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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3강 "전태일 분신과 광주대단지 사건: 사건을 통해 본 70년대"는 김원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3층 소회의실에서 강연을 진행하니 준비하고 정리하는 입장에서는 편했..어요 허허. 꾸준히 많은 분들이 나와주셨습니다. :)
그럼 평소처럼 후기는 '-하다'체로 작성하겠습니다.
사건, "숨겨진 자들이 이름을 드러내는 방법"
강연은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사건은 공적 사료를 토대로 '중심'에 초점을 두고 기록된 역사를 뜻한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사건은 비가시적이고 숨겨져 있던 주체가 드러나는 계기이며, 이들 주체가 자신들에게 기존에 부여된 정체성 및 의미에서 벗어나려는 흐름이다. 이러한 "잊혀진 주체"는 자기 기록을 남기지 않고 스러진다. 바로 사건을 통해 그들의 실존을 드러낼 수 있다. 이 강연에서는 70년대의 두 사건, 전태일 분신과 광주 대단지 사건을 통하여 어떤 주체가 자신의 실체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었는지가 이야기 되었다.
전태일: 겁쟁이들과 연대
기존 역사 담론에서 전태일의 분신사건은 "낮은 수준의 운동" 혹은 우연적인 것으로 그려지며, 이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도 막연하게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죽어간 전태일에 국한된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은 역사 서술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겁쟁이" 여공들을 가시화하였다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이란 다음과 같았다. 노동 조직(노조)이 존재하지 않았고, 근로자들은 대개 16~20(21)세의 어린 소녀들로 농촌에서 상경한 단신이었다. 이들은 주로 가부장적 농촌 환경에서 장남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근로하고 있었고, 사적 영역인 농촌 가정에서의 가부장적 질서는 평화시장이라는 공적 영역에서도 되풀이 된다. 이들은 쉽게 "아버지" 공장주에게 이의제기하지 못했으며, 어린 나이에, 아무 연고도 없고, 그들 사이 마땅한 조직을 갖고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공들이 근로기준법(권리)를 주장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전태일이 분신하기 전후 시기 대다수 여성 노동자들은 비가시적 "겁쟁이"였던 것이다.
여공들의 환경을 개선해보려 한 전태일은 67년 "시다들을 버릇없게 만든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되고 이후 <바보회>를 결성한다. 『평화시장 근로 조건 실태조사』(1970)를 작성한 그는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에 진정서를 보내나 묵살당하고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란 진정서를 보낼것을 계획한다. 이 진정서는 대통령을 "국부"라 칭하고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을 "소자"라 칭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화법을 사용하여 "지배담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평화시장 근로조건 실태조사> 설문지에는 분명 노동자에 대해 "지배담론"이 부여한 정체성을 벗어나려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예컨대 11번과 12번 문항이다. 11번 문항 "당신 교양을 위한 서적은?"과 취미를 묻고 있는 12번 문항은 분명 지배계층이 위치지은 노동자의 관념 및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노동하는 인간"(노동자)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자는 묵묵히 일해야 한다'는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적, 의도적 행동이다. 그의 연대란 "겁쟁이" 여공들이 지배계층으로부터 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 이 부분의 강의에서 제기된 요지라 할 수 있겠다. 강의 앞부분에서도 제기되었듯이 "겁쟁이" 여공들과 같은 비가시적 주체는 공식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들이 드러나는 것은 전태일 분신과 같은 사건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점차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던 여공들이 "'전태일이 알던 불쌍한 여공들'로만 그려지는 게" 안타까워 직접 쓴 기록을 남겨야 겠다 생각해 결국 올해 6월 12일 통과된 석사학위 논문으로 자신의 삶을 그려낸 '7번 시다' 신순애 씨의 경우이다. "평화시장 노동자에 대한 저술은 많지만 당사자가 직접 쓴 것은 처음"이라는 지도교수의 말1처럼 "비가시적 주체"들은 여지껏 드러나기 쉽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스스로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1971년 광주대단지: 봉기의 사건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은 1971년 8월 10일 오후에 3-4시간 광주대단지 지역에서 일어난 집단행동으로, 지금까지도 "난동"으로 인식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무조건적으로 비합리적이었던 폭동이 아니라 나름의 이유를 가진, 광주에서의 삶을 꿈꾸던 도시빈민이라는 산재해있던 주체들을 가시화해준 사건이다.
산업화 초기 서울시는 도시 빈민과 무허가 주택에 살고있던 사람들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서울 근교에 정착지 조성을 함으로써 이주정책을 시행한다. 대단지 사업이 발표된 후 많은 사람들이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는 것을 꿈꾸는 소위 '대단지 붐'이 일었고, 이들은 대규모 이주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인구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어떻게 해서든 뜯어먹고 산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으로 진행된 광주대단지 조성은 전문가의 자문수렴도 거의 고려되지 않았고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주민들은 토지를 받았을 뿐이지 다른 물자는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여 이들의 생존대책이 부재한 상태에서 대단지 입주에 따른 문제는 잇따라 발생하였다. 토지는 있으나 집을 만들 능력은 없었던 이들은 입주권을 매각하고 새로 무허가 건물을 지어 살았고, 대단지에 지어진 공장은 균형있는 고용상태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리대가 성행하였고, 기아 문제도 대두되었다.
이렇게 문제가 생겨 나오는 한편 71년 총선시기에 차지철과 같은 국회의원 후보자와 서울 시장에 임명된 양택식은 대단지에 "낙원이 올 것이란 환상"을 부풀리는 데 일조하였으나 선거가 끝남에 따라 이러한 환상을 배반하는 조치들이 잇따랐다. 대단지 일대의 땅에 대해 전매금지조치가 내려져 토지 매각을 금지하고 전매 소유지에 집을 짓지 않으면 철거당할 위기에 놓여있었고, 이에 따라 대단지 주민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유지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진정서 제출을 계획한다. 그러나 서울시는 분양가격을 8천원에서 만2천원으로 올려받겠다고 하여 주민들을 격분시킨다. 이에 주민들은 진정서를 보냈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경기도는 취득세 납부 통지를 통해 취득세를 징수한다. 이후 대책위와 주민들은 좀 더 강경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궐기대화를 개최한다.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8월 10일 궐기대회에 3만에서 6만에 이르는 주민이 모였으며, 이들은 8월 9일 서울시 부시장과 합의한대로 시장이 와서 협상할 것을 기다리나 서울 시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따라 표출된 주민들의 분노가 바로 8월 10일의 소요사태이다.
비록 신문에서는 이들을 비이성적 폭도로 규정하였으나 광주대단지 사건은 사실상 정부 및 정치권의 비합리적인 광주대단지 조성에 의해 쌓여온 주민의 분노가 터져나온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진정서와 협상의 단계를 거치고 난 후에도 제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이들은 "협상보다 뭔가 확실한 행동과 분노를 보여주는 것 이외에 의사 표현의 방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의 "의사표시"는 위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엄벌"에 처해지게 된다. 이 또한 민중 봉기에 대한 부정적, 혹은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시각을 보여주는 선례이다.
사건, 탈정체화의 장소
앞에서 봤던 것처럼 전태일 분신사건과 광주 대단지 사건은 비가시적 존재들, "몫이 없는 자들", 주변의 존재들이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장소였다. 이 장소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라 부여된 정체성에서 벗어남으로써 정치적 주체가 된다. 기존 정치에 관한 생각들, 예컨대 정당, 노동조합 등을 통한 조직화는 기존의 프레임에 따른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을 기존 질서에 편입시키는 것일 수 있으며, "다른 정치의 장소의 가능성"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번 강의는 의문이 가는 점이 많았다. 질문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그 중 인상깊었던 것이 "그렇다면 그 탈정체화된 존재들의 새로운 언어는 무엇인가"였다.
1 「나의 삶을 말한다 "내 이름은 '7번 시다'였어요"」,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6152148185&code=940702>.
자원활동가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