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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교과서를 통해 본 한국근현대사 3강 후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글은 김도형 인턴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원문 출처 : http://bit.ly/n0f3fm
고종 퇴위 12년 밖에 안됐는데...한국인은 빨랐다
최근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꾼다는 역사교육과정 고시안을 놓고 논란이 치열하다. 고작 두 글자, 그것도 남한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자유'가 붙는데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두 글자가 갖고 있는 역사인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래의 시민이 될 학생들의 역사인식은 일차적으로 학교 교과서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사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실리는지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올바른 역사관과 시대정신, 그리고 객관성을 바탕으로 역사교과서를 서술해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 인문학교>의 일환으로 9월 7일부터 진행되고 있는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에서는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한국근현대사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강의가 이어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김정인 교수의 세 번째 강의<대한민국 임시 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를 정리해 본다. 이하의 내용은 김 교수의 강의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 임시정부를 보는 시각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 한국인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 지워진 꼬리표는 한두 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흔히 임정법통론이라 불리는,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라는 찬사가 가장 익숙하다. 하지만 그저 허망한 외교활동에 목을 매던 우익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였을 뿐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임정이 한국 근대사에서 한 역할을 제대로 알고 온당하게 평가하려면 단편적인 시각으로는 곤란하다. 보다 다원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관이 요구되는 일이다.
김정인 교수는 일관되게 모든 제도권 역사교육에 의문과 의심을 가져 볼 것을 강조한다.
우선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을 보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갈무리 |
김구, 이승만, 안창호 등 임정의 주요 인물들이 모두 보인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복장, 모두 깔끔한 단발에 양장 차림이다. 한복의 상징 같은 김구마저도 어색한 양복을 입고 있다. 갑오개혁 이후라지만, 아직 당대의 대중들은 한복 차림이 많았다. 당시 사진들 중에도 이렇게 전원 양장 차림의 사진은 임정을 제외하면 흔치 않다. 그렇다면 왜? 이 사진은 임정 요인들이 당시로서는 무척 개화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비밀리에 해외활동을 해야 했던 당시 임정 요인들의 상황을 반영한다. 그저 막연히 가르쳐주는 대로 보고 듣기만 하면 이런 부분은 알 수 없다. 그럼, 눈을 크게 뜨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읽어 보자.
임시정부란 무엇인가, 임시정부를 둘러싼 논란은 무엇인가
임시정부는 하나가 아니었다. 3.1 운동이후 한성, 만주, 상하이 등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있었고 1919. 4. 11. 상하이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9월에 이르러 상하이 통합임시정부로 출범하게 된다.
3.1 운동이후 만들어진 이들 임시정부들의 공통점은 민주공화제와 삼권분립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 헌장도 마찬가지다. 수천 년간 왕이 지배해오던 역사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이 이렇게 단기간에 왕이 없는 정치체제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점은 독특 하다. 심지어 식민모국인 일본도 입헌군주제였던 시대의 일이다. 기억하고 곱씹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김 교수는 되풀이 한다.
임시정부를 둘러싼 대표적 논란은 외교론과 무장투쟁론의 대립이었다. 특히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학계에 근현대사 연구 붐이 일어나면서 무장투쟁론의 가치는 높아진다. 상대적으로 제도권에서 가르치던 외교론의 입지는 약해졌다. 하지만, 과연 외교론은 무의미한가? 독립투쟁은 반드시 무장투쟁이어야 했는가?
김정인 교수는 한국이 일본에게 망하는 과정이 외교와 조약으로 진행되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칼로 망하지 않았다. 조약과 도장으로 망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은 무력으로 해야 한다는 강박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김 교수는 북한에 대한 콤플렉스와 군부 독재 치하에서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군사문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문(文)을 상징하는 세종로에 무(武)를 상징하는 이순신 동상이 서있는 현재의 광화문 거리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력숭배의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외교론에 대한 지나친 폄하, 나아가서 임정 자체에 대한 폄하는 김 교수가 경계하는 것이다. 외교를 '자국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일'로 정의 한다면 임정의 외교 능력은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중국 국민당정부와 소련의 지원을 받아내고 그 와중에 맺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 등의 불공정한 협약을 폐기하는 등 오늘날 정부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외교성과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좌우합작 단체로서의 임정이다. 1922년 소련의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서 임정인사들은 레닌을 만난다. 이들 중 이동휘와 여운형은 사회주의 계열, 김규식은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당시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감동을 피력하였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고 있었다. 피식민지 국가의 지도자들이 이 소비에트의 수장을 만나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았다. 이 후에도 임정은 사회민주주의적 이념인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를 초월한 독립운동의 중추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지만 제도권 교육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육과 교수 |
역사 교과서 속의 임시정부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 역사 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은 항상 일정한 구조를 유지한다. 3.1 운동으로 시작해 임정이 수립되고, 갑자기 청산리-봉오동 전투와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혈투쟁이 나온 후 뜬금없이 한국광복군이 언급되고 해방을 맞이하는, 매우 익숙한 구조다.
이처럼 단순화된 독립운동사 서술 속에서 임정의 위상은 각별하다. 다시 말해 임정법통론은 한국 역사교과서의 독립운동 서술의 근간이다. 해방직후부터 한국 교육에서는 임정의 수립은 곧 주권의 회복이요, 임정은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을 총지휘한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찬양해 왔다. 이는 국정교과서와 검인정 교과서 둘 다 마찬가지다.
유신시대에는 더 심해져 민족적 정통성과 한국적 민주주의의 발현지라는 이미지가 추가 되었다. 김 교수는 이를 상대적으로 취약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임정법통론으로 보완하려 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교과서 서술 안에서 정통성에 대한 집착으로 드러난다. 1990년판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이며 유일한 정통정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1997년판 고등학교 국사에도 '정통정부'라는 표현이 있다. 국정교과서인 2002년판 중학교 국사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주공화정의 국가체제를 지향했다'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자유민주주의와 정통정부에 대한 집착은 반공의 이념적 지렛대가 되어 왔음은 물론, 분단정부의 정통성을 방어하는 임정법통론의 근거로도 작용해 왔다.
하지만 이는 결국 북한을 의식한 발언임을 더 드러낼 뿐 아니라 분단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확대 재생산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때문에 초기 임정이 사회주의 세력과 연관성이 있다거나 좌우합작적 요소를 추구했다는 부분은 교과서에서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무시된다. 역시 분단의식의 연장선이다. 특히 초기 교과서 편찬자들의 친일 이력은 이런 경향을 더욱 부채질 했는데, 대표적인 폐해가 역사교육전반에서 해방정국의 대표적인 민족지도자 몽양 여운형이 제외된 일이다. 현재 우리가 공적으로 학습하고 기억하는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김구로 모두 우익 계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임정 자체의 침체기 역시 교과서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이 시기 임정은 좌우익간의 이념갈등, 무장투쟁파와 외교파의 노선갈등 외에도 서북파와 기호파의 지역갈등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는 지역갈등은 아예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민주화와 함께 임정법통론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론화가 가능해지면서 문제는 심각해진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배제한 채로 이어져온 임정법통론 자체의 진실성에 한계가 온 것이다. 결국 임정법통론자들은 임정의 침체를 좌익분자의 파괴공작에 의한 것으로 호도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념을 초월한 민족지도자 김구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내세워 그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임정을 구원한 것으로 얼버무리는 식으로 무마할 수밖에 없었다. 없는 진실을 포장하려다 보니 교과서 서술의 오류는 점점 심해졌다. 임정법통론을 고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리수를 역사왜곡을 통해 가리다보니 점점 수렁으로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1운동 후 대부분의 무장단체들이 광복군 사령부 휘하로 통합되어 임정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는 주장이나, 태평양전쟁 당시 광복군이 중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맹렬히 싸웠다는 주장, 그리고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어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을 약속받았다는 주장 등은 모두 사실 무근이지만 교과서에 버젓이 실리고 있다.
이런 서술들은 모두 광복군의 활약은 명실상부한 대일 전쟁이었고 외교 노선이 한국독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명제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오롯이 목적론적인 역사서술인 셈이다. 반면 정작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합류 하면서 좌우합작적 성격을 되찾은 일은 임정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임에도 교과서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즉, 임정도 임정법통론도 오늘날 교과서에서는 철저히 남한 지배 권력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담론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다.
임정법통론이 가지는 정치적 함의
그렇다면 임정법통론이 교과서를 지배할 만큼 역사해석의 주류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에도 어김없이 정치적 안배가 깔려 있다. 김 교수는 해방이후 임정법통 계승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짚고 넘어가야함을 강조한다.
임정법통론을 공론화 시킨 인물은 역시 이승만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대통령의 '이미지'에 적합했다. 대한제국 황실과 핏줄이 닿아있는 전주 이씨였고, 서울출신이었으며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협회와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한 개화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이력도 있다. 당대의 보수든 진보든. 이승만은 그들 모두를 설복할 수 있는 복합적 명망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에 추대되었음에도 상하이에서의 6개월을 제외하고는 주로 미국에 거주하면서 교포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걷어 활동비로 충당하였다. 김 교수는 이를 재미 동포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고 해석한다. 결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1925년 탄핵된다. 그리고 알다시피, 해방 후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역시 4.19 혁명으로 인해 하야한다. 두 사람이 동일인물인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승만의 방식을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방 후에 친일파로 이루어진 한민당과 손잡고 미국을 배경으로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도 임정의 법통 계승과 정통성을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승만 특유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의 현장인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김구가 일관되게 친일파와의 비타협 노선을 걷다가 암살당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임정법통론은 당시에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지만 훗날에도 문제가 된다. 전두환 정권 당시, 독립운동사를 임정 중심으로 서술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정통성 확립이 목적이었다. 이에 역사학계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임정 중심의 독립운동 서술은 풍부했던 우리의 민족운동을 축소, 왜곡시킨다. 뿐만 아니라 정통성을 대한민국만이 계승하였다는 주장은 분단극복을 위한 노력이 결코 될 수 없다. 말하자면, 민족의 길도 통일의 길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항일 무장투쟁을 정통성으로 내세우는 북한에도 똑같은 형태의 문제제기는 가능하다.
이런 정통론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가 정통임을 내세우려 하는 순간 독선의 함정에 빠지고 상대방을 배제하게 된다. 결국, 역사를 목적성을 가지고 바라봐서는 제대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임정에 대해 견지해야 하는 시각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정부에 의해 활용되는 임정법통론의 태생적 문제 역시 여기에 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 교육과 교수 |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
이날 김 교수가 강의한 강좌의 제목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있는 그대로 보기>이다. 정권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서건, 정권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서건 목적성이 전제된 역사관은 시각을 굴절시킨다. 임정에 대한 시각 역시 과대평가나 평가절하가 아닌 직시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김 교수는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임정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연 임정은 민족독립운동의 총본산이었는가? 그렇다면 그 의의와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우선, 연해주 대한 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통합은 좌우합작이라는 면에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임정의 탄생 과정에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전선이 형성 되었고 독립운동의 본부라는 정체성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또한 초기 임시정부는 외교를 통한 독립청원운동에 역량을 집중했다. 프랑스 조계인 상하이는 비교적 안전하고 국제적 활동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임정이 위치한 공간에서 이미 외교노선에 주력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임정의 국제적 승인과 일본식민통치의 침략적 성격 폭로가 주된 활동이었는데, 이는 현대에 티베트 등 약소국들의 방식과 유사하다. 때문에 외교노선을 함부로 과소평가 하는 것은 위험하다. 당시로서는 약소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
하지만 내부 침체와 파벌갈등은 분명 심각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정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게 된다. 소련의 재정 지원으로 1923년 1월 3일 국내외 대표 130여명이 모일 수 있었지만 결국 창조파와 개조파간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고 만다.
이 때 김구 등의 우익 보수 계열은 임정을 고수했지만, 창조파와 개조파 다수를 차지하던 사회주의 계열이 이탈하면서 임정은 좌우합작 성격과 대표성을 잃게 된다. 이 시기의 임정은 우익 주도의 일개 독립운동 단체 규모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후에는 윤봉길, 이봉창 등의 의거로 잠시 주목받기도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당 정부와 함께 고난의 유랑길을 다니게 된다.
이 시기 임정의 정체성 중 하나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결집체라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운동의 주류는 좌파 쪽이었다. 그리고 좌익계열에 밀린 임정은 삼균주의를 수용하는 등 좌우합작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국공합작을 경험했던 김구의 영향력일 것이다. 이 역시 남북총선거를 위해 김일성과 대화를 시도할 결단을 내리게 되는 훗날의 김구와도 이어지는 부분이다. 역시 김 교수가 강조하는 공간과 경험이 형성하는 개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임정은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의 합류를 계기로 좌우를 포용하는 주요항일역량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흔히 임정의 무력이라 일컬어지는 한국광복군은 최대일 때도 그 규모가 300명 정도에 머무르는 소수 부대였다. 게다가 대부분이 장교여서 실질적인 의미의 무장세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실제로 광복군은 전투에는 거의 참여 하지 않고 첩보업무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임정의 요청으로 폐기되는 1944년까지 굴욕적 협정을 지켜야 했다. 또한 중국정부는 임정을 실질적 정부로 대우하면서도 정식 정부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다른 열강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최종 목표인 국제적 승인에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임시정부의 의의는?
앞에 썼듯이 임정은 국제열강들에게 정식정부로 승인받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 때 승인 받지 못한 것은 미군정 시기에도 임시정부가 승인 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된다. 흔히 임정의 활동, 즉 외교노선 중심의 독립운동이 무의미했다는 평가는 이 부분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사실 역설적으로 임정의 외교 활동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성패를 잣대로 삼는다면 무장투쟁 역시 일제를 이기고 나라를 되찾지 못했으니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무장투쟁의 주역인 김좌진, 홍범도를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요는 노력이 가치와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 인 것이다.
몇 년 전 동티모르 임시정부는 국제적 인정을 받는데 성공했고 동티모르 공화국 정부로 정식수립 될 수 있었다. 국제적 승인은 그래서 중요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임정의 외교적 노력이 무가치한 활동이었다고 봐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임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의의는 단순히 효과적인 평화적 독립운동노선을 제시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임정은 한국사 최초의 민주 공화정 정부였기 때문이다. 자본이나 기술은 어떠했든지 간에 한국인들의 정신적 근대화는 놀라울 만큼 빨랐다.3.1운동 직후 설립된 모든 임시 정부는 왕정 대신 민주공화정을 채택할 것을 천명했다. 1907년 고종 퇴위 이후 고작 12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는 점, 그리고 수천 년간 왕정이 존속해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김 교수는 이 외에도 1912년에 일어난 중국의 신해혁명 역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자국의 왕이 퇴위 당하고 청 제국의 황제는 아예 사라지는 대격변의 시대 속에서 한국 민중은 스스로를 자각하고 민주제와 입헌정치에 대한 풍부한 논의를 전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군주와 국가를 분리시키고 군주를 배제하는 정치, 즉 민주 공화정체였다.
3.1운동이 제국주의와 전제정치를 부정하고 독립에 기초한 공화정을, 신분제도를 부정하고 평등에 기초한 민주정을 제시했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이상과 이념은 임정에 의해 해석되고 그 헌법에 규정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1944)과 제헌헌법(1948)은 전문, 총강, 국민의 권리와 의무,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경제, 회계, 헌법개정 및 부칙 등에서 거의 동일하다. 내용면에서도 두 헌법은 3.1운동의 독립정신 계승,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기본권 보장, 권력분립 등에서 거의 일치한다. 말하자면, 헌법의 근간과 골조는 사실 상 임정시기에 만들어진 셈이다.
극심한 반공이념이 지배하던 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졌을 현재의 제헌헌법에도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는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이유 역시 초기 임정의 좌우합작적 성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말은 헌법적으로는 거의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비판과 피할 수 없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임정의 요인들은 일제로부터 독립된 신국가 건설의 방향을 일제 치하에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