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5/10)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강의소개 보기 >> 클릭
19세기 조선 – 청 – 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답사후기]
1. 우정국 터 : 동아시아 사 속의 갑신정변
1884년 우정국(안국동 조계사 옆에 위치)이 개업을 알리는 축하연 자리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갑신정변에 대해 많이 들어보았지만, 갑신정변이 가지는 의미와 그 시대의 상황을 들으며 우정국 터에 서있으니 처음에는 그냥 평범해 보이던 그곳이 새로운 장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경복궁을 장악하고 정권을 탈취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청의 출동으로 3일 만에 쫓겨나게 되었으며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사실, 일본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줬다는 사실만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지만, 한성조약을 살펴보면 일본의 외교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당시 고종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1885.1 한성조약 : 1884년(고종 21)의 갑신정변(甲申政變) 뒤처리를 마무리 짓기 위하여 일본과 맺은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정부의 공식 사죄와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 대한 보상금과 재산보증금 지불을 요구함.
2. 일본공사관 터 : 외교전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법
갑신정변 발발 직후 정변의 주역들은 일본의 최종 지원을 확인하기 위해 공사관에 들렸으며, 3일천하 후 일본으로 망명할 때에도 일본공사관에 피신했다가 떠나게 된다.
일본공사관은 임오군란 때에 불에 탔으며, 천도교중앙총부 자리로 옮김 이후에 다시 불에 타 지금의 서울예대 자리일대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당시 천도교의 교세가 얼마나 컸는지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어서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3. 김옥균집터 : 동아시아의 풍운아, 김옥균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에 김옥균의 집터가 있다고 하여 찾아갔으나,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진 모습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옮겨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이는 곳으로 옮기는 가있는 모습을 보니 역사의 한 부분인 우리의 문화재를 이리저리 쉽게 옮기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참 씁쓸하기도 하였다.
또 김옥균이 조선을 동양의 프랑스로 만들길 원하였으며,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가 리홍장을 만나다는 이유로 상하이로 유인하여 암살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갑신정변과 관련된 장소들을 둘러보고 나니, 교수님께서 천재라고 말할 정도로 똑똑하고 시대를 내다볼 줄 알았던 인물이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아 아쉬웠다.
4. 경복궁 영추문 : 일본군의 기습 점령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다.
경복궁의 서쪽 출입구인 영추문은 조선시대에 문부백관이 주로 출입하던 문으로 1894년 7월 23일 새벽 5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위해 부수고 들어간 최초의 장소이다.
일본은 전주화약 이후 조선정부의 출군요구를 거부 하였으며, 청에 조선 공동 내정개혁을 제안하였다. 이에 청은 텐진조약의 결과에 따라 일본의 철군을 요구한다.
결국 일본은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군을 거부하고 조선정부에 청의 철군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자주개역을 주장한다.
일본공사관과 일본군은 하나가 되어 의도적인 도발과 함께 경복궁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을 목표로 기습하게 되는데, 일본은 더 나아가 ‘즉시 아산에서 청군을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하라’라고 흥성대원군에게 요청하지만 끝까지 거부하자 무력으로 요청서를 받아내고 만다. 이것으로 청군은 더 이상 조선의 수호자가 아니라 침입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청일갈등의 각축장이 되었던 조선의 모습과 당시 우리나라의 자주권, 그리고 세계열강들 사이에서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