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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불편해도 깨어있어야 할 인권감수성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비주얼에 압도되는 아이들과 그들을 이끌어가는 자본주의의 엄청난 물량공세를 일상으로 마주치는 세상이므로. 시각이 생각을, 생각이 다시 시각적 표현으로 드러나는 것에 어느 순간부터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자유를 누린다고 주장하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한 프리랜서 강사로 살고 있다. 그래도 일말의 작은 선택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일주일에 5일을 아이들과 만난다. 주로 그림책이 나의 소중한 밑천이고, 토론과 글쓰기를 접목한 창의적(?)인 수업을 수년째 고민 중이다. 특히 작년부터 매료된 ‘시각적 문해력’으로 인해 참여연대 아카데미의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를 만났다. 그림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이끌림도 컸다.
ⓒ 김태권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 수업자료
‘인권’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몸에 힘부터 들어가는 세대여서 그런지 단단한 기대가 있었다. 그림을 좋아만 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처음 보는 그림들이 많았다. 그러나 모든 사물과 이론에 대한 접근태도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해석에 달려 있지 않은가? 김태권 선생님이 펼치는 그림 세상에서 함께 호흡하며 4강을 모두 들었어도 수업시간에 딴 생각을 하는 아이처럼 여러 차례 다른 세상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다른 곳에서 낯선 사유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뿐만 아니라 강의를 듣는 사람들 대부분 꽤 조용하고 차분해 보였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는 아주 줏대 있고 명료했다. 많은 것을 떠먹여 주려는 엄마의 마음으로 소통의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강사님도 그 부분을 매우 아쉬워하며 4강 때는 질의와 소통의 시간을 일부러 할애하기도 했다. 새로운 발상과 접근에 의한 의견제시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며 감사를 표한 강사님의 응대가 인상적이어서 ‘아, 이 분은 생각이나 의견을 나누는 데에 꽤 열려 있구나’라는 호의적인 느낌을 받았다.
주제에 맞는 그림들을 선별하고, 적절한 설명과 주장을 넣어 풍성한 강의로 완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이 있었을까 하는 감사와 함께, 덕분에 곳곳에 숨어 있던 명작들을 편하게 마주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프레임’에 의해 의도적으로 편집되는 사진처럼 그림도 작가의 시선에서 세계가 정해진다. 그 한정된 세계를 다양한 각도에서 이리저리 뜯어보고, 다른 시선과 배경도 상상해가며 즐길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즐거운 기대치를 맘껏 부풀리면서 완강했다.
일상에서 흔하게 노출하는 편견, 무뎌진 차별, 죽은 나무껍질처럼 굳은 고정관념들을 예리하게 조각내며 그림 속에서 하나하나 건드려준 ‘숨어 있는 인권’의 발견이 가장 의미가 컸다.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 그리고 성인에 이르기까지 ‘민주시민교육’이라는 주제로 인권감수성을 다루는 강사이므로 더욱 와 닿은 부분이다. ‘결정 장애’와 같이 흔하게 남발하는 말에서부터 ‘난민 수용’과 같은 복잡하고 뜨거운 논쟁에 이르기까지 불편하고 심각한 주제들이 강의에서 거의 다 언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경악한 ‘악의 평범성’도 결국 끈질기고 예민하게 사유하지 않은 태만에서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함께 사는 문제> 노먼록웰 (1964) ⓒ김태권, <그림 속 숨은 인권이야기> 강의자료
고백하자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강의에서 언급된 ‘우리가 함께 사는 문제’(노먼 록웰, 1964)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그림을 보여주고 그림 읽기를 해보았다. 아이들은 흑인 여자아이를 에워싸고 걷는 4명의 백인 남자들이 매우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이며, 심지어 백인이 아니라 유색인종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가 학교에 처음 가는 낯선 길을 힘이 센 어른들이 보호해주는 그림이라고 해석해서 동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반면 부부가 배를 타고 떠나는 그림은 두 사람이 싸웠다, 전쟁이 나서 도망가는 중이다, 배타고 놀러가는 중이다 등등 세세한 부분을 신경 쓰지 않고 분위기만 파악하는데 그쳤다. 나중에 그림의 배경설명을 들은 후에야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인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기, 프레임과 규정된 틀을 넘어 다층적으로 바라보기를 통해 어떤 결핍과 과잉이 숨어 있는지를 읽어내고 내 시선과 사유의 왜곡으로 인해 혐오와 부당한 차별이 내재화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나와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오염된 시선이나 해석에 노출되어 배려와 존중이 없는 세상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다. 함께 고민하고 방향성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숨어있는 인권’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렇게 간간이 만나 생사확인이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오래 가물었지만 단비가 올 것이라는 기분 좋은 일기예보처럼 조만간 귀한 강의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