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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5강, 개인과 권리 : 개인도덕의 회통과 민권의 굴절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5강(2/10), 개인과 권리 : 개인도덕의 회통과 민권의 굴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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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도덕의 회통과 민권의 굴절'이라니, 어려운 제목이다. 우선 생소하기 그지없는 '회통'이라는 말은 '함께 서로 섞인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역사에서 다음 단계로의 이행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늘은 전근대였는데 내일 갑자기 근대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함께 서로 섞이며, 큰 갈등 없이 발전해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민권의 굴절이란 무얼 뜻하는 말일까. 사실 '민권'은 일본에서 온 단어로 서양에는 집단적 권리를 일컫는 개념이 없다. 우리 사회에 개인주의와 자유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는 개인의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국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왜 자유주의가 발전하지 못했나 하는 의문에서 도달한 결론이다. 이날 강의에서는 개인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개인도덕의 회통, 밖에서 들어온 천부인권론이 우리가 알고 있던 유교적 사상과 회통하는 과정, 그리고 민권이 전파되다가 국권 상실이라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개인의 탄생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는 개인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였다. 가문과 신분이라는 집단 속에 자신을 묶어서 생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자유와 권리의식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언은 근대 이전에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개인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노동이다. 노예나 농노처럼 주인이나 영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돈을 벌고 가장으로서 살아가는 근면한 자주노동은 미국 민주주의 발전의 근간이 되었다. 국가 입장에서는 굳이 개인주의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개인적 능력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내는 세금이 국가 수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상의 변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공사분리는 유교에서 굉장히 투철한 의식이었기에 자본주의 윤리와 전혀 충돌하지 않았다.
제일 먼저 양반 계급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실학자들이 최초로 양반 특권 해체를 주장했고, 김옥균은 한발 더 나아가 국력 약화의 원인으로 양반 특권을 지목하며 단칼에 양반 신분을 없애버릴 것을 상소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은 관.리의 상업 활동을 제도적으로 허용하였고 독립신문 또한 '특권을 고수하는 양반은 개명 진보를 방해하는 무리'라고 비판하였으나, '굶어도 양반'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양반은 끝까지 노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권신분을 가리키던 말 '양반'이 '놀고 먹는 자'라는 뜻으로 전락하고 오늘날에는 누군가에 대한 불만을 표시할 때 쓰는 비하 명칭으로나 남아있는 뒷편에는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는 셈이다. 자주노동과 더불어 성찰적 자아를 갖춘 개인의 탄생에 영향을 준 결정적 계기는 19세기 내내 일어났던 농민항쟁이다. 인민은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초유의 경험과 평민도 하늘과 일체가 될 수 있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준 동학은 우리 스스로 이미 쌓고 있던 개인화의 토대였다.
개념으로서의 개인과 개인도덕의 회통
맨 처음에는 우리도 일본처럼 '개인'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고 '자기'라는 단어로 대체했다. 독립신문에서 개인이라는 단어는 주로 사적 영역을 나타내는 의미로 '재산'이나 '권리'앞에 썼으며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면 백성 개개인 혹은 백성, 인민, 민족에서 분화한 개인적 활동을 의미했다. 우리나라에서 개념으로서의 개인은 1905년 이후 정착되었다. 여기서 개인과 국가는 독자적인 하나의 영역이자 대등한 위상이었고 개인은 더 이상 국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었다. 회통이란 국가에서 분화된 개인이 지켜야 할 도덕과 앞서 설명한 근면한 자주노동의 개념을 민중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다.
1908년 윤리학 교과서에 나타난 도덕의 회통은 '유교와 기독교 어느 한 가지만 받아들이는 건 위험하고 둘 다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논리였다. 개인도덕으로 충효를 강조하면서도 용감을 강조했는데, 이는 저항을 의미하고 지킬 권리가 없으면 발휘할 수 없는 덕목이다. 남녀 평등한 권리를 말하는 부분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타고난 자질이 다르기에 서로 다른 일을 해야 마땅하다는 논리가 펼쳐진다. 생활유교의 확산은 18세기 신분제 해체의 아이러니다. 신분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양인들이 천민이 아닌 양반의 문화, 즉 고급문화를 흉내내면서 전근대적 유교 윤리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가 일반화된 데서 알 수 있듯 여성의 지위가 조선 전기보다 하락한 원인이다. 교과서에서는 근면한 자주노동을 사람의 도리라는 굉장히 유교적인 말로 표현하였고, 상황과 질문을 실어 효도, 우애, 우정, 자유, 의무와 같은 유교와 민주주의 덕목을 함께 가르쳤다. 이처럼 곳곳에서 전근대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가 묘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회통으로서의 천부인권과 '권리'의 굴절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던 시작점은 서양과 마찬가지로 천부인권론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과 미국 독립선언서로 대표되는 안과 밖으로부터의 천부인권론 또한 개인화 과정과 마찬가지로 회통하며 확산되었다.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리는 그 출생과 갖추어지게 되는 것으로서 얽매임이 없는 독립하는 정신이며 무리한 속박을 받지 않고 불공평한 눌림을 당하지 않는 것"이라는 유길준의 서유견문, "통의란 사람이 스스로의 생명을 보존하고 자유를 구하고 행복을 바라는 것"이라는 박영효, 그리고 비인간적인 형벌과 연좌제를 폐지한 갑오개혁은 결국 모두 천부인권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 "동양 사람들은 이 뜻을 알지 못한다"는 패배주의적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던 뎨국신문이 있는가 하면, 천부인권과 지위의 불평등이 공존할 수 있다는 논리 또한 존재했던 기록은 앞서 말한 회통의 근거라 할 수 있다.
개념으로서의 개인을 인식한 이후에는 인권사상이 대두되는 것이 서양 근대화의 수순이다. 그러나 유럽의 '권리'라는 단어와 우리나라에서 쓰인 '민권'이란 단어는 어감이 다르다. 권리에는 개인의 권리라는 느낌이 있지만 민권에는 사람들의 권리라는 집단주의적인 느낌이 있기에 개인주의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사실 민권은 굉장히 공동체주의가 강한 일본에서 온 개념으로 유럽에는 이런 말이 없다. 인권과 분리된 민권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면서 일본에는 개인적 인권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에도 개인주의와 인권의식이 비교적 낮은 이유 중 하나가 이러한 이유와 더불어, 국권상실기를 거치며 민권이라는 집단 권리가 개인 권리보다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민은 국가의 근본이며 민이 튼튼해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박영효의 말은 우리나라 현대사가 입증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경제성장의 기본"이라는 말과 통하는 면이 있다. 민권이 전파되던 시기에는 박영효처럼 민권을 국권보다 중시하는 입장과 더불어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였다. "민권의식이 튼튼해야 국권도 지킬 수 있다."고 국권은 민권에 기반한다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국권이 없고서 민권을 구하니, 민권을 어디서 얻으리오."처럼 국권을 민권보다 강조하기도 하였다. 민권이 확립되어야 국권도 수호된다는 민권의식은 일제 치하 독립운동의 기반이었고, 독립운동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원인이 되었다.
생각해 봅시다
1. 19세기 개인도덕의 회통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 유교윤리 자체가 회통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서양 자본주의 윤리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상당했다.
2. 천부인권과 민권의 대중화가 빨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농민항쟁기 투쟁의 경험으로 사람들에게 천부인권에 대한 인식이 이미 존재했다. 비록 제도화 면에서 부족하기는 했으나 운동적 성향은 충만한 사회였다.
3. 국권론자가 민권론자를 압도했을까?
> 압도했을 것 같지만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집권층의 책임의식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선은 전쟁이 아니라 외교로 망한 나라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민중은 농민전쟁에서 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아 망했고 권력은 외교를 못해서 망했다고, 독립운동의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은 조선 말기 민중과 권력층의 입장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결핍이 지속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 국권침탈이 민권 박탈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국권이 상실되는 과정에서 없어졌다.
글: 자원활동가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