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후기 l 강좌 후기를 남겨주세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4강, 문명과 도시 : 도시 문명의 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4강(2/3), 문명과 도시 : 도시 문명의 꽃,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
강의 소개 보기 ☞ 클릭
오늘 강‘문명’은 18세기 계몽주의 사조가 유행하면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문명이 국가 발전의 징표라는 주장은 유럽 사회가 발전의 정점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곧 문명과 야만을 분류하는 제국주의의 논리가 되었다. 선교사와 함대를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과 맞닥뜨린 동아시아 국가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구를 모방했으며, 당대 조선 사회에서도 인기 지식인이었던 청의 량치차오는 사회진화론 입장에서 강자를 추구하고 유학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 전환을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사는 체험’이라 일컬었듯, 19세기 조선 사회에서 유교적 어법과 근대적 사고방식이 민중의 의식에 혼재하고 있었다. 물질문명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정신문명은 개인 일상생활에서 시민사회로 발전하였으며 그 사이에는 몇 가지 통로가 있었다.
문명의 전파 통로, 그 첫 번째: 신문
신문은 나라의 안과 밖, 그 넓은 세상 소식을 알려 주는 통로였다. 특히, 자국어로 된 신문은 인민의 문명화에 가장 효과적이며 민권을 깨우치는 데 있어 위력적인 병기였다. 최초의 근대적 신문은 1883년 10월 창간된 한성순보였다.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였고 외국 기사가 70%를 차지했던 이 신문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지만, 이후 하층민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뎨국신문과 지식인과 상류층이 독자였던 황성신문처럼 특정 계층을 위한 신문이 등장했고, 외국인인 베델이 창간했기에 일제의 압력 없이 반일 논조를 펼칠 수 있었던 대한매일신보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신문 중에서 인민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단연 독립신문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창간된 최초의 순한글 민간신문이다. 정부 정책을 협조하고 독립협회 주장을 대변하며 국민을 계몽하였고, 보다 과격한 내용의 영문판을 통해 세계에 한국 입장을 소개하기도 했다. 가장 큰 역할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지원한 것이다. 처음엔 주 3일 발간하다가 일간으로 전환한 독립신문은 시민들이 열광적으로 구독하여 80여명이 돌려본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문명화에 관한 내용은 크게 개인, 관계, 제도의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개인적 측면에서는 매너의 생활화와 분수에 맞는 생활을 권장했다. 언뜻 보기엔 굉장히 서구화된 매너이지만 그 중엔 우리가 전통적으로 지켰던 예절도 상당 부분 들어있었다. 관계 면에서는 신뢰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강조했다. 인종의 차등 분별은 사람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거나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교육하고 동등권을 주는 것이 옳다는 대목 등에서 독립신문이 인종과 양성평등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도적으로는 교육을 강조하고 기독교를 수용하였는데, 이때의 기독교는 선진 문명의 한 요소로서 포교의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지는 우월적 문명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문명의 전파 통로, 그 두 번째: 학교
학교는 서구 문명으로의 전환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제도이자 수단이었다. 조선 정부가 국민 교육에 소극적인 가운데 인민이 주도하여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을 선도한 특징을 갖고 있다. 조선 말기의 교육은 위태로운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근대인으로서의 입신양명을 넘어 구국계몽을 실현하고자 했던 인민의, 시민의 국민적 역량이 발현된 근대화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초기 정부가 주도했던 동도서기론적 교육 개화 정책은 서양 기술의 수용에 필요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외국어, 농업, 군사 기술 등 실업교육 기관에 그쳤으며 국민교육에는 무관심하였다. 국민 교육 제도가 성립된 것은 갑오개혁 때에 이르러서였다. 우선 교육 전담 부서인 학무아문을 설치 후 학부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 주요 도시에 소학교를 세웠다. 소학교는 1895년에서 1905년까지 전국 각처에 100여개가 설립되었다. 학무아문을 학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고등교육이 누락되었는데 일제의 개입이라 추측하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고등교육을 선도한 것은 사학이었고,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사학이 강세를 보이는 원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사립학교인 원산학사는 개항장인 원산의 상인과 유지들이 1883년에 설립하였다. 이후 선교를 위한 기반 구축 차원에서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기독교계 학교가 등장했다. 1908년 전국 사립학교 수는 5천여 개, 학생은 20만 명에 달해 사립학교 설립 붐이 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를 빼앗기기 직전에는 구국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이 늘어났다. 이승훈은 오산학교 개교사에서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귀중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시기 교육 계몽 운동 또한 민간이 주도하였다. 독립협회 제 1회 토론회 주제가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었던 것을 보면 교육 문제가 어느 정도로 화제가 되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상동청년학원 취지서(1904)에서는 ‘빈곤이 날로 심해지고 재원이 해마다 고갈’되는 이유가 “학업을 먼저 힘쓰지 못하고 당장 생계만 구차히 도모한 데 있다.”라고 말하며 “지금 천하의 사람들이 모든 일에 학문으로 자본을 삼지 않는 자가 없다.”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도시의 탄생
문명화의 공간적 변형은 바로 근대적 의미의 도시의 탄생을 가져왔다. 도시의 탄생은 물질적인 서구화의 척도인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서구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촉매제였다. 도시화의 첫 번째 대상은 개항도시 부산이다. 개항 직후 초량 왜관이 일본의 부산전관거류지로 개편되고 일본 영사관을 비롯하여 경부철도, 철도역사, 세관 등을 건설하여 대일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1910년에는 일본인이 조선인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한성부(서울)는 “이 비상한 변화는 4개월 만에 이루어졌다. 서울 거리가 너무 변하여 1894년에 이 책을 쓰기 위해 찍은 대표적인 빈민촌의 모습이 쓸모없게 되었다.”라는 비숍의 글을 포함하여 단 몇 년 사이에 서울의 모습이 몰라보게 변했다는 회고가 여럿 보인다. 단기간 안에 도시화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한제국의 한성 개조 사업이었다. 경운궁 중심으로 개방적 근대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산업 개발, 임시가옥 철폐 및 개천과 우물 정비, 공원 등 신설비 도입을 진행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파고다 공원이 대한제국 때 조성된 인조 녹지 공간이다.
다만 도시로 부가 집중되고 지역 격차가 심해진다는 개발의 양면성도 이때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모든 사업도 서울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상점의 상품은 서울로부터 공급된다. 모든 조선 사람의 마음은 서울에 가 있다.”는 비숍의 서술이나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 함.”이라는 독립신문의 한 구절을 보면 이미 양극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도시화의 결과이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은 <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에서 “공권력이 집중된 중앙 정부의 소재지로서 모든 지적 활동을 독점하고 경제적 활동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라고 수도와 지방 분열을 설명한 바 있다.
시민사회의 탄생: 도시 속의 자발적 결사체, 공론장, 집회와 시위
도시라는 공간에 모여든 인민은 시민으로서 자발적 결사체를 결성하고 공론장을 활용하고 집회와 시위를 통해 자유로운 의사를 표현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이 자발적 결사체 독립협회와 미디어 공론장 독립신문, 그리고 저항과 비판의 인민 자치의 장이었던 만민공동회이다. 독립협회는 공공성을 지향하며 집회를 통해 자율적이고 공개적인 토론을 펼치며 여론을 형성하는 자발적 결사체의 역할을 다했다. 안건마다 회원의 직접 선거로 총대위원을 선출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직접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운영한 것도 주목된다. 독립신문은 스스로가 정부와 인민을 교통케 하는 공론장임을 자부했다. 만민공동회는 근대적 시위와 집회 문화의 원형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독립신문의 민주주의 담론 또한 앞에서 이야기했던 문명화 담론처럼 개인, 관계, 제도의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다. 개인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권과 주권의식이다.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고 사람마다 자기 신상에 자유권을 갖고 태어난다.”거나 “조선 백성들이 가진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를 쓰지 아니하니까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이며 나라가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백성의 손에 달렸다.”는 문장들이 그 증거이다. “문을 열어놓고 만민이 보는 데서” 나라 일과 상회 일을 의논해야 한다는 대목은 공개적이고 계약적인 관계의 요구이며 “지혜를 연구하고 일심합력하면 그 가운데서 강한 힘이 생겨 도리어 힘 있는 사람을 압도하는” 연대의 필요성을 이 당시부터 느끼고 있었다. 제도 면에서는 인민권 보호, 대의제, 권력 감시, 법의 형평성, 무죄 추정의 원칙 등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구성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인민들이 받아들였던 서구의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인민들은 생활의 문명화와 언론에서 말하는 내용을 수용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선다.
1898년 김홍륙이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독을 넣은 사건을 계기로 정부가 고문과 악형, 연좌제 부활을 시도하자 인민들은 생명과 재산의 자유권 침해에 항의하였다. 법에 근거한 처벌과 고문 금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법률과 규칙을 준수하지 않은 정권 퇴진 요구로 발전했다. 고종은 거부하였고 유생은 독립협회 비난 대자보를 붙였지만 결국 박정양 개혁 정부가 구성되는 결말을 맞았다. 미국 공사는 평화적 혁명이라고 평가하였다. 자발적 결사체에 대한 이해와 갈등 역시 팽팽한 긴장구도를 이뤘다. 정치 문제에 관한 토론과 제한된 장소에서의 집회만을 허락하는 고종의 입장에 독립협회는 정치 토론은 정부의 부정부패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며 언론의 자유권은 양보할 수 없는 민권이라며 반박했다. “정법을 문란하게 하는 신하를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이기 때문이었다. 독립협회의 주장은 ‘법을 지키지 않은 우리를 잡아가라.’는 시민불복종운동으로 전개되었고, 고종은 ‘신하의 의무’라는 유교적 사고방식으로나마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19세기의 민중운동의 마지막을 빛낸 만민공동회의 개최와 해산은 독립협회와 함께 추진했던 의회개설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의회론은 입법과 행정을 분리시켜 전문화하면 국정을 능률적으로 집행할 수 있고, 공개적 찬반 토론을 통해 인민의 의사를 민주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정치의식을 높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양원제를 지향하며 중추원을 개편하여 상원을 설립하였다. 헌의 6조는 의회의 조약비준권, 재정 일원화, 예결산제도 확립, 공개재판제도와 증거주의, 법률 준수 등 제반의 민주주의 정치로의 진전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전복하고 공화제를 내세울 반역을 모의하고 있다.”는 내용의 익명서가 등장하였고, 정부는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긴급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불법화한다.
처음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은 독립협회였다. 하지만 만민공동회가 연일 만여 명을 헤아리는 시민이 참여하는 집회와 시위의 장이 된 것은 독립협회가 폐쇄되고 간부들이 죄다 체포되었을 때였다. 또렷한 지도부와 운영 방침 없이 자발적인 시민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며 꾸려간 공동체가 바로 만민공동회였던 것이다. 당시 서울 인구 17만 명 중 매일 1~2만명이 모여 연일 철야농성을 했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지지를 표하며 성금, 물품을 보내왔다. 만민공동회를 엄호하던 200여명의 군인이 지지를 표명하며 스스로 해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189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온 만민공동회 운동은 정부의 폭력 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하지만 일사분란한 지도부 없이 시민의 자발성에 의거해 몇 달 간 집회와 시위를 지속했다는 점, 그리고 전국에서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면서 민주주의 가치 구현을 위한 연대의 전통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성과를 남겼다.
“반대가 없으면 진보가 없나니” – 독립신문, 1898
강의 시작 전에 선생님께서는 질문을 하나 던지셨다. 1894년까지만 해도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유교적인 화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1898년 독립협회의 화법은 근대적이다. 어떻게 사람들의 주체의식 각성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후기를 쓰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근대적 시민의식은 불과 4년 만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한 세기 내내 지속되어온 투쟁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이 서서히 형성해왔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시민의식이 서구 문명이 가져온 물리적 근대화 및 우리보다 한발 앞서 꽃피운 사회사상과 맞물려 폭발적인 발전이 일어난 것이다.
주목할만한 또 다른 지점은 19세기 말 민중들이 도달한 민주주의의 수준이 21세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거나 오히려 더 급진적인 측면마저 보인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이날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료이다.
“개화한 나라일수록 시비하는 공론이 많고 시비가 많을수록 개화가 점점 잘 된다. 백성이 정부에 반대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나 반대가 없으면 진보가 없나니 대한 백성들은 어느 때든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시비하고 반대하여 정부로 하여금 방심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자.” - 독립신문, 1898.11.7
116년 전에도 오늘날의 사회에도 이견은 존재해야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주류와 다른 의견은 존중 받지 못하고 억압당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 안과 밖의 엄청난 괴리가 존재하는 가운데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데에서 우리나라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제와 독재정권이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갖은 시도를 해왔음에도, 시민의 힘은 이른바 87년 체제라고 불리는 제도적 민주주의를 일구어냈다. 그러니 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두고 우리의 시민의식이 19세기 말에 비해 별다른 발전이 없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이제 막 다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글: 자원활동가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