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동아시아 근현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5/10)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강의소개 보기 >> 클릭
[동아시아 근대사 : 전쟁의 기억, 평화의 약속] 6강, 19세기 조선-청-일본의 역사가 얽힌 공간을 찾아서
*우정국 터: 동아시아 속의 갑신정변
1884년 한성부 중부 견팡방 전의감 자리에 우정총국청사, 11월 17일부터 우정사무시작을 하였고,
12월 4일 우정국의 개업을 알리기 위한 축하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 12월 8일에 폐지했다고 한다.
- 1883년 베트남을 보호국화하려는 프랑스화 베트남에 대한 주장을 하는 청나라의 대립이 있었다. 1884년 청프전쟁이 일어났다.
1885년 청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는 톈진조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 청프전쟁으로 일본에서는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고조되며 자유민권운동을 하던 자유당마저
일본은 아시아로 진출해야 한다며 정부와 민간대립종식을 주장했다고 한다.
- 청이 조선주둔 가운데 절반이 철수하자 이를 기회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 일본공사의 지원을 받아 경복궁을 장악하고 정권을 탈취했다고 한다.
- 청나라군의 출동으로 3일만에 실패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 경복궁의 일본인이 청군에 쫓기고 일본 거류민 피살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 일본에서 청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는 강경론이 득세했다고 한다. ‘후카자와 유키치의 개전론’
- 1885년 01월 한성조약에서 조선정부의 공식 사죄와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 대한 보상금화 재산 보증금을 지불했다고 한다.
- 1885년 04월 톈진조약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리훙장이 청일 양국이 조선에서 공동으로 병력을 철수하고 향후 파병 시에는
사전에 서로 통고하기로 했다고 한다.
-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은 ‘일본이 아시아의 나쁜 친구와 관계를 끊고 서양의 문명국과 함께 행동 해야 한다.’라고 한다.
- 청은 묄렌도르프 대신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과 외교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 일본에서는 개전론, 개전반대론이 공존했고, 청에 러시아의 조선진출을 함께 저지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일본 공사관 터: 외교전에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는 법
첫 일본 공사관은 서대문 밖 천연정(지금의 금화초등학교)에 자리했었다. 1880년 11월 하나부사가 서울에 들어와 공간을 요청해서 공관을 요청해서 제공했다고 한다. 서대문 밖으로 정해진 것은 서울 도성 안에 외국인의 상주공간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공사관은 1882년 임오군란 과정에서 소실되었다고 하고, 다시 교동에 있는 현 천도교중앙총부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 김옥균을 비롯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거사를 앞두고 일본공사 다케조에 등과 일본측의 재정과 군사적 지원분제에 대해 협의를
할 당시 교동 일본공사관은 신축한지 얼마 안되어 내부 설비조차 완전히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발발 직후 정변 주역들이 고종을 모시러 창덕궁에 들어가기에 앞서 일본측의 지원을 최종 확인하기 위해
일본 공사관에 들렀다고 한다.
- 정변 주역들은 삼일천하 후 다시 일본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고, 그 와중에 일본 공사관은
다시 불에 탔다.
- 이후 일본 공사관은 남산 북쪽 기슭, 지금의 서울예술대학 자리 일대로 옮겼다고 한다.
*김옥균 집터: 동아시아의 풍운아, 김옥균
지금의 화동 정독도서관 자리에 있다. 김옥균이 살 무렵 붉은 언덕 위에 있다고 하여, 홍현댁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 안동출신이고 7살 때 당숙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했고, 1872년에 장원급제를 했다.
- 19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웠다고 한다.
- 1881년 12월 (탐색), 1882년 9월 (수신사, 유학생 파견), 1883년 (국채모집) 3차례에 걸쳐 도일했다.
- ‘동양의 프랑스가 되자’라고 생각했고, 이는 청의 탄압을 뜻한다고 한다.
- 1884년 9월 모의, 일본공사 다케조에의 협조가 있었고, 조선군 1000명과 일본군 150명이 함께 했다고 한다.
- 다케조에는 김옥균이 국채모집을 하러 일본에 건너갔을 때 묄렌도르프와 민비수구파에 협력하여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이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보고를 했다고 한다.
- 삼일천하 후 일본으로 망명했고, 일본정부의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1886년 8월 오가시와라섬으로 귀양하고 1888년 홋가이도로 추방당했다고 한다)
- 1894년 3월 고종이 보낸 자객 홍종우가 리훙장을 만난다는 이유로 상하이로 유인하고 암살했다고 한다.
- 삼화주의: ‘조선, 청, 일본이 동맹을 맺고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응하여 아시아를 부흥시키자!’
- 리훙장이 ‘김옥균은 조선의 반역자이니 조선으로 인도해야 한다.’고 했다.
- 4월에 김옥균의 유해가 도착하고 전국을 순회했다고 한다.
- 일본의 반응은 영웅시, 리훙장의 개입을 주장하며 청일전쟁 명분으로 활용하고 고종 정국 전환용으로 악용했다고 비난했다 한다.
- 김옥균의 죽음은 일본의 상하이행 묵인과 청의 살인 반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경복궁 영추문: 일본군의 기습 점령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다
경복궁의 서쪽 출입고인 영추문은 조선시대의 문무백관이 주로 출입하던 문이라고 한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5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위해 부수고 들어간 최초의 장소라고 한다.
- 일본은 전주화약이수 조선 정부의 철군요구를 거부하고, 청의 조선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제안했다고 한다.
-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의 철군은 교구하고 조선의 내정개혁은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한다.
- 일본은 내정개혁을 빌미로 철군을 거부하고 일본군을 용산으로 이동시킨 뒤, 조선전부에 청의 철병에 대한 압박을 가했다고 한다.
(조선정부가 막지 못하면 일본이 청군을 직접 축출하겠다고 했다)
- 조선은 청일 양군이 철수한 수 자주적으로 개혁하겠다고 주장했다.
- 07월 22일 일본의 최후통첩으로 청국과의 종속관계 파기를 요구했다.
- 07월 23일 일본군은 제5사단 혼성제9여단의 경복궁기습 점령과 서울을 장악했다고 한다. (기습적 도발)
- 일본 공사관과 일본군이 하나되어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전 계획은 경복궁에 대한 전면적인 점령이었다고 한다.
- 영추문을 부수고 기습해 들어오는 일본군에 저항한 것은 약 500여명의 평양 감영 소속 호위군, 총격전은 오전 7시경 고종이
포로로 잡힐 때 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각을 교체한 일본은 ‘조선 정부가 즉시 아산에서 청군을 몰아내 달라는 요청을 하도록
’ 흥선대원군에게 요청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정부의 요청서를 받아내고,
청은 수호자가 아닌 침입자로 되었다.
- 07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군함을 격침했다고 한다.
- 07월 27일 성환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5,000 VS 3,500)
- 청군은 평양에 12,000명을 집중시켰다고 한다.
- 08월 01일 일본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며 내정에 간섭하는 청과 싸워 조선을 독립을 보장’한다며 선정포고를 했다고 한다.
- 경복궁의 수정전은 갑오개혁 당시 개혁기구인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