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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례특강]성평등, 한국 민주주의의 교묘한 장식품이자 의도된 건망증(한채윤)
아카데미느티나무 6월 월례특강 후기 (윤채영)
요즘 한국은 ‘여성 혐오 범죄’와 ‘성폭력’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늘어났다.’고 말하지만 한 여성학자는 칼럼에서 ‘원래 있어왔는데 이제야 보이게 된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협박도 여성을 향한 폭력과 협박도 늘 있어왔지만 요즘 달라진 것은 협박에서 끝나지 않는 다는 겁니다. 국경을 초월한 젠더문제와 성평등 이슈. 어디서부터 알아가야 할까요?
6월 13일 월요일 저녁, 한 채윤(비온뒤무지개재단 상임이사)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성평등, 한국 민주주의의 교묘한 장식품이자 의도된 건망증”이라는 긴 제목을 가진 강의였습니다. 성평등이 교묘한 장식품이자 의도된 건망증이라, 그 뜻이 잘 짐작되지 않았습니다만 왠지 느낌적으로 ‘맞는 것 같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강의는 ‘성평등’이라는 말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부터 짚었습니다. 예전에는 공무원들이 ‘양성평등’이 ‘여성이 남성을 맞먹으려 하는 느낌’이라며 그 대신 ‘성평등’이라고 써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성평등’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와 맞먹으려는 느낌’이라며 대신 ‘양성평등’이라고 써줄 것을 요청한다고 합니다. 오락가락 하는 것 같이 보이는 두 반응에서 공통적인 것은 배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맞먹으려 든다, 는 사고 자체에 이미 평등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실려 있는데 말이죠. 성평등 이슈는 오랫동안 있어 왔지만 아직 한 번도 한국 사회는 평등에 진짜 다가서 본 적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성평등이라는 주제는 남성과 여성을 나눈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성이 남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라던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 권리를 넘본다.’식의 밥그릇싸움, 권리싸움으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뤄지는 문제들을 한 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에선 ‘군 가산점 제도’가 그 예였는데요, 이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반대해서 못한다.’는 주장(변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만..)들이 있습니다. 꼼꼼히 따져볼까요?
첫째, 군 가산점 제도 혜택은 모든 남성에게 동등하게 돌아가는가? 가산점제도는 ‘군대를 제대해서 9급 7급 공무원을 지원하는 남성’만 받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군 면제자, 군 ‘특별’ 면제자, 그리고 공무원을 안 할 남성들에겐 그 혜택이 가지 않죠. 애초에 남성들에게도 동등하게 돌아가지 않는 겁니다. 둘째, 군 복무는 경력으로 인정이 되기 때문에 남성이 입사를 하면 같이 입사한 여성들보다 기본 호봉이 높습니다. 같은 나이의 여성들이 대리되어 있을 때 남성들은 신입이어 불평등하다? 여성이 대리 이상 올라가는 경우가 한국에서 몇이나 있는지, 유리천장의 현실을 간과한 주장이죠.
모든 남성에게 돌아가지도 않는 군가산점제도를 남녀의 밥그릇 다툼으로 모는 것처럼 사건을 젠더문제로 다루면서 근본적인 문제와 질문을 은폐시키려는 시도들이 많습니다. 최근 한 섬에서 벌어졌던 마을 사람들의 교사 성폭행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섬에 파견 된 여 교사들을 남교사로 대체한다, 는 대책도 같은 경우입니다. 또는 젠더문제를 젠더문제가 아닌 것으로 다루려는 시도들도 있습니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경찰이 ‘이 사회에 아직 혐오 범죄는 없다.’고 강조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화낼 대상을 바로 알기 위해선 그가 자꾸 앞에 내세우는 젠더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젠더’가 뭐기에 툭하면 그 뒤로 숨는 걸까요.
먼저 질문을 하나 할게요.
졸라맨이 있습니다.
졸라맨을 여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는 어떻게 말할까요? 어떤 포즈로 앉아 있을까요?
혹시 치마를 떠올리셨나요? 꽃이나 리본을 달아 주셨나요? 얇고 고운 목소리로 말을 하던가요?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졸라맨을 남자로 보이게 하기 위해선 무얼 하시겠어요?
여자, 남자라는 성별 구분에서 옷과 목소리, 태도, 말투 심지어 직업까지 연상하게 되는 것. 여성으로 만들 때와 달리 남성으로 만들려 하니 별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 조금은 거친 설명이지만, 그게 ‘젠더’입니다. 조금 무섭게 말하자면 여자, 남자라는 생물학적 차이에다가 ‘걸맞는’ 옷과 목소리, 태도, 역할,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까지 규정하려는 힘입니다. 이것은 제도에서도 찾을 수 있고 문화에도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자와 남자는 ‘성기와 염색체’의 차이에 의해 나뉜다는 간단한 사실은 잊어버리고 겉모습과 말투, 태도 등을 통해 그 사람의 성별을 구별해내려 하죠.
사실 우린 모두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성기만으로 성별을 구분할 수 있었죠. 그러나 커가면서 겉모습으로 성별을 표시 할 것을 요구받게 됩니다. 젠더를 학습하게 되는 거지요. 이 젠더는 개별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의학/과학, 정치/통치, 예술, 종교와 함께 발달해 왔습니다. 사례를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1. 의학/과학 : 호르몬과 젠더
검지와 약지가 성별과 성 정체성을 알려준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약지가 검지보다 길면 남자, 짧으면 여자, 두 길이가 비슷하면 동성애를 할 확률이 높다는 말이요. 사실 약지에는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의 수용체가, 검지에는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많아서 그에 따른 길이의 차가 성별에 따라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게 ‘성적 지향성’을 좌지우지 하진 않습니다. 한 채윤 선생님은 ‘테스토스테론이 많으시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내요. 호르몬의 성별 결정 능력을 성적 지향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라 ‘젠더’문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테스토스테론의 역할은 근육을 발달시키고 털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남성의 2차 성징에도 영향을 끼치고요. 그러나 ‘성욕’을 활발히 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성이 여성보다 성욕이 더 많다.’ 는 설 또한 틀린 말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XX와 XY, 생식기로 구별됩니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몸을 갖고 있고 그에 따른 기능이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게 성격, 스타일, 몸매, 말투, 역할을 결정짓는 바탕이 되지는 않습니다.
2. 정치/통치 : 열녀문
열녀문은 ‘평생 하나의 지아비를 둔 여성’을 위해 세워주는 문입니다. 이것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는데 그 의미가 고려와 조선이 달랐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재혼이 너무 많아서, 즉 평생 하나의 지아비만을 두는 경우가 너무 흔해서 그에 대한 보상이었던 반면 조선시대 때는 여성의 남편에 대한 복종과 헌신을 위한 나라의 통치술이었죠. 열녀가 너무 많아져서 열녀로 인정하는 기준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그에 대한 보상도 점점 커졌다고 해요. 그 뿌리는 조선 통치의 주요 사상이었던 유교의 기본 ‘삼강오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삼강의 뜻은 ‘신하는 임금이 법이고 아들에겐 아버지가 법이며 부인에겐 남편이 법이다.’입니다. 주로 신하는 남성이었으니 임금의 입장에선 신하만 잘 통치하면 나라 전체를 움직일 수 있었던 거죠. 이것은 또한 신하와 임금, 부부의 사이를 동급으로 놓으면서 ‘하나의 임금만 섬길 것.’과 ‘하나의 남편만 섬길 것.’이 동금의 일이 된 거죠. 신하의 반란으로 세워진 조선 임금들의 불안은 이렇게 가정에까지 영향을 끼친 겁니다.
하나의 지아비를 섬기는 것이 온전히 여성의 몫인 것, 여성의 순결과 정조를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현대에도 남아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뒤집으셨습니다.
“정조를 지키는 것보다 정조를 빼앗지 않으려 하는 게 맞지 않은가? 뺏긴 이와 뺏은 자, 어디에 그 잘못이 더 큰가?”
3. 예술/종교 :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어 벌을 받게 된 이야기는 모두 아실 겁니다. 이것은 성당이나 많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어 왔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다뤄왔는데도 그 표현은 변해왔다고 합니다.
15세기 16세기 그림에서 뱀은 여성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8세기 그림에서 뱀은 날개를 달기도 하고 다리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노하셔서 뱀에게 평생 배로 다니게 하는 벌을 내리셨다는 게 성경의 내용인데 왜 뱀은 여자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일까요? 그리고 이것은 당시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쳐왔을까요. 여성을 꽃뱀으로 부르고 성녀와 창녀로, 마녀와 마리아로 나누는 요즘. 우리는 19세기 인식에서 얼마나 앞으로 진보해 온 걸까요?
젠더는 이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주로 ‘남성’과 ‘남성 아닌 것’으로 표현되지요. 교사와 여교사, 의사와 여의사, 군인과 여군. 이런 식으로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서 예민해지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성 또한 억압합니다. 돈 잘 벌어야 능력이지, 키 커야지, 집 살 능력도 돼야지 등등. 이렇게도 말합니다. ‘남자니까 괜찮아.’. ‘여 자보다 못 하는 거야?’ 식으로요.
이러한 억압이 무서운 것은 의심이 ‘나’로 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난 안 맞지?” “내가 틀렸나?” 등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드는 것, 스스로 맞추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젠더의 작동 원리이자 생존 방식입니다. 게다가 젠더문제는 직장, 연애, 결혼 등 생활과 밀접한 일이기 때문에 무시하기도, 맞서 싸우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집에 오는 길, 내가 왜 살을 빼자고 생각하기 시작했더라? 내가 왜 엄마한테 ‘엄마의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더라? 엄마로부터 여성성을 배우지 못했다, 는 말은 왜 했지? 내 가슴이 작아서 남자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을 왜 한 걸까? 등의 물음이 생겼습니다. 내 가족들의 불화라고 생각했던 것도, 내 자존감 문제라고 여겼던 것도, 젠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젠더는 보이는 규칙이나 지식 또는 유행이 아니라 내 위에 서 있는 권위였던 겁니다.
젠더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엔 다양한 높이의 벽들이 있고 벽들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서 벽의 존재를 모르며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성평등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를 가로막은 벽을 보고 그것을 허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성평등을 말한다는 것은 가해자를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벽이 왜 필요한지 질문하고 벽이 없는 상태를 상상하고 제안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한 채윤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린 정말 많이 얘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