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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학교, 인도의 과거, 인도의 오늘> 2강 인도 역사의 이해
인도는 '인더스 저편의 땅'이라는 뜻으로 인더스 강 서쪽에 자리한 서양이 바라본 대상이자, 타자의 시선이 만든 상상의 나라였다. 그리스인이 처음으로 호명한 인도라는 상상의 공간을 구체적 국가로 만드는 작업은 근대에 또 다른 서구국가 영국이 마무리했다. 그들에게 인도는 늘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황금의 나라', '부의 땅'으로 알려진 그곳을 찾아 일찍이 알렉산더가 군대를 이끌고 인더스 강을 건넜고, 페르시아와 터키, 아랍, 아프간, 스키타이, 몽골의 세력들이 그 뒤를 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인도로 가는 육로가 막히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는 해상을 통해 '검은 황금인 향료'의 산지 인도를 찾아 떠났다. 콜럼버스는 여행에 실패하여 카리브해 주변에 서인도를,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 목적지에 도착한 가마는 동인도라는 이름을 남겼다. 가마의 길을 따라 인도에 도착하여 그곳에 있는 여러 나라의 내정에 깊이 연루되면서 영토의 확장과 '돈벌이'에 나선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벨기에 등의 선발대가 모두 동인도라는 이름을 가진 건 그 결과였다.
그 정치적 투쟁의 장에서 패권을 차지한 영국은 유럽대륙만큼 큰 그 식민지를 '영국령 인도(British India)'라고 불렀다. 곧이어 영국의 통치에 저항한 그곳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지리적 수사를 받아들여 '인도국민회의'에 차용하면서 귿르이 세울 미래의 국가를 '인도'라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7년, 2세기에 걸친 굴욕을 마감하고 영국에서 해방된 그곳은 사상 처음으로 인도라는 국명을 갖게 되었다.
인도라는 이름의 역사가 그렇듯, 인도는 늘 타자에게 목도되고 정의되었다. 구비 전통을 가진 인도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명상의 나라, '하늘 호수의' 나라 등 인도에 대한 모든 수술은 외부(타자)의 창작물이었다. 고대에는 긍정적 측면이 강했지만 근데에는 부정정이고 열등한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한 묘사는 서양의 타자성과 서양과 다른 열등한 인도를 강조하는 식민주의의 '힘'과 관련되었다. '비합리적이고 타락한 어린애'와 여성적인 인도는 '합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성숙한' 서양 남성의 통칠르 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였다.
인도를 통치한 영국은 피지배자 인도와의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도를 열등하고 야만적인 사회로 그렸다. '인도라는 나라는 없다'라면서 인도를 지역과 종교, 인종, 카스트로 분열된 사회로 묘사하고, "우리의 지배를 받는 것은 너희들이 분열했기 때문이다"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비역동적인 '힌두교'와 차별적인 카스트제도를 인도의 특성으로 만들고, 카스트를 사회 발전의 걸림돌로, 인도 역사를 종교의 나라로 채색하였다. 불변의 인도, 힌두/무슬림의 갈등도 내재적 특성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과 이해는 역사 없는 인도와 '문화적 측면'의 인도를 강조하였다. 특히 수천 년간 지속되었다고 가정된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는 헤겔이 말한 '불변의 인도'를 예증하고 인도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충분자료로 쓰였다. 인도를 종교(힌두교)와 문화의 나라로 여기는 것은 곧 인도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무능하다는 은유였다. 이는 인도인의 역동성과 생존능력, 곧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역동성을 소지하고 역사를 가진 영국의 지배를 정당화한 근대서구가 만든 역사서술의 결과였다. 영국은 역사 없는 인도에 역사와 근대, 진보를 도입한 셈이었다.
종교적 인도와 정신주의적 인도, 역동적이고 물질적 서양의 반대명제인 그 이미지는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발전한 나라의 미디어는 요가, 갠지스에서 목욕하는 성자, 신비주의, 불가촉천민을 보여주면서 종교에 찌든 낙후한 인도의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한다. '인도의 영광은 힌두교가 번성한 고대와 전통에 있다' '인도인은 운명에 순응하며 모든 일상이 종교와 연결된다.' '인도인은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무역사적이고 무력한 이미지로만 박제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