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박재동 화백의 오픈특강, '만화가 박재동' 탄생의 비밀은? 낙서를 칭찬한 부모
9월 1일 박재동 화백의 오픈 특강을 시작으로 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가을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픈 특강에 참석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래는 프레시안에 실린 박재동 화백 오픈특강 정리기사입니다.
'만화가 박재동' 탄생의 비밀은? 낙서를 칭찬한 부모!
박재동 화백의 '만화로 돌아본 삶과 배움'
만화는 유치하다? 그런 오명을 벗은 지는 오래다. 아직도 청소년들이 만화를 보는 걸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은 만화의 긍정적인 면에 더 주목한다. 학습 만화 시장이 커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만화가 중 한 명인 박재동 화백. 그는 이제 만화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부터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바로 "만화가 책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진화된 형식"이라는 것.
만화와 그림은 글보다 읽는 이가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뿐만 아니라 읽는 이의 상상력 공간이 확장되는 것도 만화가 가진 장점이다. 그러나 글과 그림은 여전히 '따로' 배워야 하는 존재이다.
미술 시간에 글을 쓰거나, 문학 시간에 그림을 그릴 때 칭찬해주는 교사가 몇이나 될까? 박재동 화백은 "초등학교 1학년은 그림일기를 쓰지만 6학년 일기장에는 그림 그리는 칸이 없다"며 "6학년이 그림을 그리면 선생님이 꾸짖는다"며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이처럼 만화가 우리 사회에서 천시됐던 이유를 두고 박재동 화백은 한 가지 원인 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바로 "시험에 안 나오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에 만화가 등장한다면? 아마 태교 풍속부터 급격히 달라질지도 모른다.
지난 1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는 박재동 화백의 강연이 열렸다. 참여연대에서 주최하는 '아카데미 느티나무 2009년 가을 강좌'의 오픈 특강이었다. 고등학교 미술 교사에서 시사 만화가로 또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살아온 박재동 화백이 들려준 강의의 주제는 '만화로 돌아보는 나의 삶과 배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그림을 차곡차곡 모아놓았다는 박재동 화백은 슬라이드로 그 그림들을 보여주며 순식간에 청중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다. 거기에는 만화를 꼭 닮은 그의 풍부한 제스처와 효과음도 톡톡히 작용했다. 그의 이야기는 비단 만화 뿐만 아니라 자녀 양육에 대한 지혜가 담긴 하나의 교육 강좌이기도 했다.
▲ 지난 1일, 서울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는 박재동 화백의 강연이 열렸다. ⓒ프레시안 |
"아이의 낙서는 존재의 표현, 감상하고 칭찬해줘라"
"초등학교 입학 전의 일이다. 너무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다른 도구는 없고, 송곳이 눈에 띠었다. 장판을 찍으면서 그 전날 봤던 바다를 그렸다. 내 자신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자랑스럽게 찍고 그렸다. 집에 오신 부모님이 보시곤 '잘 그렸네'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사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가 6~7살이 되면 주는 대로 그릴 때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선 하나에도 아이는 엄청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자기 나름대로는 너무 자랑스러운 거다. 마치 아기가 울면서 나는 소리를 낼 수 있다고 아는 것처럼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막 발현하는거다."
▲ 초등학교 2학년 당시 박재동 화백이 그린 그림. ⓒ박재동 |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가 그 같은 일을 벌였을 때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아이가 낙서로 어딘가를 어지럽히면, 대개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고함을 지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박재동 화백은 "쉽진 않겠지만, 그럴 땐 우선 아이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감상을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는 행복하고 기쁜 순간이다. 생각해보라, 벽지가 중요한가, 아이가 중요한가. 아이의 행복, 기쁨, 자신감, 표현력의 싹을 벽지 때문에 잘라버리면 다음부터 아이는 주춤한다. 아이가 신나게 그림을 그리는 대신 조용히 앉아 있다면 오히려 더 걱정해야 할 것 아닌가.
그림은 존재의 외침이다. 잠시 감상한 다음에 칭찬하라. 어차피 결과는 같다. 그 다음엔 종이를 벽에다 붙이고 앞으로 여기다가 하라고 하면 된다."
"권총 그려주고 20원 받던 기억…초등학생도 경제 활동 해야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때도 그림을 잘 그렸다. 어느 날 우리반 아이 하나가 나에게 오더니 정중하게 그림 하나를 주문했다. '권총을 하나 그려주면 20원 줄게'라고. 너무 뿌듯했다. '프로'라는 생각이 든 게 그때부터다."
박재동 화백이 두 번째로 강조한 것은 바로 "초등학생도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는 "얼마 전 동네에 사는 한 아이가 10쪽 정도 되는 그림 동화책을 직접 만들어 500원에 팔고, 자기 용돈을 만드는 걸 봤다"며 "그런 아이의 장래는 보나마나"라고 말했다.
박 화백은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사겠다고 할 때, 내가 정말 하나의 작가로 존재한다는 자긍심과 책임감, 사명감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때부터는 누가 굳이 뭘 시킬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은 남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할 일을 잘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꿈꾸는 전시회가 있다. 초·중·고등학생, 일반인 가리지 않고 누구나 와서 자기가 그린 그림을 파는 일종의 '엑스포'다. 큰 돈이 오가지 않아도 된다. 어른이 사줄 수도 있고 친구가 사줄 수도 있다. 얼마나 스스로 존재감을 느끼고 뿌듯해 하겠나. 나 스스로 일해서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줘야 한다."
▲ 박재동 화백의 중학교 일기.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은 그림일기를 당연히 쓰지만 6학년 일기장에는 그림 그리는 칸이 아예 없다"며 "오히려 6학년이 그림 그리면 선생님이 꾸짖는다"며 통탄스럽다고 말했다. ⓒ박재동 |
▲ 박재동 화백이 중학교 1학년 당시 그린 그림. 그는 "이 그림이 나의 첫 풍자 만화였다"고 회고했다. ⓒ박재동 |
"일상이 중단됐을 때 기회가 오기도 한다"
"고등학교 재수를 했다. 시간이 남아서 만화를 그렸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는 그렸는데, 그때 처음으로 114쪽짜리 만화를 그리고 '끝'을 썼다. 이걸 하나 그렸기 때문에, 든든하게 그 시기를 지낼 수 있었다. 계속 되어오던 일상이 중단됐을 때 자기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도 한다."
청소년 박재동은 같은 영화를 몇 번 볼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결국 고등학교 재수라는, 당시로서는 힘든 일을 맞았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때가 자신에게는 성숙의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의 경험은 이후 자녀들에 대한 교육 철학에도 이어졌다.
"초등학생으로만 여겼던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된 뒤, 문득 나 자신의 고1 때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면서 '얜 어른이구나'라고 생각하고 결심했다. 친구로 지내야겠다고.
인도 마누법전에 보면, 자식이 16살이 되면 친구로 대하라는 문구가 나온다. 그때는 이미 독립적 인격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아버지로서 뭘 시키려 하면 반항을 하고 트러블이 생기지만, 친구로 대하면 문제가 없다. 이건 분명 해봐서 안다.
아들이 어느 순간부터 자기 속내를 친구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더라. 그 대화의 맛이 너무 좋다. 가끔 이러다 애를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잘 지내고 있다. 만약에 죽는다고 해도 아이하고의 관계에서는 한이 없다."
▲ 고등학교 재수 시절, 박재동 화백이 그린 만화. ⓒ박재동 |
"요즘 세상 보면 '확 긁어버릴까' 생각도 들지만…"
요즘 박재동 화백은 한예종 교수로 재직하면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힘을 쏟고 있고, 틈틈히 <한겨레>에 '손바닥 아트'를 연재하고 있다. 그의 예리한 시사 만화를 기억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다시 시사 만화를 그릴 생각은 안 드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했다. 그러나 박재동 화백은 "지금도 행복하다"며 "후배들이 매우 잘 하고 있다"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림을 실컷 그리고 싶어서 신문사에 갔다. 미칠 정도로 그렸고 소원이 이뤄졌다. 힘들지만 쾌감이 컸다. 그림이 사회에 영향을 줬을 때 행복했다.
이제 삶을 음미할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옛날처럼 예리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행복하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한 번씩은 확 (펜으로) 긁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부드럽게 해보자 하는 생각도 들고…."
끝으로 최근 정세에 대한 전망을 묻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사실 지금 우리가 언제 민주주의 사회였었나 싶을 정도로 역주행이 되고 있다"며 "요즘 외국에 나가도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소개하지 못할 정도로 자긍심이 많이 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재동 화백은 "나는 근본적으로 낙관론자"라며 "역사는 발전해 왔고, 전진해 나간다고 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힘들지만 멀리 볼 수밖에 없다. 사회가 바뀌길 바란다면 작은 일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작은 모임, 작은 자리에서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뤄나가자. 웃을 때 웃고, 걱정할 때 걱정하면서 조그만한 일이라도 하고 있다면 반드시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