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4강 한국인의 몸과 마음
[한국 근현대의 시간, 공간, 사람] 4강 한국인의 몸과 마음
; 새로운 역사 –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역사 후기
1. 옛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
근대 이전의 사람들은 인간은 몸과 마음이라는 2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고 각각을 달리 봤다. 고대의 성인들이 고행과 단식을 통해 몸을 학대하면, 마음의 영역이 극대화되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몸은 유한하며 성장하다 늙고 죽는 것. 반면에, 마음은 불멸하고, 계속 성장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러한 몸과 마음에 대한 관념은 더 나아가, 몸은 소멸하는 것, 동물적 욕망 덩어리로서 죄악을 상징하게 되었고, 마음은 신과 합일할 수 있는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고정된 몸에 관심을 갖기 보단 계속해서 변화시키고 성장할 수 있는 마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2. 옛사람들의 관심 : 마음 가꾸기
몸은 헛된 것이고 타고 나는 것이므로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의 발전은 마음을 가꾸는 것을 통해 가능하고 믿었다. 마음을 가꾸는 것은 마음 수련 등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마음의 수련은 몸의 학대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러한 마음 수련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목표점에는 신과의 합일이 있었다. 이 관념의 전제에는 사람다움이라는 것이 동물(罪)과 신(善)의 중간에서 부유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 존재를 ‘신‘에 가깝도록 만드는 것이 마음 수련이었던 것이다.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 治國平天下(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도 이러한 의미에서 誠意正心을 통한 修身을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은 옛사람들이 마음수련에 치중하게 했고, 신에 가까워지는 것은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마음은 숭고한 것이고 몸은 비천한 것이라는 구분으로 이어졌다. 고려, 조선 등에서도 ‘부귀자는 내과, 빈천자는 외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몸과 마음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이 강했다.
3. 몸, 독립하다
그러나, 근대의 혁명적 시간을 겪으며 인간의 몸과 마음에 대한 관념은 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 유럽의 종교적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붕괴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슨 중세 기독교가 천명하고 있던 하늘, 땅, 그리고 인간에 대한 생각이 심한 반증과 반박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1543년,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운동에 관하여”라는 논문은 기존의 생각(‘지구는 중심이고 하늘은 동그랗다‘)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하늘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또한 콜럼부스는 ‘유럽의 입장’에서 아메리카를 ‘발견(?)’함으로써, 기존의 생각(‘땅은 평평하고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어 끝까지 가면 지옥으로 떨어진다‘)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중세 기독교 세계관의 붕괴가 진행되면서, 인체 해부에 대해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에 반기를 들고, 직접 인간의 몸을 탐구해보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컨대, 베살리우스의 해부학혁명이 있다. 인체의 탐구는 인체를 재발견하게 했고, 인간의 몸도 유기체이며 기계처럼 이루어져 있다는 관념이 시작된다. 인간관에 대한 변화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더욱 강력해진다. 요컨대, 종의 기원은 ’인간은 동물이고,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은 다르지 않다.‘라는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 몸의 탐색과 재발견은 몸의 가치를 인식시켜줌으로써, 기존의 관심(몸<마음)을 ‘마음보다 몸에 대한 관심’으로 변화시킨다. 즉 몸의 느낌과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고 긍정적이라는 인식이 점차 환영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회화에서는 몸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나타나고 몸을 보는 도구의 발전도 나타났다. 그 도구는 대표적으로 유리거울이었다. 옛사람들은 ‘마음’이 보이지도 않고, 자기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근대 이후 유리거울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4. 한국인의 몸과 몸에 대한 생각의 변화
서양의학이 전래되기 전 한국인의 몸에 대한 관념도 서양의 것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몸은 고정된 것이고 죄악 덩어리였다. 마음은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이 선해지기 위한 방법은 이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었다. 몸이 아픈 상태인 질병이 나타나는 것도 마음과 관련이 있는 것이므로 마음 수련(양생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봤다. 질병이 심해져 손 쓸 수가 없을 때는 무당을 부르는 등 영적인(마음에 관련한) 활동을 통해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고 봤다. 예컨대 한민족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질병인 천연두등을 하늘의 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서양의학이 전래되고 질병은 귀신 등 마음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병균이 침투해서 생기는 것이라는 인식도 전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질병의 치료에 있어, 의학과 무당의 총성없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후 근대화의 진전은 질병의 치유가 ‘양생‘이 아니라 ’위생’으로 가능하다는 생각이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개인위생과 청결의 수단인 ‘목욕‘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목욕탕, 찜질방 등의 등장과 보편적 확대는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공공적으로는 거리청소, 환경미화가 시행되고 정착된다.
5. 좋은 몸 관점의 변화
서구에서 전래된 몸에 대한 재인식은 한국인들의 생각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기존의 좋은 몸에 대한 관점도 급변하게 되었다. 즉, 좋은 몸은 ‘노동과 굶주림의 흔적이 없는 몸‘에서 ’단련된 몸‘으로, ’뚱뚱하고 풍만한 몸‘에서 ’날씬한 몸’으로 급변했다. 이제! 마음보다는 몸에 대해 더 많은 신경을 쓰고, 그 몸을 가꾸는 일이 아주 중요해졌다. 몸을 움직여 단련하는 것이 고행이 아니라 운동이 된 것이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개인의 몸을 단련시켜 국력의 발전을 꾀하여, 체력단련을 권장했다. 몸 꾸미기는 ‘운동‘에 그치지 않았다. 현대 ’의복‘의 다양화와 발달은 나의 몸을 치장하고 가꾸는 수단으로 나타났고, 의복은 개인의 자아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더불어, 인간의 수명에 대한 관점도 일대 변화를 겪는다. 기존에는 인명은 재천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수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몸에 대한 재인식‘은 수명이 전적으로 하늘에만 달린 것이 아닌 인간의 관리로도 연장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6. “내 몸이 나다“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있다. 허나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몸은 볼 수 있는 것이다(유리거울의 역할이 매우 크다).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과 타인에게도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는 ‘몸’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많은 현대인들의 생각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매스컴의 발달과 이를 통해 보여지는 유명 연예인들의 모습은 ‘좋은 몸’의 관점이 변한 결과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매스컴의 환경에서 많은 현대인들은 거울 속의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몸을 가꾸려한다. 압구정역에 즐비한 ‘성형외과’와 ‘헬스장’은 우리시대의 ‘몸에 대한 생각’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