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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1강 - 흥선대원군이 꿈꾼 나라 (4/5)
“여러분들은 왜 역사를 공부하나요?”
한 질문과 함께 교과서 저자와 함께 하는 근현대사 산책 첫 수업은 시작 되었다. 참여연대 느티나무 홀을 가득 메운 수강생들의 눈은 빛났다.근현대사 수업은 이번 학기 최대 수강생을 자랑하는 강좌이다.
첫 강좌를 여는 주진오 교수의 말은 이어졌다.
“물론 옛 것에 대한 호기심, 알고 싶은 욕구 때문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역사는 지금 현실을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며 어떤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떠한 선택을 했고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볼 수 있죠. 그것들로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를 낳겠구나. 유추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결코 내가 파묻고 싶다고 파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해 평가는 결국 내려집니다. 누구나 과거의 행동에 대해 변명은 할 수 있겠지만 후대에게도 떳떳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사진 : 주진오교수]
흥선 대원군이 꿈꾼 나라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참여연대 근현대사 첫 번째 강좌는 주진오 교수의 열띤 설명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흥선 대원군 하면 쇄국정책이라는 말이 바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역사에 쇄국정책이라는 말은 없고 쇄국정책은 일본에서 쓰이던 표현이라 한다.
대원군은 임금이 대를 이을 자손이 없어, 왕위를 이은 임금의 친아버지에게 주던 벼슬로 우리나라에서 살아서 대원군으로 추대된 사람은 없기 때문에 흥선 대원군을 대원군으로 통칭해도 무방하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된 배경도 그의 권력 실각과 연관되어 해석이 가능하다. 대원군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실질적 수렴청정권이 있었던 조대비가 권력을 이임했기 때문인 것이었다. 대원군은 공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의 정책은 우리나라의 문호개방을 늦춰 우리나라 근대화에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견들을 우리는 쉽게 접한다. 그런데 그 당시 외세는 평화적으로 문호 개방을 요청한 것일까? 대원군의 정책도 당시 시대 정황과 함께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18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으로부터 문호를 개방하라는 통상압력에 시달렸고 이양선도 빈번히 출몰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 호는 평양에 주둔한다. 통상·교역은 조선의 국법에 금지되어 있으며, 외국선의 입항은 국법에 어긋난 영토 침략·주권 침해 행위라고 지적한 조선관리의 만류를 거부하고 난폭한 행위를 자행, 평양 군민과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셔먼호의 대포에 맞아 조선 군민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우고, 선원은 몰살하였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서양에게 문호를 개방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인에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양 열강의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실시하였던 흥선 대원군의 전략은 왕실의 권위 회복을 꿈꾸고 혼란스러웠던 구질서를 안정화 시키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실제 권력을 잡자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이 된 대전회통을 편찬하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것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대원군의 서양인에 대한 박해에는 그럴만한 계기가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에 의해 강화도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들이 불에 타 없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현군의 묘를 오페르트라는 유대상인이 도굴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무력으로 들어오는 서양 문물에 맞서 전통을 지키려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 대원군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원군의 권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거기에는 당시 대원군이 시행했던 호포제 개혁에 따른 여파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호포제는 포(옷감)를 가구(호) 단위로 걷게 하는 세금 제도로, 당시 전세 · 군포 · 환곡 즉 삼정의 문란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었던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종래의 군포는 일반 양인 남성에게만 부과되고 양반에게는 부과되지 않았는데 대원군은 이를 개선해 양반층을 포함한 모든 가구마다 호포를 동등하게 부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인해 양반층은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게 되고 이는 대원군이 권력을 잃고 실각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개혁이란 추진할 수 없는 역량으로 했을 때는 도리어 뒤집어 지고 마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대원군은 1874년 권력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1898년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는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아들이었던 고종과의 불화도 하나의 이유였다. 조선 말기 정치사의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교과서 저자와 함께 하는 참여 연대의 근현대사 첫 강의는 흥선대원군이 꿈꾸었던 시대에서 현재 지어진 박정희 기념관 까지 아우르면서 역사적 평가에 대한 다각적 해석을 권했다. 모든 사람이 한 역사적 사실을 똑같이 평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게 설령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는지를 인식하기 바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흥선 대원군, 박정희 그리고 많은 역사속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나라와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자양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교과서와 함께 하는 근현대사 첫 강의는 이렇게 시작 테이프를 끊었다. ^^
후기 : 최혜진(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