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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1강
잊혀진 혁명가들 : 조선 공산주의 운동과 인물들 1강
6월 29일 수요일,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가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진행됐습니다. 여유를 두고 준비한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수강하셔서 시종일관 열기가 느껴졌습니다.
이날 강의를 통해 조선시대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오해와 실제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 아래는 박노자 선생님의 강의를 필기한 내용을 정리합니다.
왜 조선 공산주의인가
식민지시대의 공산주의와 조선의 공산주의는 다른데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중국과 더불어 조선이야말로 혁명적으로 공산주의가 발현된 나라였다고 평가했으며 조선 공산주의의 운동역량에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1925년 4월 20일 조선 공산당 창당 이후 당원은 400명 정도였습니다. 당시 인구에 비해 활동하는 공산당원의 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많은 탄압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친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대부분 사회주의에도 친화적이었습니다. 수는 적었지만 영향력 부분에서는 작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조선의 공산주의는 대중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에서 있었던 친 공산주의자들 덕분이었습니다.
당대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위해 우리는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조선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
첫 번째 오해는 공산주의는 망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현재까지 실제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통치층이 상당부분 계승되기도 했으며 러시아는 소비에트 체제로 가야한다는 것에 50% 이상이 동의를 하고 있습니다. 망했다는 표현이 아닌 혁명이 보수주의 체제에 젖어들어 자본주의 체제에 영입되었다고 봐야할 겁니다.
두 번째, 공산주의 자체가 유토피아를 설정하고 시작된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하지만 당시 실제로 구체적 계획이 논의됐었으며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으며 조선의 독립에 대해서도 얘기할 정도로 대중적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혁명가들을 통해 오해와 실제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현실적, 구체적 상황인식
1) 조봉암
화요계로 유학파 출신이었으며 원칙주의자에 계급이념이 투철했습니다. 1925년, 그는 조선혁명해서 공산주의, 민중민주주의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앞섰다고 평가를 받았고 결국 강령을 수정했습니다. 민족혁명을 통해 독립을 하고 민주혁명을 통해 85%의 농민에게 토지를 재분배 하자는 주장을 했고 이는 당시 다수 조선인들이 생각했던 새로운 세상의 모습이었습니다. 당시의 공산주의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2) 박헌영
박헌영의 “8월 테제”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토지를 민중에게 돌려주고 대규모 자본을 국유화 해 운영해야 하며 친일파를 압박해서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민주민족혁명에서 근대적 기초를 쌓아 공산혁명을 이뤄야 해방이후에도 유지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좌파와 우파에게 동시에 비판을 받았습니다. 좌파에게 두 단계 혁명은 덜 급진적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간 연속된 혁명이 아닌 한 나라에 국한된 혁명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패착인 지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는 재분배 체제이며 핵심부의 노동자들은 국민국가가 먹여 살리는 구조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최근 브렉시트만 해도 65%의 노동자가 찬성했는데 이는 국민국가 안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싶다는 욕구 때문입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다양한 시선
3) 이재유
이재유는 국내파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민주주의민족혁명 단계에서 사형제 폐지와 반노동악법 폐지, 정치집회의 자유 등과 함께 노동자들의 경영참여를 요구했으며 이를 슬로건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30년대 노동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슬로건에는 학생들의 교과서 선택의 자유와 의무적 종교교육 폐지 등이 있었으며 노동자들의 노조결성의 자유와 노동자 경영참여, 동일노동 동일임금, 1년 단기계약제 폐지 등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1930년대 주장들은 지금도 실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얼마나 구체적으로 공산주의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는지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재유는 조선의 독립요구와 함께 국제적 연대도 함께 주장했습니다. 소비에트 독립사수와 대만의 독립촉구, 일본노동대중과의 연대 등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국제연대는 공산주의자의 조건일 뿐 양상은 다양했습니다.
4)김찬
김찬의 경우 국제연대에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민족의식이 뚜렷한 민족적 공산주의자로 분류됐습니다. 이미 1925년 조선 공산당 창당시절부터 일본 공산당과의 협력에 비공식적으로 반대를 했으며 일본 공산당과의 제휴는 일본주의에의 항복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5) 김천해
김찬과는 대비되는 노동자 출신으로 일본에서 노동자로서 이해관계에서 시작됐습니다. 국제연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일본과 노동 연대투쟁을 했으며 1국 1당의 코민테른의 원칙 또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 공산주의와 코민테른의 관계
6) 조동호
조선공산당 제1대회에서 코민테른에서 공산당 대표자로 선출된 조동호를 통해 조선의 공산당과 코민테른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었는데 이는 지원금 신청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조동호는 코민테른에 민족차별, 경찰폭압, 동양척식회사, 농민의 몰락 등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코민테른의 조선 관련 의식은 이와같은 조선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보고서를 종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코민테른은 조선의 조선인들과 연해주의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전달받았습니다.
(당시 공산주의는 현대판 사대주의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자는 험한 길이었으며 혁명가들은 애국을 하기 위해 스스로 공산주의를 택했습니다. 그들에겐 조선해방이 가장 큰 목적이었습니다. 단 모스크바와는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였습니다. 코민테른과 조선의 공산당은 주체적 관계맺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대주의가 아닌 지식과 돈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코민테른은 정세에 맞는 정책을 지시했으나 1930년 초반 이후 코민테른이 스탈린의 외교적 도구로 전락하면서 역기능이 심화됐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성취와 한계
식민지 시대 공산주의 운동은 타 아시아의 공산주의 운동과 달리 성공이 어려웠습니다. 1920~30년대 조선이 일본 치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시행착오를 거쳐 합리적인 선택을 했으며, 농민과 노동자 사이에 공산조직을 심고, 민중 공산주의 조직을 심고, 좌파이념의 대중화에 중점을 두고 결실을 맺었습니다. 운동가의 대부분 해방이후 운동에 긴밀하게 연결됐으며 진보당을 이끈 조봉암을 포함해 70년대 급진운동의 동력이 됐습니다. 당시 혁명가는 공산운동 출신이거나 식민지시대 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조선 공산주의 운동은 장기적으로 급진 운동의 씨앗을 뿌렸고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제연대노선은 합리적이었고 국내에서는 대중노선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람직한 조선의 미래는 지금도 획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근대화 시도는 북조선에서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한은 현재도 시도의 필요가 얘기되고 있을 뿐입니다. 민주민족혁명 또한 지금도 대한민국이 독립된 민족국가라 보기 힘듭니다. 전근대적 세상에 대한 바람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1951년 조선이 독립하고 조선인들이 민주적으로 5년을 신탁통치하고 이후 대통령을 뽑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자연스럽게 좌파적 근대화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