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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두 번째┃결혼은, 미치도록 재밌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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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미치도록 재밌는 짓이다
사진| 전보임간사 결혼사진 2012.4.15
“잘 뽑았는지 모르겠네.”
그녀가 카드 세장을 뽑았다. 에이스 컵, 퀸 오브 컵, 심판 카드.
내가 타로 점을 배운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의 반응은 어쩜 그렇게도 한결 같은지.
“나도 봐줘!”
하여 인터뷰를 위해 만났지만 제일 먼저 꺼내든 건 타로 카드. 지나고 보니 이해가 안 가지만 그때 점을 봐주었던 당사자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사람의 점을 보며 둘이 한참 수다를 떤다. 카드에 나온 대로 읽어보면, 그녀의 남편은 온화하고 공감 잘 해주고 굳이 말하자면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이 발달된 성격이어서 중간자 역할이나 매개자의 역할을 잘 해내고 그런 감수성과 더불어 이성적이면서도 객관적 성향을 동시에 갖춘, 균형적인 사람이었다. 이 얘기를 들은 그녀 왈,
“곧 자리 까시겠네. 언니, 이 길로 나가. 신랑의 성격을 꼽으라면 진짜 언니 말대로 그래요.”
사진| 백인보 인터뷰 중 타로카드 보는 장면
ㅎㅎ 요즘 내 점빨이 급성장세에 들어섰나 부다. 그건 그렇고 이제 본인 얘기 좀 해 보시죠. 보임씨는 어떤 사람인가요?
“어떤 사람이냐고요? 어떤 사람이라고 얘기하는 거 무서운 것 같아요.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거랑 다른 면도 갖고 있는데... 음...(시간 엄청 간다) 평생 살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를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정말 답하기 어렵네요. 나는 이런 면이 부족하니 이렇게 저렇게 채워가야지 하고 노력하긴 하지만, 딱히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긴 힘드네요.”
고마운 사람들
자신에 대해 얘기해보라는 무식하고도 무책임한 질문 하나를 턱 던져놓고 음료수 잔을 집어 들었다.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 누구나 그렇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단답형의 대답을 내놓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아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문득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낯설게 다가오는 게 자신이란 존재이니까. 내가 잔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고 여유롭게 음료를 마시는 중에도 그녀는 여전히 질문과 씨름 중이다. 평소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것 같은 그녀도 저럴 때 보면 마냥 귀여운 소녀다.
“너무 긍정적인데 한편으로는 너무 부정적인 사람? 생각해보면 살아오면서 뭔가 뚜렷한 계획 같은 걸 가지고 움직여 온 스타일은 아니에요. 자신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이런 부분인데 이렇게 살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 이런 자세로 여태껏 살아왔어요.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던 같구요.”
낙천적이구나. 그런 성격이면 스스로한테 주는 스트레스는 없겠다. 역시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은 달라, 하고 아줌마 특유의 썰을 풀자 그녀가 대뜸 이런다.
“헐...저도 나름 힘들고 외롭게 컸어요.”
아, 그 질문도 뒤에 있어요. 그러니 그때 다시 이야기 하구요, 원래부터 시민운동을 하는 것이 꿈이었나요?
“대학교 때부터 구체적으로 그런 꿈을 꾸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제가 성공회대를 나왔는데 학교 분위기가 좀 진보적이고 개혁적이어서 거기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고, 나 스스로 약간 반골 기질도 있는 것 같고. 고3때도 죽어라 공부만 하지는 않았거든요. 야자도 째고, 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혼자 영화도 많이 보러 다녔구요. 그때도 가벼운 것보다는 뭔가 메시지가 있는 묵직한 영화들을 주로 보았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다룬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착취하는 장면이 지금도 기억나요. 영미문학반 서클 활동도 했었고, 아... 작문반 선생님이 굉장히 사회비판적이었어요.”
그녀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던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했다. 그녀의 말대로 크게 계획 같은 거 세우지 않아도 그녀에게 맞는 길들이 그때그때 알아서 열려주는, 고마운 인생이었다.
“신입생 때는 인문사회학회 활동하며 세미나하고 그랬어요. 학회 선배 중 두 명이 ‘학벌없는사회’라는 시민단체 멤버였는데, 저 역시 학생모임에서 활동하기도 했어요. 나 자신도 그닥 내세울 학벌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학벌로 너무 많은 게 결정되어 버리는 사회, 그런 것들을 바꾸고 싶었죠.”
좋은 사람들과 기회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냥저냥 체제에 순응하며 평범한 사람으로 살았을 지도 모르겠다 말하던 그녀. 그녀 앞에 또 다시 알아서 나타나준 그 기회에 대해 물었다.
“졸업하고 바로 단체에 들어 온건 아니에요. 유럽 여행도 갔다 오고, 제가 좀 근거 없이 낙천적이라 시민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어딘가에 이력서 낸다든지 그런 쪽으로는 전혀 현실 감각 없이 지냈네요. 그 때가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있던 뜨거운 해여서 밤마다 참석하고 그랬죠. 그러고 있는데 환경단체에서 활동하는 친구에게 자원활동을 권유 받았아요. 그래서 인턴 비슷하게 일하기 시작했죠. 근데 돌이켜보면 그 3개월간의 경험이 내가 지금까지 활동가로서 살아가게끔 만들어 준 힘의 원천인 것 같아요.”
사진| 2011년 가을 무렵 전보임간사
지금까지도 힘의 원천이 되어준다, 뭐가 그렇게 좋았어요?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에 있는 마을공동체(지역운동)를 직접 찾아가는 프로그램에 참여했었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지금이야 공동체 운동이 활발하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새로운 문화적 현상이었거든요. 공동체들도 모두 각기 개성이 강하고 특색이 있었구요. 수원의 야마기시즘이라는 공동체가 기억에 가장 남네요. 아주 친환경적이고, 닭의 권리를 존중하는 닭장 설계와 방식으로 키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요. 특히 공동체에 지갑이 한 개 밖에 없는 공동생산, 공동분배...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한국에서 살고 있다는게 너무 신기했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 일정했고 그러다 보니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천천히 변해가는 모습들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프로그램 형식도 잠깐 들리는 게 아니라 보통 1박 2일, 2박 3일 이렇게 지내다 오고, 여름엔 함께 농활도 가고. 그래서인지 한 번 다녀오면 사람들이 난 앞으로 이러이러하게 살고 싶다,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한 사람의 삶이 변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고 무척 재밌었어요. 그리고 그런 과정에 비록 인턴이라는 작은 역할이긴 했지만 내가 같이 참여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죠.”
그러고 보니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있게끔 도와주고 안내자 역할을 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인생에 많이 있었다면서 그녀는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주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 그대로를 공명해 준다는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생에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이에게 세상이 돌려주는 것은 또 다른 감사와 축복일 것이다.
축복의 시간들
“참여연대에 들어오기 전에 잠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어요. 상임위원으로 계셨던 김동춘 선생님의 비서, 조교 같은 역할이었는데 일정한 수입도 있었고 내 시간이 많다는 장점이 있었죠. 근데 솔직히 일이 재미있진 않았어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확실히 알게 된 좋은 경험이었죠.”
공채를 통해 참여연대에 입사하고 운영팀에서 일하던 그녀가 느티나무에 온 건 2012년 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봄의 입구를 향해 가는 겨울의 끝자락 즈음이었다.
“참여연대 입사할 때 시민참여팀에서 일하고 싶었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되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 다시 시민참여팀(아카데미)으로 희망보직을 신청하게 된 거예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바꿔나가는 그 느낌, 내가 그 변화의 과정 안에 함께 있다는 그 느낌이 너무 좋고 재밌었거든요. 아카데미에서 일하면 그런 경험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들이 있었죠.”
어땠어요? 생각만큼 재미있었어요?
“축복의 시간이었죠.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활동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개인적으로 더 큰 축복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강의도 많이 듣고 우쿨렐레나 드로잉 같은 예술분야를 접할 때 큰 취미 생활을 발견했지만 가장 크게 제게 남은 건 사람들이에요.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걸 받았어요. 강사들과의 만남 같은 경우에도 계속 인연을 이어가면서 때론 인생 얘기도 하게 되고 어떻게 살지 고민도 서로 나누게 되고... ”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그녀는 활동과 자신이 따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활동 안에 자신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자연스러운 조화가 자신이 택한 일의 영역에서 이루어졌기에 그녀는 더없이 행복했다.
“사실 참여연대 전체 차원에서 보면 아카데미 같은 분위기는 참 존재하기 어렵죠. 그럼에도 아카데미는 항상 즐겁고 재밌는 것을 찾아내려 고민하고... 어느 부서보다도 긍정적인 기운이 넘치는 곳이 아닐까 해요. 아카데미에 있던 시간들이 저에게는 기쁨의 시간들이었죠. 다른 간사들에게도 정말 추천하고 싶어요.”
뭐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다 보면 마지막 시간 즈음 참여자들이 수고했다고 작은 선물과 손카드를 주시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한 역할이 적다고 생각되서 그런지... 송구스럽기도 하고, 그런 분들께 정말 감사하죠. 그러고 보니 첫 종강파티가 가장 기억이 많이 남네요. 준비도 힘들게 했던 것 같고 처음이라 영상 만드는 것도 잘 몰라서 어렵게 만들고 그래선지 파티 때 제가 만든 영상이 돌아가는 거 보면서 지난 시간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 그 전설의 종강파티. ㅎㅎ 느티나무홀의 책상들을 모두 치우고 돗자리 펴놓고 놀았던, 모인 이들은 모두 어른이었지만 노는 수준은 딱 초딩이었던... 저도 그날 힘깨나 보탰더랬죠. 힘들게 준비해서인지 나도 그 파티가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데, 사람은 다 비슷한가 보다.
타부서로 옮기면 언제 가장 느티나무가 그리울 것 같아요?
“글쎄요, 이제 일반시민들이나 느티나무 참여자들 혹은 회원 분들을 그 전 만큼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테니까 그게 가장 그리울 것 같아요. 주로 관련분야 전문가들과의 만남이나 페이퍼 작업이 주가 될 테니까요.”
떠나면서 아쉬운 점들도 있겠어요.
“아카데미의 참여층이 굉장히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어서 좋게 말하면 이것도 조금 저것도 조금 다 포괄하면서 가는 형태예요. 그게 적정선과 강약조절이 잘 되어서 균형을 이루면 좋은데 어떨 때는 잘 안되기도 하고 그랬죠. 그때그때 중점이 되는 부분이 바뀌고 그러면 그 다양한 흐름을 전부 쫓아가기에 내 숨이 좀 가빴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게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에요. 느티나무가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데 도움이 별로 되지 못한 느낌이 들어요.”
세상에 둘도 없는 남자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녀가 느티나무를 떠난다. 아이가 생겼기 때문이다. 올 8월이 출산예정. 그러고 보니 그녀는 느티나무에 와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잉태했다. 언제부터 느티나무가 풍요로움의 상징이었었나?
“남편(참여연대 전직 간사)하곤 같은 직장의 선배 후배 사이로 만났지요. 하루는 일 때문에 안국역까지 같이 차를 타고 갈일이 있었는데, 그때 남편이 운전을 하고 있었고 차 안에는 남편과 저 둘 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길이 얼마나 막히는지 경복궁역에서 안국역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어색했죠. 그전까진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너무 어색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입사 2년만에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날이었네요. 그게 인연이 되었던것 같네요. 그리고 그 즈음 제가 혼자서 경주에 여행을 갔었어요. 막상 밤에 혼자 숙소에 들어가 있으니까 약간 무섭기도 하고 겁도 나고 티비소리 크게 틀어 놓고 있었는데, 그 때 마침 남편한테서 문자가 온 거예요. 잘 갔냐고, 경주는 안압지 야경이 참 좋다면서... 문득 제 생각이 났다고 하더군요. 그 일이 고마워서 오는 길에 경주빵 사다가 줬어요.”
아무리 들어도 결정적인 한방 같은 건 안 보이는 군요, 보임씨?
“아, 결정적 한방... 프로포즈... 글쎄 그게 기억이 안나요. 경주빵 사건 이후에 너무 빨리 진행된 일이라...”
아니 프로포즈가 기억이 안 난다고? 그게 말이 돼?
“글쎄 그게 몇 월 며칠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으이구, 누가 날짜 물어봤습니까? 프로포즈가 있던 날의 상황을 물어본 것이지요, 빵글이 엄마!!!
“아! 날짜가 아니라... ㅎㅎ. 커피 마시면서 남편이 사귀자고 말했죠. 그전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호감 가는 선배이기도 했고, 그래서 만나게 되었네요.”
사진| 2011년 참여연대 송년회에서 새해 소원적기 코너
아무리 파도 구체적이거나 결정적인 사건 같은 게 안 보인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대놓고 애들처럼 첫키스는 언제 어디서 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래 내가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이쯤에서 넘어가 줄게^^.
“저흰 연애 기간이 무척 짧았어요. 사귀고 결혼까지 얼마 안 걸렸죠. 11월에 정식으로 만났는데 결혼얘기가 12월 초 즈음 나왔으니까 한두 달 정도?”
내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왜 그랬을까, 무척 궁금하군요. 이번에는 얼렁뚱땅 안 넘어가겠습니다. 왜 그랬죠? 왜 그렇게 결혼을 서두른 거죠? 나는 사냥개처럼 킁킁댔다.
“남편은, 음... 느낌이 달랐어요. 누군가를 만나도 결혼을 상상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사람과 결혼을 하면 이렇게 살게 되겠구나’하고 머릿속에 너무 쉽게 그림이 그려지는 거예요. 한마디로 느낌이 온다고 해야 하나, 잘 살 것 같은 느낌이 확 오더라구요.”
이게 LTE급으로 결혼을 하게 된 이유란다. 아, 빵글이 엄마가 오늘도 너무하는구나 하고 있는데 그런 나의 헛헛한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결정적 한 마디.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때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요. ^^”
참말로,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남편이요? 마음씨~. 다정다감하고 어른스럽고 포용력 있고 모든 걸 안아주는 느낌?”
그녀의 페이스북에서 이 닭살 커플의 행각들을 목격한 바 있다. 생일날 남편이 손수 미역국도 끓여주고 손편지도 써주고, 일하느라 집에 늦게 들어가면 아내 먹으라고 바나나자두 주스도 갈아놓고 빨래도 세탁한 후 이쁘게 개켜놓는다는.
그래 어디 대놓고 남편 자랑 한번 해 보세요. 참고 지켜봐드리겠습니다.
“음... 하고 싶기는 한데(한참을 망설인다).”
왜요? 주위 사람들 눈치 보여서? 너무 대놓고 하면 욕먹을 까봐?
“그것도 그렇고 사실...(뜸을 들인 후) 남편 자랑을 하려면 제 입이 모자라요. 하두 얘기할 게 많아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뭘 얘기해야 할지... 하다보면 시간이 모자를 텐데.”
이쯤 되면 인터뷰고 뭐고 정황 상 존댓말이 안 나온다. 보임아, 진심이냐? 결혼은 미치게 재밌는 짓이라고 떠들더니 그게 정말 진심이었던 게로구나. ㅠㅠ
“남편은 기념일 챙기고 뭐 사주고 이벤트 잘 해 주고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그저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죠. 말 한마디라도 정성스럽고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람, 전화나 문자해서는 ‘뺑글이(보임간사의 애칭) 모해?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어?’ 이렇게 다정히 물어봐주는 사람, 사람이 겉과 속이 똑같고, 시간이 흘러도 참 한결 같고...”
나의 어린 두 딸들아! 부디 이 언니를 닮아야 한다. 알았지?
타인의 취향
예전에 그녀와 술자리에서 영화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주로 B급 액션영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웰 메이드 영화가 좋다고 대꾸하면서 그녀의 취향이 B급 액션영화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 그때 우리 그런 이야기했었죠. 맞아, ‘마셰티.’ 그 영화 이야기였죠. 사실 저도 처음부터 B급 영화를 좋아했던 건 아니에요. 결혼 후에 남편이 가끔 보니까 옆에서 따라보다가... 근데 그런 영화들의 매력이란 게 헛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거? 맥락 없이 사람을 난자하더니 사람의 장기를 꺼내서 로프처럼 타고 내려오는 장면이라던가, 상황은 만화 같기만 한데 그 스토리 안에서 너무 진지하게 연기하는 배우들의 그 어설픔? 그런 걸 보며 B급 영화라는 게 굉장히 매력 있는 거구나 했죠. 많이 봤는데 근데 희한하게 제목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나름 어렵고 묵직한 영화들만 골라보던 그녀의 취향도 결혼과 함께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내 인생이 타인의 인생과 만나 합쳐지면 남는 건 물드는 것뿐이다.
“맞아요, 아무래도 같이 사니까 서로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미드도 예전에는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연애물 좋아했는데 이젠 남편 따라서 ‘하우스 오브 카드’, ‘웨스트 윙 ’, ‘뉴스룸’ 이런 거 보니까. 남편이 정치물 좋아하거든요. 언니 그거 봤어요? ‘왕좌의 게임?’ 미드광들이 최고로 친다던데.”
둘이 한참이나 미드에 대해 떠들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나중에 글로 옮기기 위해 녹음파일을 듣다 보면 인터뷰와 별 상관없는 화제들에 더 집중해서 떠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쩝~
“마음에 남는 영화요? 글쎄요... 진짜로 많이 본걸로 말하면 중학교 때 개봉한 일본영화 ‘러브레터.’ 그 당시 VCD를 사서 대사를 외울 정도로 봤으니까, 50번 이상 본 것 같아요. 그냥 그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상도 아름답지만 애틋함이 느껴지고 첫사랑의 아련한 느낌 그런게 좋았네요.”
그밖에 그녀의 취향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강아지, 고양이 모두 좋고 키우고도 싶은데 집 안에서 키우는 건 털이 너무 많이 날린다하여 남편이 반대함. 집에 있는 거 무지 좋아함. 남편 하고 같이 있는 것도 좋은데 혼자 커서 그런지 집에 혼자 있을 때 더 자연스럽고 편안함. 맨날 혼자 있으라고 해도 잘 있을 수 있음. 혼자 있어도 너무 재밌음. 혼자 있을 때는, 드로잉 수업을 듣던 시기엔 그림을 몇 시간씩 그리기도 했고 우쿨렐레 배우던 시기엔 노래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몇 시간 동안 다 치기도 하고, 그러고 놈.>
그녀는 세상에 둘도 없는 남자와 함께 하는 시간도 재밌고 그 남자가 자리를 비워 혼자 있을 때도 재밌다고 말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난 미치도록 재밌게 산다는 그 증언 앞에서도 배가 안 팠다. 이게 다 복근운동 덕분이다.
사진| 전보임간사가 찍은 고양이 사진 중 일부
사진| 드로잉4기 졸업생, 우쿨렐레 15기 졸업생인 전보임간사
빵글이 엄마~
“남편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울까 이런 상상하며 이야기 많이 하죠. 남편의 의견은 ‘결핍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는 거고 나는 그런 건 커서도 알 수 있다, 이왕이면 뭐든지 풍족하고 충만하게‘ 키우고 싶다는 거고. 이런 면에서 좀 부딪혔어요. 근데 생각해보니 다 부질없는 거 같아요. 나중에 다시 이야길 해보니 우리 이야기가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고 또 어차피 아이가 커가면서 그때그때 닥쳐봐야 아는 일들일 텐데요, 뭐.”
그녀가 임신을 하고 아이의 태명이 ‘빵글이’라고 내게 일러주었을 때가 생각난다. 순발력 하나는 확실하게 출중한 난 그날부터 그녀를 ‘빵글이 엄마’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내 마음에는 충만한 느낌이 차올랐다. 태명이 간직한 생명의 기운, 작은 생명 하나가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느낌이란 그런 것이다.
“어떤 엄마가 되고 싶냐구요? 음, 제 결핍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항상 곁에서 사랑을 주는 엄마가 되고 싶어요. 물론 일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해나갈 거지만 되도록 부모하고 애착이 형성되는 시기에는 곁에 함께 있어주고 싶어요. 저희 부모님이 키워주시겠다고는 하는데 그럼에도 제가 같이 있어주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요.”
그녀의 엄마는 40세에 그녀를 낳았다. 말만 들어도 고급스러운 무남독녀 외동딸. 그러나 어렸을 때 부모님과 잠시 떨어져서 살았던 기억, 쓸쓸했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부모님도 돈 번다고 힘드셨겠죠. 이제야 부모님 마음도 보이고... 그렇긴 한데, 그래도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그녀의 눈가에 물빛이 살짝 번진다. 이제 누군가의 엄마로 불릴 준비를 하며 헤아리게 되는 나의 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1위로 뽑힌 그 단어 앞에서 사람들은 대개 눈물을 흘린다. 하나의 생명을 키워내는 일은 그렇게 다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되돌아와 스스로를 성장시킨다. 우주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이로운 순간...
“내 삶은 이랬으면 좋겠어요. 나와 내 가족이 물질적으로 잘 사는 거 말고, 우리가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고 살고 있는 만큼 나와 내 가족도 주변에 도움이 되는 사람,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 그런 삶을 살았으면 해요. 남편도 지금 로스쿨 다니는데 그 사람도 엄청나게 돈을 벌기위해 다니는 게 아니고...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만의 캐릭터, 내가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살다보면 다 계기가 생기고 그럴게 흘러갈 거라고 말하던 그녀에게 또 다시 새롭게 다가온 계기는 느티나무였다.
“올해 신랑이 지지하고 응원해줘서 방송통신대 교육학과에 편입했어요. 아카데미에서 활동하면서 시민교육과 관련해서 배우고 느꼈던 경험들이 계기가 돼서 교육학 공부를 시작했죠. 목표라면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마음? 실제로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컨퍼런스나 이런 데 다니며 시민교육에 대한 다른 차원의 정보들을 접하고 그랬는데 그게 너무 새롭고 재밌었거든요.”
‘나는 미래 계획보다 지금 할 수 있고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한다’던 그녀. 지금은 빵글이 땜에 느티나무를 떠나지만 언젠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더 큰 그림을 그리는 ‘시민교육 전문가’가 될 지도 모르겠다. 빵글이 후다닥 키우고 시민교육 공부도 열심히 해서 빨랑 다시 돌아와야 해, 알았지?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영화를 보다 보면 흔하게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소파에 앉아 낡은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지나온 시간들을 추억하는 씬.
내가 그녀에 대해 기억하는 첫 장면은 느티나무지기 모임이다. 김민수, 정세윤 간사의 송별식을 겸해 모였던 자리에서 하얀 얼굴로 새침하게 앉아 있던 모습. 나중에 물으니 그런 성격의 회의는 처음이라 적응도 안 되고 또 회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좀 놀랐다고 그랬다. ㅎㅎ 맞아, 우리가 좀 회의를 회의스럽게 안 하는 장점이 있지. 그날은 유독 더 웃고 까불고 그랬던 것 같긴 하다. 그래서 별로 웃지도 않고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그녀가 더욱 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첫인상은 그렇게 좀 깍쨍이 같았다.
그 다음 장면은... 음... 아! 그녀가 느티나무 간사로 일하고 두 달 쯤 되었을 땐가, 무슨 일로 한창 그녀와 얘기를 하는데 그녀가 대뜸 내게 반말을 했다. “응, 그러지 뭐.” 이렇게. 순간,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하면서도 속으로는 굉장히 좋았다. 너도 내가 편하고 좋구나, 으흐흐흐. 난 나보다 나이 많이 어린 사람들이 반말을 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그녀에게 ‘반말 고백’을 받은 그날이 유독 기억에 남나보다.
반말을 트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친해졌던 것 같다.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술도 마시고... 그러다 어느 겨울엔가 술자리에 같이 있다 나오며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준 적이 있었다. 홍은동 달동네 언덕을 진짜로 굽이굽이 돌아 끝도 없이 올라가던 그길. 강원도 두메산골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그 공포의 경사길을 올라가며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흥건했던 그 밤. 보임아, 사실 그날 너랑 같이 올라갈 때보다 나 혼자 내려올 때가 더 무서웠었어, 으앙 ㅠㅠ.
그리고 나는 무엇을 더 기억하고 있는가. 간혹 내가 그녀에게, 그녀가 내게 주었던 작은 선물들, 그녀의 어깨에서 앙증맞게 흔들리던 우쿨렐레, 중학교 때부터 쓰던 거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던 눈금이 흐린 낡은 자 하나, 점심으로 싸 오던 단촐한 도시락 그리고...
얼마 전 이번 봄 학기 종강파티가 참여연대 옥상에서 있었다. 준비했던 순서들이 거의 끝나갈 무렵 새롭게 느티나무에 오게 된 간사와 이제 느티나무를 떠나는 그녀를 환영하고 환송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할까? 잘 들어두었다가 인터뷰에 옮겨 적어야지 하고 있는데 몇 마디 말을 하던 그녀가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우는구나, 많이 아쉬운가보구나.
그녀의 눈물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정작 그녀가 하는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 훗날 이날을 떠올리면 해질 녘 참여연대 옥상에서 바라보던 풍경과 마음껏 불어오던 바람과 그 바람에 파르르 떨리던 그녀의 원피스 자락과 그리고 그녀가 흘렸던 눈물들이 기억날까.
사진| 아카데미 느티나무 2014 봄학기 종강파티 모습(상단 우측 전보임간사)
“요즘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빵글이 생각이 젤 많이 나죠. 빵글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래요. 혼자 걷다가도 아, 내 안에 생명이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 빵글이한테 말을 걸게 되더라구요. 날씨 얘기도 하고, 자니? 하고 물어보기도 하고, 노래도 불러주고 그날 있었던 하루에 대해 이야기도 해주고.”
그녀와 함께 해온 시간들을 종이 오리듯 잘라내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압축해내는 작업. 그 안에서 다시 무언가를 더 기억해야 한다면 그건 아마도 그녀와 내가 함께 보낼 미래의 어느 날일 것이다. 서로에게 말을 걸어주며 날씨 얘기도 하고, 빵글이가 치는 온갖 사고에 대해서도 떠들고, 그날은 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며 보낼 미래의 그 평범한 하루 말이다.
아직 오지 않은 그날의 풍경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이 순간, 나도 가끔은 그녀처럼 사는 게 미치도록 재밌다.
우와... 보임간사님 ^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보임간사님 보고 싶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