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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7강. 요시노 사쿠조. 물거품
[동아시아 근대를 만든 인물들2] 강좌의 일곱번째 강의는 '요시노 사쿠조'를 만나보았습니다.
강의 후기 정리는 자원활동가 문동욱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 아카데미느티나무 주-
1920년대는 일본현대사에서, 이채로운 시대에 속한다. 메이지 유신 이래 청일 러일 정쟁을 치르며 정신없이 달려온 국가주의 열차가 잠시 정지한 듯 보이는 시대이다. '데모크라시'와 당연하단 듯이 연결되어지는 이 다이쇼 시기는 민주주의 자유주의가 일시 꽃을 피운 듯이 보인다. 제한적이나마 집회 언론 출판이 종래에 비해, 그리고 만주사변 이래의 15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이후 30년대에 비해 자유로웠고, 새로운 근대적 사회문화적 변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비록 그것이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꺽여버렸지만.
한국에서는 '문화통치'란 미명하에 보다 교활한 회유와 분열 책동이 이루어지던 시대로만 낙인 찍혀있기도 하다. 전적으로 우리 민족의 위업 3.1운 동의 그나마 결실로. 1차세계대전의 참화 이후 전 세계를 휘감았던 이상주의의 호소와 그 힘도 도외시되고, 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 목소리가 커진 사회주의와 그에 대한 경계심 및 예비조치적 유화정책들의 영향도 외면된 채. 즉 일본 자체에서 이루어지던 변화는 무시되고 식민지이던 조선이 그 인력에도 이끌렸을 가능성은 전적으로 배제된체 말이다.
하기야 아릭부케-쿠빌라이의 내전을 외면한 채 단지 고려가 끈질긴 항쟁으로 몽골에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았다거나, 누르하치-홍타이지의 변화는 외면한체 다만 인조반정의 결과 호란이 일어나거나, 사회주의 탄압로 일본 본국에서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조선민족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로 설명하는 식의 자의식과잉으로 점철된 '국사' 서술에 무엇을 바라겠냐만은.
그런 의미에서 요시노 사쿠조는 딱 좋은 타겟이다. 일본에서의 그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상징이다. 지식인으로서 언론활동가이자 대중계몽가이다. 민의 삶을 국가의 책임이라고, 그로써 국가의 존재근거로 본 시각, 민의 의향에 따라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이채로운 것이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참정권 확대를 내세워 보통선거권 투쟁을 이끌고 승리를 이끌어낸 준 영웅이다. 이로써 그는 현대 일본에서까지 민주주의 전통과 계보의 큰 줄기로 남아있다.
반면에 철저히 한국식으로 보았을 때 요시노 사쿠조의 조선관은, 조선'문제'인식과 처방전은 지극히 20년대의 일본인다운 것이다. 직설적으로 국사식의 정서로 표현하자면 교활하고 가식적인 사기꾼일 뿐이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조선이란 전제 하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냈을 뿐이다. 총독부의 압제적 폭정 중단의 요구는 눈속임이고 사기에 불과할 것이다. 자치권 부여 주장은 싸구려 회유이며, 민족운동 진열을 분열시키기 위한 술책에 다름 아니다. 일시동인의 선정을 극악한 민족말살의 전조일 뿐이다. 요시노 사쿠조란 인간은 없고 문화통치란 술책을 부려대는 1920년대의 일제일 뿐이다.
동 시기에 또다른 자유주의 언론인인 이시바시 단잔은 일본의 이익이란 관점에서 대만과 조선에 독립이란 선물을 안길 것을 주장했다. 별개의 문화적 전통을 지녀온 집단을 힘으로 영구히 지배할 수는 없기에 식민지 상실은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때에 패배 내지는 실패로 잃을 채 원한을 살 바에는, 미리 독립을 선물로 주어 우호 속에 우방이자 경제적 권력으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합류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이익을 고려하는 만큼으로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대만인에게는 대만인의 정체성이 항구할 것이라 본 일관적 논리체계의 귀결이었다.
다른 한 사람, 극우파이자 우승열패의 신봉자이던 기타 잇키의 조선관과 주장도 그러하다. 그에게 조선은 멸망함으로써, 존재할 가치가 없음이 증명된 나라였다.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조선은 이미 없어진 것이고 조선인도 물론 사라진 개념이었다. 일본제국의 새 영토와 새 신민만이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민족동화 정책 따위를 운운하지조차 않았다. 그에게 구 조선인은 지금 당장 일본신민인 것이었다. 하여 총독부를 반대했으며, 일본 본토와 동일 행정 동일 법제 동일 권리 동일 의무의 즉각적인 시행을 주장했다. 그러고나면 그는 본디 일군만민주의자로서, 구조선인에 대한 모든 차별과 편견을 전적으로 타파할 것을 주장했다. 국가주의자인 그에게, 그것은 그것대로 일관적인 논리성을 띈다.
요시노 사쿠조는? 그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기독교인이며 자유주의자인 한 개인이다. 동시에 현실적인 점진론자이기도 하다. 그의 조선관은 방책으로서는 그에 일관적이기는 하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동정적이고 온정주의적이었으며, 자유주의자로서 무단통치의 폭정을 반대했고, 민의의 반영이 이루어질 자치를 내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전제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조선은 반드시 일본의 식민지여야 했다.
개인적으로 그 자체에 분노하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민족주의자들이란 본래 그런 법이니까. 그것을 민족적 관점 내에서 그나마 넘어선 것은 이시바시 단잔이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흐름, 말했듯이 자신이 일본인임을 포기하지 않듯이 누군가는 조선인이고 대만인이란 정체성을 붙들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요시노 사쿠조 이하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정도 일관성을 보전치 못한다. 자민족의 그것만큼이나 타민족의 민족주의를 유념치 못한다.
어쩔 수 없다. 민족주의는 근본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거세함으로써만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저열하고 끔찍한 것을 이리저리 구분선을 만들어 방어적 민족주의니 뭐니 하며 귀퉁이를 붙들고 미화하는 자들이야 있다. 그러나 민족주우의 요체는 바로 신채호가 말하지 않았던가. 일본 무산계급과의 연대논의가 나오자 '일본인은 사죄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와도' 라 소리지르던, 끝내 근본적으로 골수 민족주의자였던 그를 자꾸 아나키스트로 눈속임 시키려는 자들이 의지의 문제니 뭐니 그 의미를 곡해하지만, 신채호의 명쾌한 사론이야말로 기실 민족주의의 정수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
한덩이 일체적 '아' 외에는 모조리 한 뭉텅이 '비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비아들은 다양성도 차이도 없다. 무엇도 중요하지 않고 '아'가 아니기 ('비')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아니 한덩이 비와와 할 것은 오직 궁극적으로 투쟁 뿐이다. Mein 'Kampf'의 저자께서 지극히 전율하며 공명하실 정수이다. 아리안인과 조선인으로서 각자 인종의 명운을 위해 서로 맞찌르고 죽어버리는 촌극으로나 귀결되긴 하겠지만.
현실에서 맞부딫히게 되는 문제와, 이른바 시대적 맥락이나 한계는 닿아있는 것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신념을 초지일관 하는 것은 전후자 모두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사상과 신념의 일관성과 완결성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시대와 관계가 없다.
요시노 사쿠조가,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일본인에 한해서만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의 제한적인 '민본주의' 이념도 마찬가지다. '인민을 위한' 정치가 '인민에 의할' 때에 가능하단 점을 안 사람이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민의' 정치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소리란 것을 정말 몰랐을가. 그렇다면 모호하기 그지없는 '민심' 에 귀를 기울이는 왕도정치인들 안 될 것이 무엇이고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인민의 것이 아닌데, 허락된 영역에서 춤추는 것이 인민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감옥 안의 죄수가 묶여있지 않다면 자유로운가? 요시노 사쿠조는 자신의 논리 자체를 한발짝 내뻗는 것을 중단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에게 사상은 부재하다. 그러니 그에 기반하는 활동도 표피적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어도 근본적으로 공허하기 그지없다. 기둥 없이 지붕을 올릴 수는 없다. 그런 그가 기수였던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것을 전통과 기반 삼으려는 현대 일본의 민주주의에도 미래는 기대할 수 없다.
그건 87년 직선제 이후, 7,8,9 실질적인 노동계 대투쟁을 비롯한 사회변혁 운동을 '민주화가 이미 되었는데''빨갱이 놈들''이익만 챙기는 이기주의'로 매도하던 중산층 시민들의 이른바 민주주의가 환상에 불과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저 우연히 당첨된 복권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것은 모조리 탕진되었다. 어떠한 근본적인 여건의 변화도 없이 다음 세대인 우리에게 정치적 잔고의 파산과 높아진 정치적 소비수준만을 남겨놓은채. 마르크스는 그 무수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만은 반드시 옳았다. 하부가 상부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산관계니 경제관계니 하는 것만이 하부가 아니었던 점에서 그가 틀렸다고는 하지만. 결국 차세대는 하부를 우선 세워야하고 그러기 위해 저변부터 다져야 한다. 그것은 오직 일관성과 완결성으로만이 가능하다. 그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명백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