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 3강 한국의 저항가요, 독립군가에서 <헌법 제1조>까지
반란의소리 저항의노래 - 3강 한국의 저항가요, 독립군가에서 <헌법 제1조>까지
2004년의 늦은 봄, 교정 한 켠에 세워진, 선배열사의 기념비 앞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비록 최루탄 연기의 매퀘함은 사라졌어도 자못 젖은 목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 우리들을 젖어들게 했는지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2008년의 늦은 봄, 광화문 거리에 노래가 다시 울려퍼졌습니다. 촛불 사이를 스치는 노래 속에는 웃음이 함께 했습니다. 사람들은 높이 막아선 명박산성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나누었지요.
노래가 변한 것이었을까요? 시대가 변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변했던 것일까요?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2012 여름강좌 [반란의 소리, 저항의 노래] 그 마지막 이야기는 서양과 일본을 지나 드디어 이 곳, 우리들의 노래에 다다랐습니다.
한국 저항가요의 특성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첫 시간에 서양 그리고 러시아 저항가요의 경우, 그 가사를 통해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지 선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하셨었죠. 그렇지만 한국의 저항가요는 어떠한 주장을 담기보다는 감성적인 경향을 보입니다. 즉, 그 시대에 있었던 저항운동의 감성적 경향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 담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 저항가요의 특징은 생산과 보급의 과정을 기성의 전문가가 아닌 수용자 집단이 주도하였다는 점입니다. 전문 창작자가 만들어서 대중에게 불리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 대중이 부르기 때문에 만들어지거나 저항가요로 소환되는 것이지요. 노래의 주인이 창작자가 아닌 수용자이기 때문에 전승과정에서 작품이 변형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방직후 시기와 1988년 이후 시기는 상대적으로 전문가의 개입이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그 이전의 저항가요의 축적이 많았고, 민중의 조직된 힘이 강해 권력의 통제 영역 바깥의 활동이 활발해진 시기였다는 배경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막강한 민중가요 문화가 형성되고 향유된 시기는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였습니다. 여기에는 평소에도 대중가요보다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집단적인 자발성 욕구와 이러한 욕구를 시간적-공간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힘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강력한 민중가요 문화가 형성되는데 에는 결국 주구장창 생활을 함께 하며 함께 먹고 함께 노는 학생운동권과 노동운동권이 중심이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민중가요는 분단이후 해외사회주의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되면서 특유의 자생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식민지시대 저항가요, 기성노래의 가사 바꾸기
전통시대에는 이러한 저항가요가 있었을까요? 동학에서 불리워진 가사 등은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식민지 저항가요의 태반은 기성가요를 개사한 것이었습니다. 못갖춘마디를 특징으로 하는 서양 어법의 음악체계는 전통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기존의 서양 노래를 가사를 바꿔 부르는 형식으로 저항가요가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운동을 이끌면서 노래를 가르치고 부르며 이 문화를 향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이었습니다.
이 시기 저항가요의 가장 많은 원천은 일본의 노래, 특히 일본 군가를 개사하여 부른 노래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노래인 <봉기가>의 경우에는 일본 군가인 <아무르강에 흐르는 피>를 개사한 것입니다.
해방 직후 시기와 전쟁기
이 시기에는 매우 드물게도 전문 창작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시기였습니다. 여기에는 좌우의 인사가 함께 개입하였고 <독립행진곡>의 경우에는 <해방가>라는 제목으로 90년대까지 전승되기도 하였습니다.
해방직후 시기는 이전까지의 저항가요를 집대성한 마지막 시기였고, 저항가요조차도 분단을 통해 완전히 갈라지면서 이후세대로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4.19혁명을 전후한 시기
1950년대에는 관제 궐기대회를 제외한 데모가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민중가요의 문화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러한 이유로 4.19혁명 당시에도 <학도호국단가>, <애국가>, <삼일절노래>, <6.25노래>등의 노래가 불렸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세대가 사회주의 운동과 절연하고 1950년대의 반공 제도교육을 받은 새로운 세대임을 보여줍니다.
한일수교반대데모 이후 유신체제 초기까지
한일수교반대투쟁 등에서부터 지식인들의 反박정희 태도가 분명해지고 결집하는 한편, 학생운동이 가열되면서 새로운 노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부터는 행진을 위한 노래 이외에 구전가요 스타일의 노래 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현상은 점차 시위가 오랜 기간의 농성과 지속성을 수반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시기에는 <농민가>나 <정의가>와 같이 다소 구호적이고 계몽적인 경향의 행진곡 풍의 노래 등이 만들어졌습니다.
1970년대 후반, 민중가요 문화의 형성
이 시기에 이르면 적게 잡아 수십곡, 많게는 2-300여곡의 노래가 민중가요 문화로 축적되었고, 단순한 데모용 기능요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경향의 노래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1975년 긴급조치 9호 이후 총학생회가 사라지고 학내에서 집회가 불가능해지면서 학생운동이 양적으로 축소되었는데, 오히려 질적으로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슈 파이팅에 머물지 않는 이른바 ‘과학적 학생운동’이 시작되면서 운동권 학생들은 자신의 일상을 재조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국내 대중가요, 복음성가 등 다양한 노래들을 민중가요로 소환하고 재해석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서구 근대를 모델로 한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의 모델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시기는 복음성가를 비롯한 미국발 저항가요가 적극적으로 계승된 시대였습니다.
음악적으로 볼 때, 일제시대를 경유하며 형성된 행진곡의 전통보다 미국식 포크의 영향력이 강해진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김민기, 김영동, 서유석, 한대수 등 국내 대중음악인들의 노래를 저항가요의 영역으로 소환하게 되고, <아침이슬>, <친구>, <상록수> 등이 불려진 것이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제5공화국 시기, 포크의 쇠퇴와 비장한 단조의 노래들
1980년 봄은 민중가요 문화가 전 대학생 사회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고, 향후 10년동안 민중가요의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70년대까지의 노래만으로는 수용자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성의 노래를 소환하는 것을 넘어서서 수용자 스스로 창작하고 그 안에서 전문가들을 창출해냈습니다.
포크의 자유로운 분위기, 명랑한 미국적 질감 등이 퇴조되면서 대신 비장한 단조의 노래로 급격한 경향의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전의 행진곡들은 구호성과 계몽성을 벗고 서정성을 획득함으로써 인간의 고통과 절망, 이를 극복려는 의지를 비장한 정서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저항가요 중에서도 행진곡 이외에 ‘서정가요’로 지칭된 노래들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타는 목마름으로>, <민중의 아버지>, <부활하는 산하>,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 있습니다.
1980년을 계기로 노래운동의 지향을 확실히 한 대학 포크 서클 출신들이 1984년부터는 대학 바깥에서 전문적인 노래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즉, 비전문가 사이에서 전문가가 탄생하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이들이 상대적으로 음악적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노래운동 활동가들의 주도로 노동자 기타반 지도가 이루어지면서 노동자 창작품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마당극 운동의 흐름에서 파생된 민요연구회는 전통민요의 적극적 계승과 새로운 창작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저항가요를 만들어냈습니다.
6월 시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 문민정부 초기까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초중반의 노래 경향이 지속되면서 좀더 다양하고 일상적인 노래들이 생산됩니다. 운동이 대중화되면서 ⓵노동자 대중으로의 계층적 확산 과 함께 ⓶대중가요 공간에서의 합법적 활동이 성공하게 됩니다. 이로써 노래의 경향은 더욱 다양해지고 전문 노래운동 창작자들의 작품도 급증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 노동자가 수용하는 노동가요가 민중가요를 주도하면서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꽃다지 등이 활발히 활동하였고, 특히 김호철 씨는 <파업가>, <단결투쟁가>, <끝내 살리라>, <포장마차>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독특한 감수성을 노동가요 속에 잘 담아냈습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마을 등은 대중가요 공간에서 활동하면서 <사계>,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을 통해 가요순위와 악보피스 판매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집단의 목소리에서 개인의 목소리로
이 시기에는 점차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력이 하락하면서 생활의 대부분을 공유하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민중가요 문화의 쇠퇴로 이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민중가요는 시위장 기능요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개인의 목소리로 이어져가는 두 갈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결국 수용자들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길을 걸어 나가게 된 셈입니다.
2012년 오늘, 그리고 우리의 노래
다시 늘어난 ‘촛불’ 광화문 모여 ‘난장 공연’ http://news.nate.com/view/20080620n15669
MBC파업콘서트에 '나가수' 가수들도 동참 http://news.nate.com/view/20120625n12379
노찾사·꽃다지 잇따라 공연 http://news.nate.com/view/20120419n33000
트로트가수 현빈이 부른 <빠라빠빠>를 개사한
<한미FTA반대가> http://news.nate.com/view/20120419n33000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난장공연’을 벌이고, 비교적 성공한 대중가수들이 ‘파업콘서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무대에 오르며, 또 한켠에서는 기존의 노래운동 활동가들이 공연을 여는...
2012년을 사는 오늘 우리에게 저항가요란 어떤 의미일까요?
노래가 변하고 시대가 변하고 우리가 변해도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노래는 계속될 것입니다.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듯이, 노래란, 그런 것이니까요.
글 : 자원활동가 김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