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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속 여성사 기행> 2강
지난 4월 12일 '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여왕 통치의 성공과 실패'를 주제로 한 2강이 열렸습니다. ‘원시시대부터 신라의 여왕들’까지의 시기를 ‘성별분업에서 성별불평등으로’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원시시대의 경우 생물학적인 성차에 근거한 성별분업이 이루어져 주로 여성들은 채집, 남성들은 사냥을 하는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했습니다. 채집은 사냥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이었고, 따라서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화석인골을 보면 여성들이 남성보다 40세 이전 사망률이 높았는데, 그 이유는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여성들이 겪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그러한 과정에서 겪는 신체의 부자유스러움 때문에 주변 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기가 어려웠고, 이는 여성의 단명을 야기했던 것입니다.
구석기시대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튼실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산과 종족 보존에 대한 염원이 담겨, 그 당시 여성들에게 기대되던 역할에 걸맞은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빌렌도프르라는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바로 옆에 있는 곳으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비엔나의 자연사 박물관에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비너스 상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여성들이 간단한 농경을 담당해 왔습니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남성들이 주로 농경을 맡아 하게 됨으로써 남성 위주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노동력이나 사회 활동에서 남성들의 참여 비중이 확대되고 가부장제로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선사시대 여성들의 모습을 우리가 자세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선사’라는 게 ‘역사 이전(prehistory)'을 의미하므로 기록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알기 위해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유추해 보기도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여성은 웅녀입니다. 웅녀 이야기(단군신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달리 삼국유사는 역사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삼국유사의 ‘사’는 ‘역사 사’ 자가 아니라 ‘일 사’ 자입니다.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편찬이 된 정사입니다. 웅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김부식과 같은 유학자들이 기술했기 때문입니다. 유학자들은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삼국사기를 썼으므로 괴력난신의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아 싣지 않았습니다. 괴력난신이란 보통 사람이 들 수 없는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린다든가(괴력), 신들이 무엇을 만들고 벌을 내린다든가 하는 귀신에 관한 일(난신) 등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을 말합니다. 이렇게 삼국사기에 들어가지 않은 남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이것들을 모아서 승려인 일연이 책으로 낸 게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제왕운기 등의 다른 책에도 나오는데, 내용이 조금씩 다 다릅니다. 사람들이 전해들은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군신화와 같은 건국 신화를 보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를 해 왔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이 이주한 집단이 토착 집단인 곰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 호랑이를 토템으로 삼고 있는 집단을 만나게 되고, 합쳐져 하나의 지배 집단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힘의 우위에서 열세에 있는 쪽을 주로 여성으로, 우위에 있는 집단을 남성으로, 그리고 부족과 부족 간의 결합을 ‘결혼’이라는 형태로 나타낸 것입니다.
신라에 첫 여왕인 ‘선덕왕’이 즉위하게 된 배경에는 신라 사회가 ‘골품제’로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왕위에 오를 만한 성골 남자가 단절했고, 진골에서 남자 왕을 추대하기보다 같은 골품의 여자로 그 뒤를 잇게 한 것입니다.
또한 왕권이 강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즉위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법흥왕 시절 사상적으로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받아들여 왕실가족을 불교의 석가족과 일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로써 진평왕대 왕권이 강화되어 국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선덕여왕을 자신의 왕위 계승자로 삼고, ‘국인의 추대’라는 형식을 빌려 즉위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평왕 때 일본에서 첫 여성 천황인 스이코(推古)가 등극했는데, 스이코 여왕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고, 이 사신이 돌아갈 때 신라에서는 까치 두 쌍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스이코 여왕의 즉위는 신라 왕실에 ‘여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영향을 미쳤으리라 봅니다.
선덕여왕의 자질에 대해 삼국유사에 세 가지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란꽃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았다는 것과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백제군이 매복한 사실을 알고 섬멸하게 한 것,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장지를 정해준 것입니다.
‘비담의 난’은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염종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일입니다. ‘여자 임금은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덕여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진덕여왕 이후 남자 왕으로만 계승하다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여성으로서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진성여왕을 ‘총명하고 민첩한 천성’, ‘남성과 같은 골상’이라고 발언하면서 여성이지만 외모가 남성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선덕, 진덕 여왕들과 달리 왕위를 양위하는데, 양위를 했던 대상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진성여왕의 즉위는 경문왕 직계로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하는 혈통관념에서 헌강왕의 아들인 효공왕의 성장을 기다린 임시적이고 과도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의 경우 통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데에 여왕들의 업적이 있음에도 김춘추에 가려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역사를 해석하는 데 성차별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여성들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했는지를 찾고 아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역사를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면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당시 남성 지배층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눈으로 본 역사는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중요합니다.
현 시대에 여성이 지도자, 리더가 된다는 것에 대해 편견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에 비하여 여성이 부당하게 폄하되기도 하고, 진보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여성에 대하여 지니는 인식은 반민주적이고 차별적이고 수구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들이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는 훈련이 부족하여 차별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에도 본인이 차별적이고 남성우월주의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성들이 그러한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고 지적하면 ‘너무 예민하다’, ‘피곤하게 군다’는 말로 일축합니다.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억압의 구조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차별하고 억압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신라에서 여왕은 비일상적인 상황에서 남왕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으로 겨우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서 여성 인물들을 극히 제한적인 모습으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앞으로의 강의를 통하여 여성들의 삶을 재발견·해석하고, 이로써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