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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4강]
<시민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보다> 4강 후기입니다.강의 시간에 다루신 주제와 조금 다른 접근을 해봤습니다. 어디까지나 사견이니 강의 내용과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 자원활동가 한광희
요즘도 골목 한 귀퉁이에선 심심치 않게 불심검문이 이뤄진다. 신분증이 없다면 선택지는 몇 개 없다. 주민등록번호를 읊든지, 지장을 찍든지, 튀든지. 아직 까지는 세 번째 선택을 한 적이 없다. 어쨌든 통치의 시작은 ‘인구’의 통제다. 봉건 통치 때부터 시행된 호구조사는 지금도 인구센서스라는 명목으로 5년에 한번 씩 이뤄진다. 올해도 센서스의 해다. 인구 총 조사도 2015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진다. 설문지에 아름다운 답안예술을 하는 즐거움도 두 번 남겨 놓은 셈이다. 대신 이미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등록센서스로 바꾼다고 한다
인구가 정보화되면 통치하는 입장에서 개인을 국가로 호명하기가 수월해 진다. 이름만 올리는 건데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냉소적인 사람들도 결국엔 수집된 정보 앞에서 국민 또는 주민일 뿐이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그럼 정보화하는 건 누구냐는 거다. 물론 국가 또는 공공기관의 이름을 빌린 조사원들이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국가가 정보화하는 것인가? 이런 응답은 반 쯤 맞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 ‘브라질’(국내명: 거미여인의 유혹)은 바로 이와 같은 수집된 정보와 배치된 인간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테러관리국의 타이핑 실수로 테러범 ‘터틀’이 ‘버틀’이 되면서부터이다. 우선 관리들은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국가 데이터베이스에서 검색된 버틀은 지속되는 감시를 받는다. 개인의 정보가 수집된다는 건 외재적 종속관계이자 대한 묵언압력이다.
혹자는 범죄예방(치안)과 국가적 서비스(복지혜택) 차원에서 정보수집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맞는 소리다. 관리의 측면에서 잘 수집된 정보는 행위의 불확실성을 절감시켜준다. 관리자의 의도만 적절하다면. 국민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의례로서 정보수집에 동참하는 것은 심리적 안정기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른바 상상의 공동체와 같이 내집단을 형성한다. 이어서 정보체계는 필터의 역할을 맡으며 외부의 불순한 것들과 내부에서 오염된 찌꺼기를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범죄예방과 국가적 서비스는 이런 차원에서 얽혀있다. 결국 국가라는 경계 안에서 욕망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근대 시민적 욕구가 국가의 통치와 결합한 것이다.
통치체계는 지속적으로 ‘좀 더’ 정밀한 정보를 요구한다. 계속되는 요구에 따라 호구조사에서 신상조사로 신상조사에서 유전정보까지 확장된다. 오늘 주로 논할 유전정보역시 궁극적인 단위로서 정보의 최종심급이다.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 생물학적 개인이 통치에 편입되는 것이다. 사회적 개인이 합의에 의해 사회구성원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임을 내포한다. 이는 개인이 구성원으로서 일정한 발언권을 갖고 자신의 차이를 설명하고 사회에 호소할 권리도 있다는 말이다. 이와 달리 생물학적 개인은 자신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오로지 이중나선의 꼬임 속에서 개인은 존재의 이유를 유전학자를 거쳐 설명해야한다. 상당수의 설명은 통보와 수긍의 과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치(비단 나치뿐만 아니라 정상국가에서도 사회적 병리를 몸의 영역에서 찾는 시도가 잦았다.) 정가 우생학에 골똘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완벽한 필터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바로 유전자는 그 자체로 투명한 정보이자 기호다.
통치는 통치이성에 의해 움직인다. 통치이성의 메커니즘은 최소비용으로 통치하기다. 통치이성은 통치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을 따진다. 통치이성은 ‘통치’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작동한다. 개인들은 숨 쉬듯 통치성을 실천한다. 그리고 이는 ‘장치’들에 의해 사용되고 구성된다. 이 관점에서 유전자는 야누스의 얼굴이다. 그 자체로서 ‘자신’의 분신이자 권력의 장치로써 작동한다. 우리는 유전자를 통해 스스로 통치이성에 동화된다.
우리가 유전자에게 부여하는 권위는 대단하다.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사례가 친자확인이다. 20년 키운 자식을 유전자 대조를 통해 내친다는 이야기는 뉴스를 통해 종종 들을 수 있다. 인구의 배치구조를 생득적 기준에 둔다는 건 사회적으로 축적된 개인의 삶에 대한 무례한 포기각서다. 유전자정보 수집은 개인을 국가의 궁극적인 요소로서 환원한다. 국민은 영토와 다름없이 취급된다. 아동 성범죄와 같은 강력범죄의 범람은 통치이성에 편입될 것을 무의식적으로 권유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정보수집의 방식은 과학적 객관성으로 치장을 하고 우리를 맞이한다. 일단 복잡한 수집과정을 거쳐 생산된 정보는 개인의 분신이 아니라 기호일 뿐이다.
아주 비관적이지만 실상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를 통제할 권리는 수집거부 이외엔 없다. 나아가 유전자 지도(Gene Mapping)라는 거대과학이 부여하는 상징의 해독 역시 부정해야 한다. 지도라는 명징화 작업을 통해 과학은 통치를 서술한다. 개인적 수준에서 유전자 정보를 해독할 능력도, 시설도 없거니와 하물며 해독이 가능해도 실천 가능한 대안은 없다. 이미 유전자는 창세기적 정보를 나열해 놓은 지도이니 말이다. 유전자란 묵시록을 펼쳐놓고 기도를 하면서 밤을 새든지, 없었던 일처럼 살든지.
유전자와 관련된 문제들은 ELSI(ethical, legal, and social issues)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논의되고 있다. 때론 이런 논의들이 다양한 집단을 포괄하는 ‘국익’(보편적 가치)로 수렴될 가능성이 있다. 이곳이 통치성의 영역이다. 누구나에게 해보단 득이 되는 길, 경제적으로 환산된 정치에서 도출된 법은 이로써 통치의 도구로 전락한다. 국가라는 영역 안에서 취득한 개인의 이득은 주권으로 환산된다. 다시 말하지만 치안과 복지혜택과 같은 제한된 주권에 만족할 가능성이 많다는 소리다. 이것은 지식 정치의 딜레마다.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핵발전문제도 그렇고, 유전자 조작 문제도, 현대 의학 문제도 평소 관심이 많은 분야였거든요...
개인적으론 과학 안에 우리가 맹신해 마지 않는 의학 문제도 같이 넣어 다루었으면 좋겠단 바램이 있습니다. 아토피가 단순히 환경의 오염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 인간의 몸이 의학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몸이 자신의 원래 기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이 아토피로 나타난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충격! 모든 종류의 주사와 약물에 대한 공포가 생겨났습니다. 과학은 이성의 결과물인 척 하지만 그 안에는 온갖 종류의 오류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를 우얄꼬~~~
아이들 예방주사 한대도 쉽게 맞출 수 없는 현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