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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며, 또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사학이란 단순히 과거의 사실 조각들을 수집하며 꿰맞추는 지적 퍼즐 놀이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요? 아니면 일차적인 사실보다 한 차원 높은 거대 담론의 알리바이를 확보하려는 현재적 관심의 소산일까요? 그렇다면 그 거대 담론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3월 25일, 고려 초 천추태후가 살았던 시대를 주제로 한 <역사드라마, 사료로 다시보기> 세 번째 강의는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던져 주었습니다. 강의 오래하는 것 안 좋아하신다던 광운대 교양학부의 김인호 교수님도 결국 수강생들이 던지는 그 질문들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에게 다소 익숙한 대답을 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2009년 KBS에서 방영된 <천추태후>입니다.
천추태후, 애정에 눈먼 못된 어미?
천추태후. 태조 왕건(1대)의 손녀이고, 경종(5대)의 부인이자, 성종(6대)의 누이이자, 목종(7대)의 어머니이자, 또 현종(8대)의 이모인 여인. 이 복잡한 가계의 원인은 지방 호족 세력과 손잡기 위해 공식적으로만 29명이나 되는 부인을 둔 왕건의 전략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외척의 힘이 굉장히 셌습니다. 왕욱의 딸인 천추태후가 왕씨가 아닌 황보씨인 것만 봐도 짐작이 가능합니다.) 당시까지는 아직 골품제적인 풍습이 남아서 왕족끼리만 특권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에 이복형제들끼리만 결혼한 것도 족보 그리길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 왕위 계승 문제도 복잡해집니다. 심상치 않은 갈등이 예상됩니다. 하지만 수강생 중 누구도 드라마를 본 이가 없다는 걸로 보아 썩 재미있게 작품을 그려내진 못한 것 같습니다.
종래 조선의 유학자들은 천추태후를 애정에 눈이 먼 못된 어미 정도로 치부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김치양과 눈이 맞아 아들까지 낳은 여성. <고려사>는 그 관계를 ‘간통’이라 표현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아들인 목종(7대)이 18세로 장성했음에도 여성의 신분으로 섭정을 펼쳤습니다. 보수적인 유학자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겠죠? 다분히 조선의 유교적인 질서가 반영된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사랑이 불륜일까요? 고려는 예상보다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의 사회였습니다. 지금은 그림이 남아있지 않지만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남녀 구분없이 목욕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재혼도 상당히 자유로워서 조선 초기에야 여성이 세 번째 결혼을 하면 자식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제한하는 법이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성의 지위도 상당히 높았습니다. 재산상속 등에 있어서 불이익을 받지 않았죠.) 어떻게 보면 오늘날보다도 개방적인 것 같습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비칩니다.
드라마는 천추태후를 좀 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드라마 사진 속에서 철갑을 하고 칼을 움켜쥔 채시라(천추태후 역)의 표정이 결연합니다. 과거 기껏해야 남자 주인공의 보조자에 머물던 수동적 여성상을 뒤집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설정입니다. 과연 당시에 (태후가) 활 쏘고 갑옷 입고 그랬을까요? 또 그게 과연 진취적인 여성상일까요?” “장수가 앞에 나서서 칼 들고 싸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후방에서 전반적인 전술 배치 등에 주력하는 것이 장수의 일인데...” 연출 상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다 보니 생기는 왜곡에 대한 지적입니다. 덧붙여 교수님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 상상력이 제한돼 작가들이 드라마를 못쓴다”며,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면 좋겠지만, 문제 |
는 사극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라는 딜레마를 토로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런 사소한 문제보다 좀 더 논란이 될 만한, 거창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나는 꿈을 꾼다. 나의 고려가 대제국이 되는 그날을...” 중무장을 한 천추태후 사진 옆에 쓰인 문구입니다. 천추태후를 고구려 계승의 꿈, 민족성 혹은 자주성 회복과 같은 거창한 담론에 연결지은 것입니다. 이전에도 제국에 관련된 드라마는 있었습니다. 고구려 건국을 다룬 <주몽>, 발해 건국 이야기인 <대조영> 등이 그랬지요. <천추태후>는 이러한 드라마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입니다.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에 대응하려는 의도도 엿보입니다.
KBS 다큐멘터리 <한국사 전(傳)>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천추태후를 재평가합니다. 다큐는 목종대의 서경 중시 정책을 북진정책으로 해석합니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처럼 말이죠. 천추태후가 불교를 중시하고, 전통행사인 팔관회를 부활시킨 것은 고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는 자주 의식의 발로로 읽어냅니다. 이전의 성종은 스스로 송나라의 제후국임을 청했습니다.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고 중추원을 설립해 유학과 중국을 지향한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천추태후는 성종대의 이러한 정책 방향을 되돌려 자주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종과 현종 대에 받았던 거란의 침략이 목종 대에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실리외교의 결과라는 해석을 내립니다.
천추태후가 고구려 부활을 꿈꿨다? 글쎄요.
불교 및 전통을 중시했다는 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김치양이 승려 출신입니다. 동주에 사당을 건립하는 등의 정책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당시 불교며 팔관회와 같은 행사들은 금전을 챙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마치 오늘날 일부 종교나 행사가 그렇듯이요. 성종이 팔관회를 없앤 이유로 재정이 많이 들어 번잡스럽다는 점을 든 것만 봐도 중국 지향이라 단정짓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주성 회복이라는 그럴듯한 포장 뒤에 감춰진 속살에서 풍기는 돈 냄새를 무시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실리외교 역시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성종이 송과의 관계를 중시해서 거란의 침입을 불러왔다는 해석을 우리는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성종 13년 거란 침입으로 송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거절당하자 송과의 관계를 단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대라 해서 반드시 일률적인 관계만을 맺은 것을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종 역시 재위 2년에 송에 사신을 파견해 거란의 위협을 호소한 바가 있고요. 각 지역에 성을 쌓아 전쟁을 대비할 정도로 거란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거란을 배척하라는 것은 훈요십조에도 기술된 태조 왕건의 유훈입니다. 고려가 후삼국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의 유민을 포섭한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랬던 거지요. 거란 배척을 일면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김인호 교수
김인호 교수님은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천추태후가 대국을 지향했다는 주장을 반박합니다. 덧붙여 거대 담론에 무리하게 사실들을 엮어 넣으려는 일각의 시도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한 시도들이 일종의 콤플렉스라는 것입니다. 대륙 변방의 반도국이 갖는 콤플렉스, 식민지배 경험을 지닌 약소국이 갖는 콤플렉스 말이죠. 교수님은 그런 콤플렉스의 일종으로 우리나라가 일왕을 그냥 왕이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외국은 모두 천황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왕을 천황이라 불러도 사대를 하는 것은 아니고, 또 그런 호칭이 일왕의 격을 새삼 높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불필요하게 명분에 집착한 것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제 그런 콤플렉스에서 벗어났으면 한다는 바람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에 곧바로 찬반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한 남성 수강생은 우리가 민족을 강조하는 것, 우리가 국사를 배우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한두 사례로 천추태후의 고구려 계승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민족주의에 대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는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역사 왜곡에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어서 더욱 반작용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주장에 다른 여성 수강생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며, 굳이 고대사까지 민족주의를 연결짓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을 연상시킵니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찬반 의견과 질문이 쏟아졌지만, 시간이 모자라 수강생들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습니다. 거대 담론이냐, 아니냐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것들이 사실에 발 딛고 있어야 함에는 모두가 공감할 것 같습니다. 주변국의 왜곡에 덩달아 왜곡으로 맞서는 것은 이성에 기반해야 할 학문의 장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의 장으로 변질시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에 대항할 힘은 오직 진실에서만 나옵니다. 이 강의가 있던 주에는 2차 한일역사공동위원회의 활동 결과 발표가 있었습니다. 양국의 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이 거짓임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의 위법성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국의 의견을 병기하는 선에서 활동을 접어야 했습니다. 더딘 걸음이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단단하고 우직한 진실의 힘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