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임술농민항쟁에 대한 통설적 평가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계급적 연대를 바탕으로 지역을 초월하여 정치권력에 대해 투쟁하지 못하였고, 봉건적 토지제도나 신분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조건적 경제투쟁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가장 먼저 나온다. 상위 공권력에 호소하는 청원적인 모습과 국왕의 효유문에 스스로 엎드려 죄받기를 청하는 투항적인 모습 또한 나타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봉기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마침내 전국적 연대를 통한 정치적 투쟁으로 진보한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청원적이고 투항적으로 보이는 의사표현 방식은 민중들이 추구하던 이념의 근대성과 그들 사유의 전통성이 혼재해있던 결과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역사에서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지금의 잣대로 우리가 살지 않았던 시대를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 봉건 체제를 타파하려 했던 민중운동
개항 이후 1894년까지 농민항쟁 100여건 발생하였고, 1893년에는 한 해에만 무려 65건이나 일어나 “민란이 없는 고을이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백성들의 발언을 보면 지배층에 대한 저항, 서양의 의회제도와 민주주의 이해, 구조적 부패에 대한 비판 등 이들에게 이미 근대적 의식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보은, 금구 집회 이후 전라도 일대에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주도하여 지역적 연계를 시도하였다. 1차 봉기의 시발점인 고부민란은 조병갑의 학정에 들고 일어난 농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다. 봉기의 4대 강령, 특히 네 번째 강령인 “군대를 몰고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는 이전에 마을 단위로 일어났다 사그라들던 농민봉기에 비해 뚜렷한 목표와 혁명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집강소를 설치해 폐정개혁에 힘쓰던 동학농민군은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온 것을 계기로 재봉기하였다. 근본 목표는 더 철저한 폐정개혁이었지만 대의는 항일로써, 충청도 의병을 집결하여 봉기의 전국화를 가능케 했다. 흔히 동학농민운동에는 반제국반봉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지만 항일 의식의 실체는 폐정개혁을 방해하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에 가까웠다. 개화파와 대원군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근대성을 가졌지만, 그보다는 구체제를 파괴하고자 하는 열망이 더 강했다. 여흥 민씨 세도정치로 돌아가던 정부는 동학군 진압에 외세를 끌어들여 내정 간섭의 여지를 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동학농민전쟁 후에도 지배층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새로운 조세항목을 만들어가며 나라가 망할 때까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역사에서 가정을 한다는 건 부질없는 일이지만 권력자들이 조금이라도 개혁의지를 보이고 실천했다면 아래로부터의 변혁과 맞물려 조선 말기 역사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라는 미련을 버릴 수가 없다.
19세기 농민이 요구한 정의와 전통 속에서 찾은 근대화의 길
19세기 농민항쟁이 요구한 정의는 차별없는 공평과세였다. 봉기를 거듭하며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념들이 추가되지만 어떤 봉기의 원인에서도 조세 관련 사항은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공평과세를 실현할 수 있을지 정부에서 논의가 없었으며, 결국 일제가 나라를 빼앗고 나서야 그들의 손에 의해 근대적 조세 제도가 만들어졌다. 원래는 관민의 합의에 따라 우리 손으로 만들었어야 했을 제도이다. 농민항쟁의 또 다른 의의는 전통 속에서 근대화의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중국 태평천국운동은 비자본주의적인 중국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 다시말해 전통 속에서 근대 세계로의 가능성을 발견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을 조선으로, 태평천국운동을 동학농민운동으로 바꾸어도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농민항쟁을 실패한 계급투쟁으로 보는 것은 편향된 시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전근대와 단절시킨 주범은 사회를 재구성할 의지가 없던 봉건지배층과, 한창 무르익고 있던 시민의식을 짓밟은 제국주의 열강인 것이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