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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
7월 3일 <인문정치와 현대사, 그리고 주체> 2강은 "8.15 그 커다란 환호성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제목으로 이승원 선생님(성공회대학교)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비가와서 안 오시는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리를 꽉 채워주셔서 훈훈했습니다.
*저번 후기와 마찬가지로 이하 편의상 '-하다'체를 쓰겠습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D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기간: "한국 현대 정치의 근원이자 본질이자 축소판"
1945년이라면 반세기도 넘게 지난 상당히 과거의 일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나를 포함한 지금의 20대의 조부모 세대가 몸소 체험한 시기이다. 여기서 이 시기를 몸소 체험한 선세대와 그러한 경험을 결여한 후세대 사이 상호 이해와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전히 현재의 기억 속에 존재하며,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현재이다. 아울러 좌/우, 진보/보수 이념이 갈라지는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시기이다. 이 때의 좌/우 프레임은 해방된 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지금 진보/보수 적대의 프레임의 원형을 이룬다. 이러한 적대적 대립은 세대 간 대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공동체 형성을 방해한다.
해방전야-조선 총독부의 불안감과 여운형
해방 전날인 1945년 8월 14일 조선 총독부는 본토로부터 히로히토의 대 연합군 항복 선언문을 전달받았다. 한반도가 이남과 이북으로 나뉠 것이고, 남쪽은 미군정, 북쪽은 소군정에 의해 지배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총독부가 있는 강북지역은 소련에 의해 점령당할 것이라 예측하였다. (당시 경계는 한강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측은 자신들이 본토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도와줄 조선의 정치 지도자를 찾기 시작한다. 총독부는 여운형을 선택한다. 사회주의자였고 청년층의 지지를 얻었던 카톨릭교도 여운형은 급진적이라기보다는 화합적 성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은 총독부에 5개 사항을 제시하는데 다음과 같다.
1. 모든 정치범의 즉각적 석방 ->식민지법은 더 이상 효과가 없으며 사법권은 이제 조선이 갖겠다는 의지
2. 서울 시민의 식량 확보 -> 이제 우리(조선건국위원회-이하 건준)가 정치적 권위(식량주권)을 총독부로부터 장악하겠다는 뜻
3. 조선 내 자주적 치안 보장
4. 학생과 청년들의 훈련과 조직화에 대한 총독부 개입 불가
5. 노동자와 농민 훈련에 대한 총독부의 개입 불가
위의 5개 조항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사실상 건준은 대항국가로서의 성질을 가지며 사실상 건국에 대한 구상이 있었다 할 수 있다.
조선건국위원회의 활동과 특징, 그리고 딜레마
건준은 조선 건국을 준비하며 상당히 실질적이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먼저 질서유지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 사적 보복과 테러행위 방지, 일제 하 건설된 유효한 공공시설과 사회간접시설, 일본인이 소유하는 재산을 관리 분배하였다. 일제 공포정치의 상징격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을 대대적으로 출감시킨다. 서대문 형무소는 당시 해방을 실감할 수 있는 장소였다. 아울러 전국적으로 지방단위의 지역 건준 그리고 인민위원회와 같은 자치조직이 상당수(총 2244 개에 이름) 건설되었는데 이들은 소작제 폐지, 여성문제, 노사문제에 관하여 논의와 같은 상당히 민주적 지역 자치활동이었다. 이 때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와 같은 노동자 조직도 결성되었다.
건준의 "대항국가(counter-state)"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대항국가란 "외세로부터의 독립이후 기존 식민통치 기구를 접수하여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아직은 미발달된 수준의 국가" (Smith)라 할 수 있는데, 종전 이후 민족자결주의를 보였던 건준이 이에 해당한다. 건준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강조하는데 양자는 어느정도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먼저, 건준은 "조선의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의 건설"을 제 1강령으로 함으로써 철저하게 조선의,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국가를 수립하려 하는 민족주의적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지나칠 경우 왕조 국가로의 회귀, 파시즘이 나타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우려를 견제하는 것이 또 다른 주요 원칙인 민주주의다. 건준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참여의 균등성과 개방성을 강조하는 한편 친일부역자는 배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실질적 민주주의를 꾀하여 조선왕조, 과두제 부활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국 인대표자대회를 조직하여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하나 이는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주의 논의는 미소공동회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편 건준은 총독부에 의해 승인된 권력이라는 점에서 딜레마를 내포하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주요 원칙으로 내세우는 한편 친일 부역자는 배제하는 적대적 민족주의 모습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총독부가 본토로 무사 귀환 할 수 있게끔 선택한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기관이라는 점에서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방 이후 최대 관심사였으며 인민들이 원했던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의 국유화와 같은 실질적인 사안은 상대적으로 간과되었다.
건준은 근대 국가로 발전하기에는 한계를 보였다. 그럼에도 9월 8일 미군의 상륙까지 건준의 해방 후 건국 준비는 굉장히 폭발적이고 역동적이었다. 당시에, 특히 여운형은 미군정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으나 1945년 9월 6일 박헌영 중심의 좌익 계열은 미군에 대항할 수 있는 외교주체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미군정의 시작
미 24군단은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도착한다. 이들은 <작전 명령 4호>를 통해 일본군의 무장해제, 군정실시, 외부 정치 세력의 축출, 한반도 이남의 법질서 유지와 같은 4개의 임무를 전달한다. 문제는 이들 미군들과 조선인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영어 능숙자가 매우 적었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나마의 정보는 "부르주아" 지식인, 친일자들과 같이 건준과는 다른 성격의 집단에게서 얻었다. 이들에게 들은 첫번째 정보는 건준은 친소세력이라는 것이었고, 소련의 남하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미국은 건준을 "적"으로 간주해버렸다. 아울러 조선은 패전국의 식민지였다. 태평양 전쟁 참전 이유로 미국은 조선을 일본과 동일집단-패전국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작전명 베이커>를 통해 3개 육군 사단을 전국적으로 한반더 이남에 투입하여 모든 지역정치조직들을 감시하였다.
미군정은 소련의 남하를 최소화하고 미국의 경계(American Boundary)를 최대한 한반도로 전진배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국내 좌익 성향의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 등 조선인의 자치조직과 대립하였다. 미군은 여운형을 만나 조선인민공화국의 공화국 사용을 중단하고 '정당'으로 명칭을 바꿀 것을 요구하여 이후 미군정과 인민공화국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다. 한편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세력의 정치세력화가 진행되었다.
건준의 와해와 반탁운동, 분열
건준은 식량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을 해 나아갔기 때문에 해방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45년 10월 5일 미군이 일반고시 제 1호를 통해 <미곡의 자유시장건>을 공포함에 따라 건준의 분배역할은 약화된다. 이후 미군은 일반고시 2호를 공포하는데 이는 1호와 더불어 물가의 상승을 유발하여 대략 1년 사이에 쌀 가격이 15배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혼란을 더한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였다. 45년 12월 16일 미.소.영 외무장관이 모여 조선의 독립을 포함한 전후 질서 논의가 오간 이 회의에서 소련은 1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위한 임시 조선정부 수립 2 미국이 요구한 신탁통치 문제 협의 3 조선에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안하고 미국은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명시하지 않고 5년 간의 미.소.영.중에 의한 조선의 신탁통치를 제안하였다가 거부당한다. 여기서 미국이 제기한 조선의 신탁통치는 과도정부나 자치라기보다는 네 나라끼리 합의를 통한 통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동아일보가 "조선, 신탁통치 결정 소련이 신탁통치 주장...미국은 즉각 독립주장"이라 오보함으로써 혼란은 가중되고 반탁운동이 전개되어 반공세력이 정치적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특히 북에서 내려온 청년들인 김구, 이승만은 반공민족주의를 표방하며 반공주의 세력을 정치세력화한다. 여기서 반공-민족-민주가 결합하는 "가장 획기적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좌익과 우익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어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된다. 이 가운데 이승만이 6월 3일 정읍에서 자신들은 자주독립국가를 원하는데 친소세력(좌익)들이 통일국가를 원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한의 독자적인 정부수립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좌익세력은 미군정에 대한 저항을 전면화하였고 미군정은 좌익계열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였다. 식량 부족, 물가 폭등과 더불어 이러한 혼란과 공포, 생존에 대한 열망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경험으로 사무쳐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반공주의가 지금까지 이어진다.
나가며
8.15와 이후 3년 간의 기억이 여전히 "현재의 기억"이며, 이는 선생님의 부모세대 (나에게는 조부모 세대)의 실제 현실, 살아있는 기억이라는 점과 선세대와 후세대 간의 의견, 이념 대립 및 소통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강의 처음에 언급되었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의 주요 지점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강의 초반에 제기된 세대 간의 대립은 정말 피부로 느끼곤 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진보쪽에서 유명하신 선생님께서 오셔서 강연을 하신 적이 있는데 질의응답시간에 한 유명한 보수단체로 추정되는 분께서 "그래서 당신이 말하는 주체는 [북한의] 주체 철학에서 말하는 그 주체랑 똑같은 것이냐"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어 뜬금없다고 주변 친구들이랑 생각했던 적이 있다. (강연 내용은 북한이라는 단어와 하등 관련 없는, 영국의 한 문학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었다.) 이 이외에도 이런 저런 사연은 조금 있다.
여지껏 이분들에 대해 "그래, 몸소 체험하며 살아오셨으니 어쩔 수 없지 뭐. 저분들은 바뀌지도 않으실거야"라는 체념어린 생각을 막연하게 해 왔다. 그러나 강의를 들으면서 해방 후 혼란과, "그 커다란 환호성"을 감출 수밖에 없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강의 텍스트에서 "공포"와 "생존"이라는 단어가 인상깊었다. 처음에는 지나친 단어라 생각했는데 당시 상황을 실재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잘 설명해주는 단어란 생각이 들었다. 공포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당시 상황은 극도의 혼란, 그리고 공포였을 것이다. 당시의 좌우 대립은 생존을 좌우하는 것이었을테고 이러한 공포는 몸에 정말 사무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분들을 '인간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그 공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겠지만) 하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행하는 이해의 노력과 더불어 그분들의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이다. 그 소통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자원활동가 김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