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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실 4강기사] 오건호, "사회 안전망 확보 위해 진보적 복지동맹 필요한 시점"
"사회 안전망 확보 위해 진보적 복지동맹 필요한 시점" |
경제교실 ④ 경제는 민주주의다 -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 |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2003년 민주노총 정책부장으로 일하던 무렵 건강보험료 교섭에 가입자 단체 대표로 참석했던 때를 떠올린다. 요구안은 무조건 보험료 동결.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용자 단체 대표도 같은 요구안을 내걸었다. 완벽한 노사합의였다. 오 실장은 그때 일을 반성하면서 되묻는다. 왜 우리는 보험료 인상을 요구하지 못했을까. 조금만 더 부담하면 혜택이 늘어나고 그 혜택은 결국 모두 가입자들의 몫인데.
- 보험료를 올리자는 요구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것 같은가. 지금도 반발과 불신이 극심한데.
"현실적으로 감세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증세를 이야기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진보진영에서도 자본에게 더 내라고 해라, 또는 나라에서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힘을 얻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건강보험은 회사와 노동자가 반반씩 부담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5조원을 더 내기로 하면 회사가 5조원을 보태서 10조원이 된다. 여기에 정부가 자영업자들 지원 20%를 더해서 12조원 정도가 된다. 5조원을 더 내서 12조원의 혜택을 받는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한 것 아닌가."
- 한때 3만원만 더 내면 무상의료도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흐지부지됐다. 이게 왜 안 되는 건가.
"건강보험의 기본 원리는 능력만큼 더 내고 필요한 만큼 받아쓰자는 건데 상징적인 슬로건에 그쳐서 아쉽다. 구체적인 방안이 안 나왔다. 무상의료 하면 좋은 건 누구나 다 알지만 중요한 건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이냐다. 한때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건강보험공단이 그 해 1조원의 흑자를 내면서서 보험료를 늘리기 보다는 급여를 확대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흘러갔다. 내 호주머니에서 돈이 더 나간다는데 다들 부담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다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건강보험은 그나마 가장 성공적인 공공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성공의 경험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 결국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부담을 늘리는 건 불가피할 텐데 대중의 반발을 어떻게 무마하고 설득할 것인가가 관건이겠다.
"치밀한 기획이 필요할 것 같다. 공공 서비스를 체험하고 그 효율성을 직접 느끼게 만드는 게 좋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직시절 했던 대중교통 체제개편이나 청계천 복원 사업을 봐라. 논란은 많지만 광범위한 호응과 정치적 지지를 얻고 실제로 그게 정권 창출로까지 이어졌다. 건강보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본다. 병원비가 5천만원이 나오든 1억원이 나오든 다 치료해 주는 시대가 되면 그때 사람들이 사회적 연대를 체험하게 되고 무상의료 뿐만 아니라 교육과 노후, 주거 등 공공부문의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거라고 본다. "
- 이른바 각개약진 복지라고 할 수 있겠다. 내 건강이나 노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장 먹고 살게 세금을 줄여달라는 정서도 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지금까지 낸 거 어차피 포기할 테니 앞으로라도 내지 않게 해달라는 이야기도 듣는다. 사회임금이라는 개념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회임금이 충분하면 시장임금에 크게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 국민연금과 기초생활급여, 실업급여, 보육료 지원, 공공임대주택, 요양서비스 등이 사회임금의 범주에 든다. 우리나라는 이 비율이 가계 운영비의 7.9% 밖에 안 된다. 미국이 17.0%, 영국은 25.5%, 일본은 30.5%, 스웨덴은 48.5%나 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은 31.9%다. 사회임금이 열악하면 임금 투쟁에 매달리게 된다. 일자리를 잃으면 빨간 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고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야근에 특근에 몸을 혹사시키면서 일한다. 공적연금이 부실하니까 민영보험에 의존하게 된다. 그만큼 불신과 무력감이 심각하다는 이야기다."
- 건강보험은 그렇다 치고 국민연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 급격한 고령화 때문에 기금고갈은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대로 가도 되나.
"사실 국민연금은 제도 내부적으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처음 설계했을 때 고령화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진행될 거라고 예상을 못했고 도입 초기에 국민들 반발을 우려해서 급여도 후하게 책정됐다. 국민연금은 죽을 때까지 받기 때문에 수명이 이렇게 늘어나면 국민연금의 재정부담은 정말 커진다. 그렇지만 기금고갈은 정확한 개념이 아니고 우리 다음 세대의 부담이 커진다고 보는 게 맞다. 일부에서는 소득의 40%까지 보험료로 내야할 거라는 암울한 전망도 있지만 2007년 법개정으로 급여율이 낮아져 실제로는 20% 수준이라고 본다. 연 금에서 문제의 본질은 고령화가 아니라 노인의 경제활동참가이다. 만약 노인이 일을 더 할 수 있어 급여를 받는 시점을 늦출수 있다면 연금재정이 상당히 호전될 수 있을 것이다."
- 기금 소진은 40년쯤 뒤고 문제는 그때까지 과도한 기금 적립도 문제 아닌가. 이 엄청난 기금이 생산적인 부문으로 흘러가지 못하고 채권이나 주식투자 등에 몰려서 거품을 부풀리고 경제의 역동성을 저해할 우려도 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기금 운용은 수익성 중심이 아니라 안정성 중심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당장 수익률 올리기는 좋겠지만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들어가면 가격이 뛰고 국민연금이 빠지면 가격이 떨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진다. 벌써 채권시장 점유율이 25%, 주식시장 점유율이 5%나 된다. 채권시장 성장 속도보다 기금적립 속도가 더 빠르다. 일단 주식 투자는 어느 정도 늘릴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데 투자할 데가 없으니까. 해외 투자?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보다 더 좋은 시장은 없다. 뭐하러 다른 나라에 투자하나. 주식에 투자하되 사회적 책임 투자를 해야 한다. 고용을 창출하고 환경을 고민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주주가 되자는 이야기다."
- 국민연금 기금이 수천조원 쌓일 텐데 좀 더 생산적인 부문에 투자할 수는 없나.
"무엇보다도 실물 투자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정부 재정으로 부족한 공공 서비스의 재원을 국민연금 기금으로 활용하자는 이야기다. 정부가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수익형 민자사업(BTO)이나 임대형 민자사업(BTL)을 벌이는데 여기에 국민연금을 참여시킬 수 있다. 이를 테면 보육시설이나 교육시설, 노인 요양시설 등을 짓는데 쓸 수 있다. 채권 수익률 정도 또는 공익적 성격을 감안해 그 보다 좀 더 낮은 수익률을 보장해 줘도 된다. 전국의 유치원을 모두 사들여서 정부에서 무상으로 운영할 수도 있다. 국민연금 급여를 받기까지는 20년 이상을 기다려야 되지만 이렇게 되면 바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 복지천국이라고 불렸던 스웨덴만 해도 복지혜택을 축소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복지 혜택을 늘리는 일이 결코 쉬울 것 같지만은 않다.
"케인즈주의 복지국가의 전제조건은 국민들이 적절한 소득이 보장돼야 한다는 거다. 충분한 세금을 내고 이를 사회임금으로 돌려받는 선순환 구조가 돼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극단적인 양극화 때문에 절반의 노동자들이 겨우 먹고 사는 형편이다. 공적 재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 사회임금 시스템도 척박하다. 스웨덴 모델을 무작정 들여온다고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는다. 분배구조와 생산구조를 한꺼번에 바꾸는 전략적 기획이 필요하다. 동유럽의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했고 아직 다른 시스템은 없다.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 한때 사회적 대타협 논쟁이 유행했었다. 스웨덴은 1938년 찰츠요바덴 협약을 통해 사회연대 임금제도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을 도입하고 세금을 파격적으로 늘려가면서 광범위한 복지모델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정치적 상상력은 실현 불가능한가.
"어려울 거라고 본다. 사회적 대타협은 철저하게 투쟁의 산물이다. 권력이 매개가 돼야 한다. 스웨덴은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자본가 그룹이 체제 전복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노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무슨 타협이 되겠는가. 타협이 가능하려면 정부가 소유권 규제를 해야 한다. 권력이 주체가 돼야 한다. 진보세력이 권력을 잡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과도기적으로 부분적인 사민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가능할 거라고 본다. 자본가 그룹에 세금을 더 많이 내라고 압력을 넣을 수도 있고 그걸로 복지를 확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대중의 조직적인 요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 지난해 촛불시위의 경험을 돌아보자. 100만명이 거리에 나왔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성취의 경험은커녕 무력감만 더 커진 측면도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공성의 복원이 가능한가.
"일단 한번도 있었던 적이 없으니 복원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고. 촛불은 다시 타오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바닥이 젖어 있는 상태다. 사회적 연대보다는 개별적인 생존이 더 절박한 과제다. 대안세력도 없다. 그런데도 다시 촛불에 불을 붙이는 건 이명박 정부가 될 거라고 본다. 참기 힘든 상태가 계속되고 다시 촛불을 들게 되면 그때는 공공성 이슈가 전면에 나설 수 있을 거라고 본다."
- 구체적으로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나.
"공적보험을 확대하기 위해 민영보험을 깨뜨리는 운동도 필요할 것 같다. 민영보험 안 들기 운동도 가능하지 않을까. 민영보험에 지출하는 돈 3분의 1만 있어도 무상의료가 가능하다. 민영보험을 깨뜨려야 공적보험을 확대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워낙 취약하기 때문에 지역운동을 중심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성공의 경험이다. 무상의료, 무상보육, 무상교육, 노후복지 등이 확대되는 걸 보면 대중에게도 강력한 권력의지가 생길 거라고 본다. 권력을 위탁하지 않고 직접 권력을 행사하려는 욕망이 생겨날 거라고 본다. 복지 확충과 관련해 온갖 요구들이 있지만 이를 단일한 의제로 응축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사회임금을 15%까지 복지 재정을 110조원까지 늘리라고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진보진영과 시민사회운동을 규합해 광범위한 복지동맹을 구축할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