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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가 하였더니 다시 길
새벽에 눈을 떴다. 요즘은 새벽, 이 시간쯤에 자주 잠에서 깬다. 다시 눈을 감았으나 쉬이 잠들지 않는다. 꿈은 종종 그랬던 것처럼 눈을 뜨자마자 뽀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 잠에서 깰테니, 너 거기 잠깐만 있어’ 라고 부탁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꿈은 하늘과 땅의 거리보다 더 멀리 가버렸다. 무언가 차곡차곡 서랍 속에 쟁여넣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님 켜켜이 서랍 속 무언가를 꺼내는 것 같기도 한데...아무튼 꿈은 미련 가득한 내 곁을 미련없이 홀연히 떠나 버렸다. 이러다가 문득, 꿈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세수를 하고 로숀을 바르다가, 옷장 문을 열다가 혹은 출근하다 신호대기 중 건너편에 붙은 광고 플래카드의 ‘OO가구점’ 글자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가구?...아하’ 기억이 살아날 때가 있다. 뿌연 안개 속 깜깜한 장막이 걷히고 곧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럴 땐 마치 잃어버린 내 소중한 보물을 찾은 것처럼 흥분된다.
십여 년 전쯤 부산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고혜경 선생님의 그룹투사 꿈작업 강좌를 접하게 되었다. 열 명 남짓 사람들이 둘러앉아 각자의 꿈을 나누고 원하는 한 사람의 꿈으로 그룹 투사를 하는 과정은 나에게 낯선 광경이었다. 교양과목으로 ‘꿈분석’을 수강한 이후부터는 가끔 꿈을 기록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꿈으로 무의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구체적인 작업이 얼마나 흥분되고 경이롭던지... 그때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꿈을 더듬어보며 음미하는 일이었다. 어떤 날은 너무 선명해서 생시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기억이 흐릿해 안타깝기도 하고, 가물 가물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혹시라도 남아있는 어떤 이미지나 느낌을 한 가닥 붙잡고는 음미하며 잠잠히 있어 본다. 그러다가 운 좋게 꿈이 다시 돌아와 주면 얼마나 흥분되는지 모른다. 꿈을 기록하다 보면 등장하는 인물이 나의 무언가와 연결되기도 하고 사물을 통한 직관이 올라오기도, 혹은 동물에게서 나의 숨겨진, 아니 숨기고 싶은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의식세계에서 외면하고 검열하여 내 것이 아니라고 밀쳐두었던 감정이나 욕구들을 적나라하게 보는 순간은 속물같은 내 모습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지만 그 낯선 나를, ‘또 다른 나’로 수용하기까지 겪는 나름의 아픔은, 그런 나를 인정한 후에 내게 주어지는 선물, 존재의 자유로움에 비하면 견딜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이 경이로는 세계를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쯤 고혜경 선생님의 ‘꿈에게 길을 묻다’를 읽고 그룹투사 꿈작업 모임을 해 볼 용기를 내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투사작업을 하는 것이 혼자보다 훨씬 풍성한 ‘아하’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용감하게 모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구심점 역할을 내가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때늦은 후회를 하던 날, 초록색 잎이 풍성한 나무에 빨간 열매 하나가 달려 있는 모습을 담장 너머로 스쳐 지나가며 보는 꿈을 꾸었다. ‘빨간’ 열매는 하루 종일 나와 함께 했고, 모임의 가이드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건 또 다른 나의 페르조나였음을 깨달았고,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꿈이 스스로 그 역할을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로 모임은 계속 이어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고혜경 선생님의 그룹투사 꿈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램(공지를 보고 신청하려고 하면 이미 마감!!)이 하필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내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간절함이 없었다면 이번 봄학기는 포기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언제나 내가 계획한 대로, 결정한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의 틀(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시기고 바빠. 새로운 변화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이 시점에서 또 새로운 공부를 하기는 힘들어. 그러니 다음에 여유있을 때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편한 마음으로 하자. 이번에는 포기하자!!)이 박살나는 경험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세계에서 눈을 돌려 새로운 세계에 한 발 들이미는 경험은 고통없이는 불가능한 일일테니 말이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힘들거나 지치거나 혹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오늘 밤 꿈은 나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생각하면 내가 타인이 되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궁금해진다. 또 다른 내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