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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 미국 정부 '막가파식' 전쟁몰이의 부메랑" [9.11강좌 3강]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와 프레시안은 9.11 10년을 맞아 9월 5일부터 매주 월요일 5회에 걸쳐 '9.11 이후 10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를 주제로 연속 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6일 열린 세 번째 강좌에서는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님이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해 주셨습니다. 아래는 프레시안 곽재훈 기자가 정리한 이태호 처장의 3강 강의소개 기사입니다. ☞강연 상세 안내 보기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26일 '새로운 수퍼파워 : 초국적 시민운동과 민주화 도미노'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참여연대 |
"9.11 이후 미국의 대처, 국제·국내법에 모두 위배"
9.11 이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일성은 '이것은 전쟁행위'라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테러는 경찰 소관인 치안 문제였다. 그러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나 딕 체니 부통령 등 공화당 군사전략통들은 '미국을 지키는데 국제법이 방해가 돼서는 곤란하다'며 기존의 규범에 대한 예외주의를 정당화했다. 이 때문에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 문제가 생겨났다.
첫째, 국제법과의 충돌이다. 쌍둥이 빌딩에 대한 공격을 수행한 자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이 아니었고 국가의 공인된 명령체계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는 정규전 세력도 아니었다. 따라서 비(非)국가 세력에 전쟁 선포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국가 세력과의 '전쟁'은 전쟁의 기본 사항을 정한 유엔 헌장과도 배치되고 제네바협정에도 맞지 않는다.
일단 부시가 전쟁을 선포하긴 했는데 상대방을 과연 뭐라고 규정할 것이냐도 문제였다. 군인? 미국은 그렇게 하긴 싫었다. 상대방이 군인이라면 제네바협정에 따라 생포했을 때 전쟁포로로 인정하고 제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테러범? 그렇게 하기도 싫었다.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국제경찰(인터폴)이 수사해야 하고 국제형사재판소(ICC)를 통해 처벌해야 한다. 그래서 고안해 낸 것이 '적 전투원'(enemy combatant)이라는 개념이다.
둘째, 국내적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에 배치된다는 문제다. '적 전투원'으로 규정한 자들을 잡아서 미국으로 데려오면 미국 헌법에 의해 미국 법을 적용해 재판받아야 하고 변호사 선임권, 묵비권 인정, 고문받지 않을 권리, 3심제 적용 등 권리를 보장받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 국외에 지어진 것이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다. 법률상으로 고문을 허용하는 다른 나라에 비밀 감옥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 감옥의 존재와 수 등은 공식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랍권과 동유럽 등지에 여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송도 '특별이송'이라고 매우 비밀스럽게 했다. 미국 인권단체가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사라진 수감자들'이라는 리스트가 있는데 이들이 비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일명 '강화된 심문기법'으로 이름붙여진 사실상의 고문 방안을 도입했다. 잠을 안 재우거나 종교적·인간적·성적 수치심을 주는 등 '스트레스를 주는 취조 방법'을 사용했고 물고문도 허용됐다. 또 아프간을 침공해 테러 용의자를 잡아들일 때 '저 사람이 탈레반이다'라는 증언만으로도 증거 효력을 인정해 체포할 수 있게 했다. 피의자는 증거의 효력을 다툴 권리도 박탈당했고 심문 기한도 '무기한'으로 정해졌다. 미국 헌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 시민의 권리도 제약받았다. 먼저 '애국자법'은 영장주의의 예외를 인정해 이주민을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했고 비밀리에 가택수색을 할 수 있게 했다. 애국자법은 또 연방수사국(FBI)이 통신업체나 도서관 사서들에게서 영장 없이도 통신기록, 도서 열람기록 등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다 음은 군사력 사용권한의 문제다. 미국 법에 따르면 전쟁 선포는 대통령이 아닌 의회의 권한이다. 의회의 전쟁 선포는 그 요건도 매우 까다롭다. 하지만 부시는 뭔가를 해야 했다. 그러니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비상시 군사력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개념을 빌려 전쟁을 치렀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런 방식이었다.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추인해줬고 이로써 전쟁을 시작하는 방식이 의회의 선전포고에서 대통령의 군사력 사용을 의회가 승인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라크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 등 일부는 반대했지만 의회는 부시의 군사력 사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부시는 의회가 내건 조건도 지키지 않았지만 말이다.
시민운동은 어떻게 싸웠나
미국 내 반전운동은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2003년 이라크전 반대 운동은 거세게 일어났다. 이후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아부그레이브 수용소의 인권 실태가 <CBS> 방송에 의해 폭로된 것이나,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와 '매닝 메모'의 공개는 반전 운동에 동력을 공급했다.
2005년 공개된 이른바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는 영국 고위관리들이 2002년 7월 부시를 만난 후 작성한 것이다. 부시를 만난 영국 관리들은 "군사행동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부시는 군사행동을 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길 원하고 테러 연계와 대량살상무기(WMD)를 근거로 내걸고 싶어했다. 정보와 사실관계는 정책에 꿰맞춰지고 있었다"고 적었다.
2006년 <뉴욕타임스>에 공개된 '매닝 메모'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의 외교보좌관 데이비드 매닝이 작성한 것으로 부시와 블레어의 대화를 담고 있다. 부시는 침공을 앞두고 이라크의 적대행위를 촉발할 몇 가지 방안을 블레어 총리에게 제시했는데, 유엔의 비행기처럼 위장 페인트칠을 한 미국 정찰기를 이용해 공격을 유도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라크에서 WMD가 발견되지 않자 미국은 후세인이 충분히 국제적인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이는 '이해할 만한 실수'라고 설명했지만 이같은 메모들은 이라크전이 결코 '실수'가 아님을 보여줬다.
또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반전 운동의 계기가 됐다. 허리케인 때문에 9.11 당시 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문제는 이것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재해였는데 주방위군이나 구급대원들이 이라크로 차출돼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는 것이다.
테 러와의 전쟁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친 미국 단체는 여러 부류로 나뉜다. 첫째, 전국적인 반전운동 단체다. '앤서'(Act Now to Stop War and End Racism : ANSWER)나 '낫인아워네임'(Not In Our Name)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다. '낫인아워네임'은 일종의 연대체였는데 '평화로운 내일을 위한 9.11 희생자 가족 모임'도 포함하고 있었다. 9.11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우리 이름을 앞세워 전쟁하지 말라'고 한 것은 미국에 큰 충격과 감동을 줬다.
둘째, 군인 및 피해자 가족들의 단체다. 일종의 당사자 운동인데,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반전 운동에서 예비역 단체의 역할이 크다. 이라크나 아프간에 파견됐다가 전사해 훈장까지 받은 병사의 유가족도 반전 운동에 나섰다. 셋째, 시민권 단체다. 이들은 주로 변론이나 소송 등을 통해 활동했다.
넷째, 국제적 반전운동 단체다. 특히 2003년 2월 15일의 국제 반전 공동행동은 전세계 800개 도시에서 36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같은해 5월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세계반전모임에서는 26개국 60여 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자카르타 평화 합의'를 열었고 2004년에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부시 등 전범들에 대한 '국제민중재판'을 열기도 했다.
이같은 국제적인 반전 운동은 세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반전 운동을 통해 급격히 성장한 것이 세계사회포럼(WSF)이다. 2005년 브라질 WSF를 제안한 브라질의 노동자당(PT)는 나중에 급격히 성장해 룰라 대통령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상황은 사뭇 달랐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슬람권에서는 극단주의가 성장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전쟁 전에는 이라크의 알카에다 세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전후 오히려 급성장했다. 이란의 경우도 테러와의 전쟁 전 개혁파가 다수였고 심지어 의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었다. 하지만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고 부시가 이란을 (이라크,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하자 개혁파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미국에 맞서야 한다는 강경파의 입지가 넓어졌다.
법률적 대응
법률적인 방법에 의지한 미국 내의 반전 운동 사례들 중 주목할 만한 것 몇 가지만 살펴보겠다. 첫째, 헌법권리센터(CCR)가 시작한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의 권리 찾기 운동이다. 일련의 소송이 2002년부터 2008년까지 6년 간 계속됐는데, 2004년 6월 미국 대법원이 관타나모 수감자라 해도 영장에 의하지 않은 구속은 불법이며 구속영장 발행을 요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하면서 싱겁게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이 국방부에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재심 위원회를 만들고 의회에서 '수감자처우법'을 통과시키면서, 관타나모 수감자는 자신의 구속을 국방부 소속 위원회에 다시 심사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학대로부터 법률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됐지만 영장이 무제한 청구와 무기한 구금 또한 법으로 보장됐다. '법률에 의하지 않고 구속하면 안 된다고? 그럼 법을 만들지 뭐' 하는 식이었던 거다.
CCR 은 또 국방부의 특수군사위원회가 '적 전투원'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권을 갖는 것이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아 위법하며 제네바협정에도 위반된다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은 2006년 9월 이들의 주장을 인정했다. 그러자 의회는 또다시 '군사위원회법'을 만들어 이를 합법화했다. CCR은 이에 다시 군사위원회법의 위헌 여부를 다투는 소송을 냈고 미 대법원은 2008년 6월 위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유사한 많은 사건들이 현재 각급 법원에 계류돼 있다.
둘째, 역시 CCR이 이끈 것으로 부시 행정부 고위관료들을 '전쟁범죄자'로 처벌하기 위한 소송이었다. CCR은 럼즈펠드를 고문 등 수감자 학대 혐의로 고발했지만 미국 국내에서는 모두 기각됐다. 전범은 국적에 관계없이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여러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3월 스페인 판사 한 명이 관심을 가지고 럼즈펠드를 조사할 용의를 밝혔지만 스페인 법무부의 만류로 좌절됐다.
셋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이 제기한 불법 사찰 및 도청에 대한 소송이다. ACLU는 2006년 12월 <뉴욕타임스>에 폭로된 미 국가안보국(NSA)의 도청사건에 문제를 제기했다. NSA가 영장 없이 미국 시민들의 전화를 도청한 이 사건에 대해 디트로이트 지방법원은 ACLU 측의 승소를 선언했으나 항소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또 2007년 미 의회가 기존의 '외국정보사찰법'을 개정해 '미국보호법'을 만들고 해외와 통화하는 미국 시민의 전화에 대해서도 영장 없는 감청을 가능케 하자 ACLU는 이 법률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넷째, 역시 ACLU가 제기한 '국가기밀특권'에 대한 도전이다. 2003년 7월 ACLU는 다른 인권단체들과 공동으로 테러혐의 수감자들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접수했으나 미국 정부는 거부했다. 그러자 ACLU는 2004년 6월 관련 자료의 공개를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고 같은해 9월 승소했다. 그러나 공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또 ACLU는 이른바 '특별이송'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CIA의 항공기 운항을 대신해 주는 일종의 용역업체 '제퍼슨 데이터플랜' 사(社)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현재 진행중인 이 소송에서 ACLU는 해당 회사가 '특별이송'의 비인도적 실체를 알고도 영리를 위해 이를 돕는 조달 서비스를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적 대응
▲ 이태호 참여연대 사무처장 ⓒ참여연대 |
대의민주주의적 수단에 호소한 사례도 있다. 첫째, 대통령 탄핵 운동이었다. '다우닝 스트리트 메모'가 공개된 이후 2005년 결성된 '애프터 다우닝 스트리트'는 2007년과 2008년 각각 체니 부통령과 부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기 위해 1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민주당 데니스 쿠치니치 의원이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둘째, 예산을 무기로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이었다. 1400개 반전단체의 연대체 '평화와 정의를 위한 연합체'(UFPJ)가 여론을 이끌었고 결국 이 문제를 의회로 가져왔다. 그러나 2005년 국방 예산을 빌미로 부시 행정부로부터 '철군 일정표'를 받아내려는 시도는 압도적 표차로 부결됐다.
2006년 중간선 거 후 다수당이 된 민주당은 이라크 철군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방예산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이라크에서 철군을 시작하라고 부시 행정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철군을 시작할 것을 의무화한 '이라크책임법'은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부딪혔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미국의 '자업자득'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식 이후 발표한 최초의 4개 대통령령에서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안에 폐기하고 고문을 중단하며 CIA의 '비밀 감옥'을 포함한 구금정책 수단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의회의 반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또 오바마는 고문 관련 자료를 공개하겠다던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도 말을 바꿨고 고문에 연루된 CIA 조사관들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이라크, 아프간 철군도 어떻게 될지 불확실한 상태다. 아프간에서는 탈레반과의 평화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협상을 주도해온 부르하누딘 라바니 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앞날을 알 수 없게 됐다. 또 오바마는 파키스탄 남부 파슈툰족 거주 지역까지 공습 지역을 늘렸는데, 미국이 파키스탄과 개전 선언을 한 게 아니니 이는 불법이다.
이런 면에서 위키리크스 사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위키리크스 사태는 테러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사실상 (가능성이) 내재돼 있던 것이다. 테러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헌법 질서와 시민권, 국제 규범 등에 대해 온갖 예외를 인정한 것이 부시의 논리였다.
이것이 시민권 진영이 전쟁에 대항하는 운동에도 온갖 수단이 동원될 수 있다고 믿게 했을 수 있다. 국가가 지정한 1급비밀을 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공개하겠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응한 시민들의 자구적 대응과 시민 불복종 운동, 안보 민주화 운동의 아이콘이 됐다.
● 9.11 기획 강좌 전편 보기 <1강> 김민웅 "테러와의 전쟁, 미국 헤게모니 지키기의 마지막 안간힘" <2강> 김재명 "테러와의 전쟁 뒤에는 석유와 군산복합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