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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2강
<우리 정치는 무엇을 잃어버렸나>
김만권 선생님의 "시민정치와 정당청치가 함께하는 민주주의 새로 짓기" 두번째 강의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민주주의에서 도망쳐버린 우리사회와, 민주주의 모델인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델"과
마냉의 "청중민주주의"에 대해, 그리고 이 두 모델의 공통점인 엘리트 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작성해보겠습니다.
근대사회 이후의 대의민주주의는 "참여"라는 민주주의의 이상 대신 "제도화와 절차"를 핵심으로 보았다.
제도적으로 절차를 정하고, 그 절차를 지키는 것을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 하여, 절차적 민주주의를 잘 표현한
<정의론>에서는 공정한 절차가 공정한 결과를 낼 것이라고하는데, 반드시 공정한 결과로 나타나진 않지만
최대한 공정하게 만들 경우 당사자들이 좀 더 받아들일 수 있어 공정성이 담보된다는것이 절차주의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절차화는 제도화와 겹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 중심은 항상 엘리트들, 대표자들만 있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된다. 민주주의를 절차화의 한 부분으로만 바라보고, 대표자들의 정치로 환원하는 데 있다.
정치가 제도화 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강조되다 보면 제도권 밖으로 확정되는것을 경계하게 된다. 이는 실제 오늘날
민주주의자들이 제도권 정치에 집착하여 시민들의 직접적인 참여 자체를 꺼린다.
이런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아쉬움이 잘 표현 된 개념이 셀든 월린의 "도망자 민주주의"인데 월린은 단순 제도화
속으로 환원하는 당대 민주주의의 이론과 현실에 반대하였다. 월린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정부의 형태가 아닌,
존재방식으로 바라보고 이것은 구성원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행위자로 변모하는 정치적인 순간에
일시적으로 존해한다고 본다. 하지만 위기와 변화의 시기를 보낼 때 거리나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변화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들은 이 순간이 지나면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이에 따라 "도망자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가 참여에서 멀어졌다는 비판인 동시에 평범한 시민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정치행위자로 바뀔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전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민주주의에서 도망친 우리사회의 대항민주세력이 제시하는 민주주의 모델이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
델"과 베르나르 마냉의 "청중민주주의" 를 닮아있는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샤츠슈나이더의 "책임정당모델"은 정치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빚는 갈등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정치정당이
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민주주의는 더 좋은 정책을 만들기 위해 정당이 서로 경쟁하면서 만들어진다고 본다.
마냉의 "청중민주주의" 모델은 미디어를 통해 의사소통에 능숙한 새로운 정치엘리트들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통치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안철수 현상"으로 볼 수 있는데, 안철수는 청년 멘토 등 기존 정치엘리트들에서
볼 수 없었던 참신한 미디어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두 모델은 차이가 있지만 명확한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정치엘리트와 시민들을 나누며 엘리트들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책임정당모델"은 정당엘리트, "청중모델"은 대통령, 수상 등의 국가수반의 역할을 강조하는
점에서 변화의 중심은 시민이 아닌 정치엘리트들이라고 보고 있다.
정치의 중심이 엘레트라고 믿었던 샤츠슈나이더는 민주주의는 정치지도자들과 조직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책에 대안을 확정하는 경쟁적인 정치체계이며, 시민들은 스스로 통지하지 않고, 통치 능력이 없으며
"투표"를 통해 정치갈등 과정에 참여한다고 본다. 정당은 인민의 요구를 들어주는 집단에 가까운데, 그 요구 또한
정치엘리트들이 정해주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하여, "좋은 텔레비전을 사기 위해 텔레비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 필요가 없듯이"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요구만 할 뿐 적극적일 필요가 없으며 해야 하는 일은
때가 되었을 때 투표하여 대표를 뽑는것이라고 한다. 이런 엘리트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해 마냉은 "새로운 엘리트의
부상과 다른 엘리트들의 퇴조"라고 말하면서 정치가 엘리트들의 중심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그 엘리트들을 다른 엘리트들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고있다.
이렇게 두 모델은 정치엘리트들을 선호하며 시민들을 "구경꾼 유권자"로 보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선거 혹은
투표로 환원할 때 나타나며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면 시민들은 투표기계, 긍정적인 표현으로 쓰면 엘리트들의 공약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정당주의자들은 정당정치에 대해 아무리 불만스럽고 많은 문제가 있더라도 현재는 정당정치를 대신하는,
보다 우월한 민주주의나 공동제 운영원리는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정당 외에 정치참여엔 관심을 두지 않거나
시민사회를 동등한 파트너로 여기지 않고 있다.
최창집은 "정당정치 대힌 시민정치를 앞세웠고, 정당조직보다 네트워크 형성과 온라인상 소통이 더 우월하다고 믿는
방식의 정치는 사회 집단들을 대표하기 어려운 무정형의 정치를 낳을뿐이다." 라고 말하였다.
이렇듯, 시민정치는 대안이 아니라고 말하며 "현실에서 출발하라"라고 하는데 과연 정당정치만이 상실되어버린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최선의 방법인지 생각해 볼 필요성을 느끼며. 또한 앞서 월린은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이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진정한 행위자로 변하는 그 정치적인 순간에 존재한다고 말하였는데, 월린이 말하는
정치적인 순간은 어떠한 순간인지, 그 순간들이 현재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지, 부족하거나 부재한다면 그 순간을
우리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