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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 국가] 4강: 제3부 민주주의의 위기
위기의 국가를 함께 읽는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파트인 ‘민주주의의 위기’ 부분이었는데요, 먼저 선생님께서 우리 민주주의의 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과거로의 회귀다(명징했던 것들이 되돌아가는 것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 이룩 이후에 어떻게 나갈 것인지 다음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지 못한다, 등의 의견이 있었고 그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도 중요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자유롭게 정치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국가에 대해서건 그 국가의 입법부, 더 나아가 유권자들의 의사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온갖 중요한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 전지구적 최상층 계급이 있다.” -리처드 로티
본격적으로 보르도니와 바우만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에 영향을 받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보르도니와 바우만은 각각 경제적 현상, 문화적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보르도니는, 근대가 왕성해지고 나서 상부구조의 문화적 힘이 경제에 영향을 줄 만큼 컸는데 지금에 와보니 결국 우리 삶을 결정하는 거 여전히 경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바우만은, 경제가 무언가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민주적 사회로 돌아가고 싶다면 우리가 보아야할 것은 ‘문화’라고 얘기합니다. ‘glocalization’. 지역이 세계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집중하여 여기서 민주주의의 포인트를 찾아야 합니다. 문화적 수용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하는 것이죠.
[포스트민주주의]
바우만은 문화의 이정표로서 Y세대를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Y세대는 ‘불안정성의 세대’입니다. 보호 없이, 직업 불안정성을 겪으면서 거기에 소비주의 문화가 결합된 세대입니다. 1980년대 중반과 199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세대로서, 인터넷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최초의 인간들이고 ‘실시간으로’ 디지털 소통을 알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문화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인식되고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브라프만은 프랑스인들이 Y세대라고 할 때 흔히 Y를 영어의 why로 발음하는 것은 이 세대가 질문하는 세대라는 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합니다. ‘Y세대’는, “자기말을 뱉고 나가버리는 대화구조가 만연”한 세대이며 반민주적, 반정치적인 세대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Y세대는 대개 위키피디아의 익명의 저자들, 페이스북 친구들, 트위터 중독자들에게 질문을 할 뿐, 부모나 상사 혹은 ‘정부당국’에 결코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들로부터 권위 있고 믿을만한 답변은 고사하고 귀 기울일만한 정도의 대답도 기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Y세대는 왜 질문을 할까요? 정말 간절히 원하는 질문이 많기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라 혹시 ‘처음 뵙겠습니다’처럼 정보 전달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알리고 당신이 언제든 함께 어울릴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는 사교적 기능만 하는 말들인 건 아닐까요? 사람들이 많은 모임에서 소외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혹은 지루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누는 잡담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또한 Y세대 구성원들은 완벽하거나 완벽에 가까운 직장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지 않고 현재의 일자리와 그 일자리를 제공하는 회사들에 대해 그다지 헌신적이지 않으며 삶은 다른 곳에 있다는 확신과 바로 그 다른 곳에서 살겠다는 결의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들과 다릅니다.
보르도니는 포스트민주주의를 ‘반정치’라고 이야기합니다. 포스트민주주의는 탈규제, 정치생활과 선거에서 시민참여의 감소, 복지국가의 쇠퇴, 경제적 자유주의의 회귀, 정치의 쇼비지니스화, 공적 투자의 감소, 최소한의 자유만을 보장하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모습들을 보입니다.
포스트민주주의에 대해서 ‘바우만’의 의견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Y세대’로 일컬어질 수 있는 20대들이 바우만이 얘기한 Y세대의 양상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하는 생각과 소통 방식들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새로운 지구적 질서를 위해]
보르도니는 “multitude”에 집중합니다. ‘multitude’ 즉 ‘다중’은 시민과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시민은 국가경계적 개념에 ‘속한’ 사람의 뜻이 강한 반면 다중은 그 개념 너머에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경제가 가장 효과적인 사회통제수단이기에, 이 새로운 정치는 본질적으로 경제적 결정에 좌우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민들의 수중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구적 권력의 최고 수뇌부에 있는 ‘얼굴없는 책임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습니다. 일반시민들은 지역차원의 정치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지역차원의 정치에는 중요하다고 할 만한 활동영역이 없습니다. 그것은 늘 되풀이되는 뻔한 문제들을 관리하는 일만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르도니는 더욱 ‘다중’에 주목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김만권 선생님께서도 다중보다는 ‘시민(citizenship)’ 개념을 다른 차원으로 옮겨 대응해야한다는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바우만은 ‘소비주의 신드롬’에 주목합니다. 이는 강력한 장애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처리하기 가장 힘든 장애물입니다. 소비주의 신드롬은 소비시장들의 관행을 통해 세워진 기준들에 입각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인식, 판단, 평가를 촉진하고 정당화합니다.
인간이 ‘소비’되는 것입니다.
그에 더해 “일방적 종결의 권리”를 이야기하는데요, 좋아하면 소비하고 매력이 없으면 소비를 중단하듯, 네트워크의 본질적 특징으로 ‘일방적 종결의 권리’가 작용합니다. 공동체와 달리 네트워크는 개인들이 모여 만들고 개인별로 탈퇴와 가입이 이루어지며 개인들이 떠나면서 해체됩니다.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진 개인들, 즉 타인의 행복을 고려할 수도 없고 고려할 생각도 없게 된 사람들은 싫든 좋든 동시에 상대의 도덕적 무감각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멸감만 남고 도덕감은 사라졌다”. 소비주의는 경제의 수레바퀴에는 기름칠을 할지 모르지만, 도덕의 베어링에는 모래를 뿌립니다.
4주 동안 [위기의 국가]를 읽으며 우리의 위기, 민주주의, 그리고 현대의 새로운 질서 등에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는 좋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