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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6강
5월 10일 제 5강에서 '열녀, 죽임인가? 죽음인가?'라는 주제로 쟁점토론을 진행한 데 이어서, 17일에는 제 6강 '근대 여성의 아이덴티티: 현모양처론의 두 얼굴'을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마치 조선시대 여성상의 전형처럼 인식되고 있는 '현모양처'라는 개념이 사실 근대에야 비로소 등장하였음을 짚고 넘어갔습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는 가부장적 의식이 더욱 강화되는 양상이 보입니다. '시집을 간다'는 결혼개념이 기본 풍습으로 정착하였고, 열녀문 건설이나 여성 수신서 보급 등으로 여성들도 가부장적 개념을 내면화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때는 양반뿐 아니라 양인, 천민 여성도 열녀가 된 사례가 왕왕 등장합니다. 즉 열녀 개념이 하위계층에까지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족보에서도 선남후녀식의, 혹은 아예 딸의 이름을 적지 않는 식의 서술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성은 이 상황에서 마냥 수동적 객체로만 살았을까요? 사실 사회의 가부장적 요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겠지만, 여성이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례도 있습니다.
먼저, 독서 열풍으로 여성의 의식이 높아졌습니다. 그 배경 중 하나는 수신서/교화서의 정책적 보급으로 여성들의 언문 사용이 늘어난 것입니다. 언문은 여성이 많이 쓴다고 하여 '암글'이라고 불리기도 했지요.
반가 여성들의 경우 미래 자녀교육을 위해 출가 전에 글공부할 기회를 주는 경우가 많아, 한문까지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유학서를 읽고, 심지어 책을 쓰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초창기에는 글을 읽고 쓰더라도 여성 자신이 그것을 숨겼습니다. 이익의 책에서 '부인은 가족을 봉양하고 봉제사, 접빈객하는 일이 있는데 어느 겨를에 책을 읽겠냐'는 말이 등장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글 읽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 여성 성리학자인 윤지당 임씨의 경우 '서책을 가까이하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소설이 등장하면서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시기의 소설은 내용 전개가 흥미있고, 현실에서 이루기 어려운 판타지를 소재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나 방물장수를 통해서뿐 아니라 판소리나 이야기꾼의 낭독 등으로 소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주 독자층이 여성인만큼 여성의 구미에 맞는 이야기를 다룰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나중에는 여성 주인공이나 여성 영웅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독서가 활발해지면서 책을 쓰는 일도 늘었습니다. 여성의 작품이 사후에 문집으로 출간되기도 하고, 한중록이나 규합총서 등 유명한 여성 저서들도 이 시기에 등장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성의 의식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경제참여율도 늘었습니다. 시전에는 여성이 운영하는 점포를 뜻하는 '여인전'이 등장했습니다. 양반 여성들도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양반 남성들이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생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과거를 준비하는 일이 많아, 집안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서는 여성이 일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덕무의 글을 보면 '선비의 아내는 생계를 위해 일해도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성의 경제참여가 늘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사례도 등장합니다. 제주 거상 김만덕이 대표적인 예인데, 상업을 통해 번 돈을 빈민 구휼에 희사한 결과 상으로 왕비를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은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양반 여성 박씨가 동전을 주조한 사건에 대한 실록 기록을 보면 박씨가 흉악한 성품을 가졌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맥락을 보면 여성이 주체성을 보이는 것을 성품이 포악한 것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비단 조선시대뿐 아니라 현대에도 이런 모습은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나아야' 한다는 가부장적 관념으로 능력있고 자기주장 강한 여성을 '기가 세다'고 깎아내리거나, '여자가 나를 무시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여성이 글을 배우고 돈을 버는 것을 막으려던 이때의 관념과 큰 줄기는 같다고 할 수 있겠지요.
천주교의 등장도 여성의 의식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여성을 중심으로 유입되었는데, 이것은 아마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이념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념 때문에 국가에 의해 탄압을 받기도 했는데,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곧 신분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중국에 처음 유입될 때 최대한 기존 유교 관습과 충돌하지 않으려 한 것과 달리 종교색을 드러내어 제사를 거부하거나 신주를 없애면서 충돌이 생긴 것, 그리고 남녀가 모여 미사를 드린다는 점 등이 탄압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또한 여성들이 동정녀로 살기 위해 여성끼리 공동체 생활을 하거나 결혼하되 동정 서원을 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윤리에 반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보편적인 종교는 아니었으며, 탄압을 많이 받은만큼 천주교 신앙이 당대 여성의 삶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유입은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고, 여성 교육과 개화가 시작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동학도 비슷한 양상을 보입니다. 동학은 서학을 막자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사실 서학과 유사한 개념이 많이 나타납니다. 특히 평등사상이 그렇습니다. 이런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도 서구의 여성관 변화를 수용하여 균등교육을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보았다기보다는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의 일환이거나, 여성을 남성들의 개혁을 뒷받침할 존재로 교육시키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여성교육기관 설립 운동이 진행되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은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이화학당입니다. 초기 학생의 대다수는 기생이나 고아 등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이는 여성교육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한국 단체에 의해서도 여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순성여학교입니다.
이 순성여학교가 설립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1895년 공포된 교육입국조서에 여학교 설립에 대한 조항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성의 참정권, 직업권, 교육권을 주장하는 내용의 여권통문이 발표되었는데, 당대에는 상당히 급진적인 주장이어서 큰 사회적 주목과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여권통문 발표는 찬양회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성금을 모아 여학교 설립을 준비하였고, 결국 순성학교를 설립해 기초적 수준의 유학과 서양 학문, 실기 등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했는데, 연설회 강사진이 주로 독립협회 남성 회원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 담론을 주도하지 못했고, 첩의 참여 문제로 내분을 겪었으며, 순성학교도 운영난에 시달리다가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관립 여학교인 한성학교가 설립되었고, 1905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여러 여학교가 설립되어 여성교육을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교육의 목적은 여성에게 평등한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대의 자료나 실제 진행된 교육의 내용을 보면, 이때의 여성교육이 현모양처를 양성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모양처론은 사실 근대적 개념입니다. 원래 조선에서 전통적 여성의 덕목은 '효부'입니다. 현모양처론은 근대적 소가족 제도의 산물이자, 일본의 '양처현모' 관념이 유입 과정에서 변형된 결과입니다. 전쟁이 잦았던 일본에서는 남성이 전쟁으로 자리를 비워도 가정을 유지하고 군인인 남편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양처의 덕목을 강조했다면, 근대 어려움이 많았던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도록 현모의 덕목을 더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교육을 받더라도 남성과 동등한 일자리를 구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대신 교육받은 것을 바탕으로 가정경제와 자녀교육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따라서 관립 여성교육에서도 가사를 많이 가르쳤습니다. 원래 조선의 전통적 가정관에서 자녀교육은 주로 아버지의 책임이었는데, 오히려 근대에 들어서며 이 책임조차 여성에게 떠넘겨진 것입니다. 여성교육은 현모양처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므로, 교육받은 여성이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려 들 경우 가혹한 공격이 따랐습니다.
당대에도 현모양처론에 대한 비판은 있었습니다. 무보수의 여자 하인이나 다름없다는 비판과 더불어, 여성을 구속하는 모든 사상에서 벗어나자는 주장, 현모양처교육은 여성집단을 효율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노예교육이라는 주장 등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