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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으로 그리스 비극 읽기](2)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앞으로의 강의를 개괄한 1강에 이어 2강 시간엔 고대 그리스 비극 첫 작품으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를 다뤘습니다.
아이스킬로스는 지금까지 작품이 전해져내려오는 비극 작가 중 한명이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비극 3부작으로 만들었습니다. 잘 알려진대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줬다는 이유로 제우스에 의해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먹히는 형벌을 당합니다.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이후 헤라클레스를 낳는 이오와 조우해 제우스의 불길한 미래를 예언하고, 마지막엔 바위 전체가 붕괴해 깔리는 (익숙한) 전개를 그대로 따릅니다.
정치철학적 시각에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참주정'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참주정은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지만) 오늘날 독재정치의 형태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형벌을 가한 제우스는 다른 신들과 인간 위에서 전지전능한 수준으로 힘과 폭력을 휘두르는 참주가 됩니다. 때문에 첫 대목에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는 같은 혈육인 프로메테우스를 자기 의지에 반하여 바위에 묶게 됩니다. 이때 추상적 개념인 '힘과 폭력'이 무대 위 등장인물로 형상화되어 헤파이스토스에게 제우스의 명령을 따르라고 협박합니다. 정치의 수단이 '말'인 반면 참주가 즐겨 쓰는 수단은 힘과 폭력이며, 연민의 감정이 없고, 권력의 편에 서는 등의 특징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반면 오케아노스처럼 제우스에게는 반대하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에게 제우스에게 복종하라고 설득하는 신도 등장하고, 제우스에게 적극적으로 순종하면서 프로메테우스에게 더 큰 파국을 경고하는 헤르메스 같은 신도 등장합니다. 이들 신들은 참주정치 하에서 지식인들이 취하는 다양한 태도(저항/소극적이고 나약한 순종/노예와 같은 복종 등)를 드러냅니다.
한편 프로메테우스가 만나는 이오는 제우스에게 유혹을 받았으나 헤라의 질투로 인해 먼 길을 떠돌고 있는 중입니다. 이오는 참주가 사랑하는 여자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는지를 보여주는 경우로, 참주의 사랑을 얻은 결과가 다른 이들의 시기와 질투에 시달리는 것임을 경고하는 캐릭터입니다. 또한 비극에 늘 등장하는 코러스들은 이 작품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사연을 들으면서 그에게 연민을 드러내고,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가 프로메테우스의 비극적 운명을 함께 당하게 됩니다. 이들은 참주의 통치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그에 함께 맞서는 도시의 시민들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에서 참주정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참주정 하에서는 오로지 참주만 자유를 누린다. (2) 모든 사람은 노예다. (3) 참주는 배신을 일삼고 친구를 비롯해 아무도 믿지 못한다. (3) 자의적으로 법과 정의를 행사한다. (5) 정치가 책임에 대한 담론임에도 불구 참주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6) 모두가 자신을 사랑하길 원하고, 프로메테우스 같은 다른 이가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기 권력에 위협이 되는 일을 참지 못한다. (7) 헤파이스토스 같이 참주를 돕고 따르는 자도 위험에 처한다. (8) 참주는 말을 통치 수단으로 쓰지 않으므로 말이 통하지 않고 설득당하지도 않는다. (9) 참주를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고통을 주고 이오 같이 참주가 사랑하는 이들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공포를 퍼뜨린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같은 참주에게 저항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참주에게도 바른 조언을 하는 게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지식인은 고난을 자초하고 그가 도운 시민들로부터 외면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역할에 충실헤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참주에게 순종할 때 지식인이 처하는 가장 큰 불행이란 자기보다 못한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역시 그런 지식인의 예입니다. 플라톤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먼저 동굴에서 풀려나 태양빛을 본 지식인은 진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그림자만을 보고 있는 동굴 속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려고 동굴로 돌아갑니다. 또한 플라톤은 (민주정이 아니라) 철인 통치를 선호했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배자가 철학을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참주 디오니시오스를 찾아가 정치적 충고를 전했다가 분노를 사 노예로 팔리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속 지식인상은 이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와도 연결됩니다. 죽음을 비켜가려고 했다는 이유로 저승에 끌려간 시지프스는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계속 밀어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찾기 위해 산 속 동굴에서 수련하던 차라투스트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화를 빚음에도 사람들의 저잣거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합니다. 모두 현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계속 변화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는 인물들입니다.
현재의 문제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는 대개 '그렇게 해도 소용없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회의론에 부딪힙니다. 이는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운영, 시민운동 등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동굴의 비유, 차라투스트라, 시지프스 등을 통해 우리는 '비효율성'의 몰락을 자초하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이들이 받는 고통은 '무엇을 해야 옳은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사건들이며, 나아가 정의가 곧 비극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는 감상도 갖게 합니다. 또한 '변화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변화를 추구하는 목적 자체를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