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내가 푸른시니어 학교와 인연을 맺기 까지
내 고향은 전북 익산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농촌마을 다가포 이다. 1949년 한국전쟁 한해 전에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올해로 예순일곱 이다. 어려서는 몸이 많이 허약해서, 오랜동안 중이염을 앓았고 그로인해 반귀먹어리가 되는 등 잔병 치레를 많이 하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폐결핵을 앓게되어 장기간 치료 받느라 학교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고, 그 후로 삼년 가까이 한문 공부를 했다. 마음은 늘 먼곳에 가 있었고, 허황된 꿈과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집에 가만히 붙어 있지를 못했다. 주먹패 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패싸움도 했고, 밤새워 돌아다니며 닭서리, 참외서리(도둑질)등 위험 천만한 사춘기를 보냈다. 나는 다행히 일찌기 자동차정비 기술을 배우기 시작 하였으며 자동차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사회생활의 안정을 찾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정비공장에 취업을 해도 한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옮겨다니기 일수였고, 전주 군산 서울 인천으로 한 곳에서 근무하기를 한 두해를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떠돌며 생활을 하다가 1970년에 군대에 가게 되었고 강원도 양구지역 최전방 에서 3년간 자동차 수송부에 복무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3년후 1976년 스물여덟 에 결혼하였다. 그후로 딸하나 아들 둘 삼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중랑구에 있는 정비공장에서 엔진부서를 상사와 함께 하청으로 운영하며 열심히 일 했다. 월급을 받는 것 보다는 수입이 좋았기 때문에 가정을 꾸려 가면서 또한 부모님을 모신 5남매의 장남으로 열심히,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대 1987년 어느날 이었다. 운전중에 시야가 흐릿해 졌다는 느낌이 왔다. 병원에 가서 보니 양쪽 눈이 한꺼번에 원인은 모르겠는데 백내장이 왔다고 했다. 나는 그것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주재넘게 뭘 개발 하겠다는 욕심으로 불빛과 마주하는 무모한 방법에 골몰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당시에는 백내장 수술을 할 수 있는 곳은 대형 종합병원과 전문병원 한 두곳 이었다. 찾아간 병원마다 의사들은 아직 수술을 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르다며 수술을 거부했다. 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일을 해야 할 나이에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백내장 수술을 제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여의도 성모병원 에서는 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나는 그 곳에서 인공수정체 삽입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그때 바라본 세상은 마치 다른 세상을 보는듯 황홀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수술을 받은지 일주일도 안되어 염증이 발생 하였다. 통원치료를 계속 하였으나 증상은 호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는 눈에 하얗게 고름이 보이고 염증은 더욱 더 악화 되었다. 2년여에 걸쳐서 재수술 등 입 퇴원을 반복하며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왜 하필 이런 시련이 나에게! 나는 알수 없는 분노와 슬픔으로 마음은 괴로웠다. 1989년 부활절이었다. 원목실 에서 일 하시는 수녀님으로 부터 '그대가 성장하는 길' 시집 한권을 선물로 받았다. 나는 커다란 돋보기를 대고 눈 안에서 떠도는 구름같은 염증을 비껴가면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나는 그때에야 비로소 '성장'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나의 내적인 성숙으로 되새겼다. 그로부터 때가 되어서 그랬는지, 눈의 상태가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나는 그때 어린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기도했다. 다섯살 짜리 막둥이가 성년이 될때까지 만이라도 가장으로써 가정을 지킬수 있다면, 그 뒤로는 내가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무엇을 더 바라지 않겠노라고 그렇게 기도하며 다짐을 했었다. 그 즈음 인천에서, 산자부에서 시행하는 회사내 고충처리위원 교육을 하루종일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심리학 교수로부터 들은 두시간 의 강의를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뭔가 애로사항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에게는 무조건 잘 들어 주는 것이 최고의 상담자의 역활 이라는 내용이었는데, 그때까지 내가 살아 오면서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부정적 사고에서 긍정적인 사고로 바뀌기 시작 하니, 마음도 여유가 생기고 삶의 자세도 조금씩 바뀌어갔다. 독서도 하게 되고 신문 읽기에도 재미가 붙으니 그것이 또한 일상의 취미가 되었다. 그러나 돈복은 없었는지 그동안 자동차정비 사업에 뛰어들어 봤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늙으막에 6, 7년 직장생활을 하던중 환갑을 맞게 되면서 몸이 먼져 예전 같지 않았고, 중견 간부로써 회사 운영과 관련되는 문제들과 관련되어 내가 가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느껴지는 갈등도 괴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라고 하는 정체성이 흔들린 것이 제일 큰 문제로 다가욌다. 그 나이가 될때까지 아직까지도 내 인생의 의미도 명쾌하게 규정하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이 한심 했다. 나는 진정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구나, 해는 이미 석양이고 시간은 다 가는데!!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 내 인생이다. 나머지 삶 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을 찾아 살자, 사람이 살기 위해 먹는거지 먹기 위해 사는것은 아니라고 하지 안는가! 그렇게 생각하고는 그때 직장을 그만 두었다. 벌써 6년 전의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더 늦기전에 너무나 잘한 결정이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걱정되는 것은 우리사회가 이미 초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었는데도 노인들의 복지 문제를 놓고 정치권의 보수 세력들은 개선하려는 노력은 안 하고 세대간 이간질이나 부추기는 한심한 작태 들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더 걱정이 되는것은 정작 깨어나야 할 당사자인 노인들의 정신상태는 의식이 잠들었거나 이미 세뇌되어 있고 돈 몇푼에 영혼을 팔아버리고 수구꼴통이 되어 사회로부터 존경은 커녕 손가락질과 천덕꾸러기로 외면당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보내준 메일에, 푸른 시니어학교 '새로운 노인시대를 만들자' 라는 주재가 특별히 눈에 띄었고, 강좌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아홉번의 강좌에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석 하면서 배우고 느낀것은 유명하신 강사님들의 충실한 강의도 좋았고, 앞으로 '새로운 노인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과제를 가지고, 많은것을 토의 하고 공유 할 수 있는 수강자들 과의 만남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재로 이번 강좌를 수강 하면서 내 주변의 몇분의 시니어들 과의 대화를 통하여 내가 가진 생각과, 그분들이 가진 생각과 사고방식 체계에 상당한 간격이 있음을 확인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실행 할 때에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한사람씩 신뢰를 쌓아 가면서 한분 두분 친교을 맺어가는것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하여 다섯명 만 모이게 되면 무엇을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리고 이번 강좌를 통하여 내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과 동력을 얻은 것에 크게 감사한다. 그동안 어려운 가운데서도 강좌를 만들고 이끌어 주신 주은경 선생님과 참여연대 관계자 여러분 그리고 우리함께 강좌에 참여하신 수강자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사랑합니다~♡♡♡
푸른시니어학교 제1기 수강자 정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