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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5) 메데이아
10월 19일 김만권 선생님의 강의에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가 주제였습니다. 에우리피데스는 다른 극작가들과 달리 비극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는 신, 도시, 인간 보다는 ‘인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간 내에 있는 사악함 보다는 시기심이나 질투와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연애, 질투, 복수, 간계, 광기, 비애)들을 자신의 극에서 많이 다루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극 안에서 사건이 전환 되었을 때 인물의 어두운 측면을 잘 그려냈다는 뜻으로 이해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들은 운명이나 신에 대한 순응보다는 인간의 합리성으로 이 세계의 부조리를 폭로했다는 점 때문에 비극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비극의 3요소를 제대가 갖추지 않았다는 비판입니다. 그래서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극 경연대회에서 몇 번 밖에 수상을 못했고, 결과론적으로 공적인 지원을 받아 비극을 상연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하기도 합니다. 다만, 그리스에서 상연횟수를 비교하면 다른 극작가들의 작품보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훨씬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에이루피데스의 메데이아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적지 않은 막장요소가 가미 된 작품입니다. 남편이 외도를 한 것도 모자라 가족 간에 배신과 질투가 난무하고 종래에는 엄마인 메데이아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문학적으로만 읽는다면 메데이아는 인간의 배신과 질투가 만들어 낸 가족 복수극이며 인류 최초의 막장 드라마로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정치적으로 읽는다면 “사랑이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작품 안에서 사랑 때문에 발생하는 비극적인 상황들이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극에서 메데이아는 사랑 때문에 가족을 배신하고, 더 깊은 사랑이 찾아와 기존의 사랑을 버리고, 사랑 때문에 형제를 살해하고, 사랑하던 이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 때문에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복수와 거짓말을 하고, 사랑 때문에 이성을 잃기도 합니다. 이아손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해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이러한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사랑을 기반으로 한 관계는 사랑이 허물어 질 때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둘 간의 사랑이 컸던 만큼 사랑이 무너졌을 때의 배신감과 그 배신감을 시작으로 한 연속된 비극은 가늠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메데이아가 크레온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뱉은 탄식(아아, 사랑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불행을 안겨주는가?)과 메데이아의 불행을 바라본 코러스의 대사(사랑이 너무 격렬하게 다가오면 사람들에게 명성과 명예를 가져다주지 않는 법)는 사랑의 불행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사랑이라는 이런 양날의 검이 정치의 기반이 된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과 정치에 관하여 “사랑은 정치의 기반이 될 수 없다. 너무 사랑하면 객관적인 거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반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거리를 두고 인정하는 우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을 좋아하고 또 모방하기도 했던 세네카는 사랑에 대하여 “사랑이란 감정 자체를 절제 할 수 없고 그래서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만권 선생님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모든 신뢰를 무너트리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복수하는 과정에서 거짓말을 서슴없이 한다고 합니다. 또한, 메데이아 자녀살해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랑이 무너졌을 때 사랑하는 이와 만들어낸 것의 파괴(자실살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시스템에 대한 파괴적 열망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