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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독서클럽-위기의 국가]1부 국가의 위기
<위기의 국가> 1부. 국가의 위기
위기의 국가는 보르도니와 바우만의 대담이 담긴 책입니다. 때문에 같은 것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고 판단합니다. 두 학자의 입장을 그대로 정리해서 옮겨보겠습니다.
1)위기의 정의
위기Crisis 는 그리스어 κρίση에서 나온 말입니다.
보르도니 Carlo Bordoni
보르도니는 이 단어에 대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판단’, ‘재판 결과’, ‘전환점’, ‘선택’, ‘결정’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점과 여기에서 ‘판단 기준’ 등을 뜻하는 ‘크라이티어리언critierion'과 ‘판단에 적합한’, ‘매우 중요한’ 등을 뜻하는 ‘크리티컬critical'이 파생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위기가 가진 ’전환‘, ’결정‘, ’판단‘, ’선택‘의 의미에 주목합니다. 전과 다른 상태로 바뀌어야 하는 때 또는 바뀐 결과가 위기의 진짜 의미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날 위기는 주로 경제 분야에 침체가 일어났을 때로 표현하는 데에 쓰이고 있습니다. 보르도니는 이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위기‘탓으로 돌리고 있는 거라고 봅니다. 이것을 통해 개인들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갖습니다. ’세월호 문제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 경제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라는 말이 실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기’라는 단어는 ‘국면’이나 ‘공황’과 같은 단어를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보르도니는 ‘국면’이란 ‘새로운 번영의 단계로 가는 과도기’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단기적이며 극복해야 할 것보다는 재충전의 시기입니다. ‘공황’은 국면보다 장기간적인 침체로 회복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케인스의 이론으로 극복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지금의 위기는 그동안의 것들과 다릅니다. ‘국면’보다 장기적이며 ‘공황’ 때처럼 이론과 정책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금융 중심 경제에서는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거나 투자가 발생하기 보단 ‘자본의 이동’으로 돈을 확장하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소비는 줄고 새로운 투자가 없으니 줄어든 소비로 인한 손실을 보상하려 기업은 값을 올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편에선 아직 위기를 절감하지 않은 사람들이 위기가 내게 닥치기 전에 있을 때 즐기자! 는 마인드로 소비하는 일명 ‘타이타닉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동만이 새로운 가치 또는 부를 창조한다.” -칼 마르크스-
현재의 위기의 특징은 ‘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있다’는 것입니다. 보르도니는 우리가 위기를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특히 ‘공포’에 압도되지 말고 파도를 타듯, 위기를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야 합니다.
바우만Zygmunt Bauman
바우만은 ‘위기’의 의미 중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무지와 불확실성’에 주목합니다. 위기란 ‘진단과 동시에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원하는 방향으로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정하여 행동해야 한다는 모순을 갖습니다. 현재의 위기는 이 어원으로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바우만의 진단입니다. 즉, 선택한다고 원하는 대로 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위기라는 거죠. 그리고 그 원인을 ‘정치와 권력의 분리’로 보고 있습니다.
과거 공황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바로 ‘국가’입니다. 그때의 국가는 ‘사태를 자기 의지와 일치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강한 국가’였습니다. 결정하고 행동하고 그 결과가 원하는 대로 되도록 강제할 수 있는 힘을 가졌었다는 거죠. ‘결정하는 것’이 정치이며 ‘결정이 진행되도록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권력입니다.
1970년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국가는 국민들에게 해주어야 할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보편적 복지는 국가의 재원 낭비로 여겨지게 되었고 경제 발전을 위해 개인이 그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시작되면서 교육, 보험, 교통, 안전과 같은 국가의 역할은 시장에게 넘어갔습니다. 개인들은 이제 국가의 역할을 시장에서 구매하는 소비자가 됩니다. 지구화로 인해 이제 시장은 지구적 차원으로 거래됩니다. 초국가적 기업들은 국경을 넘어서 세력을 키우고 확장하고 있습니다. 시장이 국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빠져버린 국가의 역할은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공위기’상태입니다.
이제 시장은 국가가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국가는 그것을 관리할 수단도, 자원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국가에게 남은 것은 정치뿐인데 결정을 해도 실행 할 능력이 없습니다. 국가는 자신의 위기를 치료할 능력이 없습니다. 남은 정치의 능력을 끌어올려 ‘주체의 부재’를 채우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2)국가 없는 국가주의
국가의 역할에 지구적 세력들이 개입되면서 각 국가들은 상호의존성이 높아졌습니다.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전염되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한 국가 차원에서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2차적 문제해결 기구 거버넌스들이 많이 생겼지요. WTO, EU 같은 것들이요. 이제 국가의 의미는 달라졌습니다.
보르도니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해결 기구들이 생기면서 지구적 기구들이 국내에 개입하기도 하고 지구적 차원으로 발생 된 것들을 지역적(국내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문제의 발생 원인과 해결이 분리되어 진행되는 것이지요. 한편 지구적 세력들은 문제를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풀어나갈 권력을 가졌지만 지역 정치는 권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지구적 세력들의 권력에 종속되었습니다. 지역의(국내의) 법을 따를 필요 없는 지구적 세력들이 원하는 바를 결정하면 국가는 해결해내야 합니다. 이것을 바우만은 ‘현대도시가 거대한 쓰레기통’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국가와 시민들의 관계가 변화하고 허술해지자 그 부분을 거버넌스가 채우게 됩니다. EU가 그 대표사례입니다. 그러나 거버넌스에는 민족 국가에 있는 ‘집단적 동일화 요소’가 없습니다. 때문에 시민들은 공동체에 대한 욕구를 정부가 아닌 다른 데서 해소하려고 방법을 찾게 됩니다. 정치의 혼란과 문제 해법들의 혼란이 반정치 감정을 키우게 되고, 이것이 공동체 참여 욕구와 결합하게 되면 전체주의나 민족주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국가는 역할을 시장에 넘겼습니다. 국가의 정치와 권력의 분리는 국가가 책임을 다 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위기의 국가는 공공복지를 제공하고 보장하는 기구가 아니라 시민에 빌붙어서 오로지 스스로의 생존에만 신경 쓰는 기생충이 됩니다. 시민들은 개인으로 생존하기 위해 점점 시장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우만
현재의 정부에서는 서로 의사결정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중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뽑는 유권자로부터의 압력과 지구적 세력들의 압력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정부들은 자꾸, 중요한 사항일수록, 결정을 질질 끕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인민이 주기적 선택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영토 내 주권 보장을 우선으로 한 베스트팔렌 모델에서는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지구적 세력들의 영향을 받는 지금 시민의 선택의 영향력은 축소되었습니다. 국가가 지구적 세력들에게 역할을 떠넘길수록 시민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작아집니다. 시민들의 정부에 대한 신뢰 또한 작아졌습니다.
“정부는 위기의 피해자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각 정부가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모든 것을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
-존 그레이
현재의 위기는 주체의 위기이며 영토적 주권의 위기입니다. 국가가 정치와 권력을 다 갖고 있었던 시절의 방식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구적인 문제를 지역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지금, 권력을 상실한 국가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시민들은 국가에게 해결을 기대하지 않게 됐으며 새로운 집단행동의 수단들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공원에서 말입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벤처는 이 현상의 근본적 원인들을 대중들의 인식의 발전에서 찾고 있습니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오늘날 분노가 우리들 안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털어내려면 광장으로 공론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바우만의 의견입니다.
그리고 EU는 또 다른 하나의 실험입니다. 지구적 차원에 지역을 만들어 분열된 원인과 해결을 합치시키려는 실험이지요.
바우만은 쿳시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전달합니다.
“삶이 왜 경주에 비유되어야만 하는가, 혹은 국민경제들이 건강을 위해 사이좋게 조깅하지 않고 어째서 서로 앞 다투며 달려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분명 신은 시장을 만들지 않았다. 왜 세계는 부지런히 협력하는 벌집이나 개미집이 아니라 검투사끼리 죽고 죽이는 원형경기장이어야만 하는가?”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3)국가와 민족
보르도니
지구적 차원으로 세계가 움직이면서 국가의 경계와 민족의 구분의 의미가 모호해졌습니다. 절대적 주권은 이제 지구적 세력보다 약한 것이 되었습니다. 베스트팔렌 모델에서 국경은 물리적인 것과 동시에 정치, 법, 경제적인 것으로 힘과 관계들의 균형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균형은 깨졌습니다. 정치, 경제는 지구적 세력들의 영향을 받게 되고 그들은 법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정보의 확장은 민족 정체성, 문화 정체성을 파열시킵니다. 그것을 유지하려 할수록 지금의 세계에서 도태됩니다. 정부는 자기 마음대로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됐습니다. 잃어버린 권력을 찾기 위해 정부들은 경제적 동맹을 모색해왔습니다. 시장이요. 정부는 시장과 손을 잡고 국가로써의 권력과는 전략적인 이별을 합니다. 권력과 정치는 다른 차원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권력과 정치의 분열은 전략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국내 정치의 묵인이 없다면 초국적 권력들의 임무 수행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초국적인 경제 권력에 의존하는 정부가 되었습니다.
정부의 대응 방식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실용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초국가적인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되 원래 국가의 책임을 대부분 사적 부문으로 넘겼습니다.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통치하는 새로운 지배 형태. 이것이 바로 국가 없는 국가주의입니다.
바우만
주권의 의미는 ‘선택의 특권’입니다. 법을 일시 정지 시키고 법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제할 수 있는, 예외를 둘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금의 국가전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울리히 벡은 독일의 메르켈 총리의 정치 전략을 일컬어 ‘메르키아벨리즘’이라고 했습니다. “메르키아벨리의 권력은 조심스러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욕구에 기초하고 있다. (...) 강제 수단으로서의 주저함. 이것이 바로 메르키아벨리의 방법이다. 그것은 회수하고 유예하고 신용을 거부하겠다는 협박이다.” 자신의 의도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협박을 통한 통제가 신 국가전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있던 상호 의존 관계에서 한 쪽이 일방적으로 깨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의존 관계는 언제든 바꿀 수 있습니다. 국내 인건비가 비싸면 인건비가 싼 국외로 가면 되는 거지요. 이 국가와의 거래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국가와 협상하면 되고요. 때문에 ‘양호한 상태에 있게 할 필요성은 자본에게 더 이상 ’경제적 의미‘가 없습니다.’ 의존관계의 붕괴는 경쟁, 이기주의, 사회 분열, 불평등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확실성, 불안, 두려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전략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관계자들이 완전히 자격을 잃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러서도 안 되며 모두 협상 테이블에 있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어쨌든 함께 지내야 합니다. 일방적인 협박은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4)홉스와 리바이어던
근대국가는 리바이어던이었습니다.
보르도니
리바이어던은 본래 성서적 전통에서 몸체가 수많은 인간들로 이루어진 괴물입니다. 홉스는 근대국가를 전체의 규칙성이 머리에 의해 보장되고 각 개인은 그 안에서 전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임무를 수행하는 리바이어던이라 일컬었습니다. 주권자는 전체의 행위를 결정하고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각 구성원들은 주권자에게 행위 결정권을 위임하며 주권자는 개인들을 대신해 혼란에 대한 해법을 고민하고 결정하고 실행합니다. 개인보다는 전체의 통일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근대국가, 리바이어던입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사회적 차별을 먹고 삽니다. 전체의 통일을 위해 이질적인 것들은 배제되고 삭제되어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그와 다릅니다. 주권자의 결정에 대해 고민 없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주권자를 뽑고, 주권을 위임합니다. 대표집단 또한 이질적인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어 국가의 동일성을 규정하기 어렵습니다. 각기 다른 의견들이 합쳐진 것이 국가입니다. 주권자의 권위는 아래에서부터 주어지며 위임은 절대적이고 원칙은 권력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바우만
근대 국가의 핵심 역할은 질서 유지였습니다. ‘베헤모스’라는 인간의 무질서한 본성을 리바이어던이 통제하는 것입니다. 통제와 질서 유지에 실패하면 국가는 실패한 국가가 되는데, 이것 외에는 어떤 경우에도 국가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질서’가 유일한 국가의 평가 기준이 됩니다. 국가는 질서 유지를 위해 감시와 통제의 방법으로 벌을 주고 권력을 행사하는 하드 파워를 사용합니다. 판옵티콘과 같은 수용소도 그 방법의 하나입니다.
오늘날의 국가가 사용하는 힘은 다릅니다. 자발적 감시와 복종, 질서 유지를 유도하는 소프트 파워가 현대 국가의 방식입니다. 시민을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근대 국가와 다름없습니다만 시민이 자신이 통제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매우 다릅니다.
신자유주의의 기술의 발달은 개인들의 정보 수집을 용이하게 해주었습니다. SNS와 같은 수단은 시민들의 고해성사를 공개해줍니다. 개인들이 부각되면서 과거에는 위협과 삭제의 대상이었던 개성, 다원성이 훌륭한 것으로 평가 받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요소로 여겨집니다.
국가의 역할도 바뀌었습니다. 노동과 자본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주 역할이었던 국가의 기능은 이제 시장과 소비자를 연결시켜주는 주선자가 되었습니다. 국가는 자본가의 투자를 유도하고, 소비자의 소비를 유도하면서 시장에 국가의 책임을 상품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