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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1강, 인민 : 신분해방, 여성해방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 1강(1/13), 인민: 신분 해방, 여성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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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울 때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이다.
해방 후 1948년 미군정이 신탁통치를 시작하면서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 이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신분해방의 물결이 일고 만민평등 사회로의 진입이 시작된 시기는 그보다 훨씬 전인 19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와 19세기는 세계사적으로 신분 해방의 격변이 혁명으로, 민란과 변란으로 요구되던 시대였고 조선 역시 서구나 중국, 일본 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896년에 상하귀천이 없는 만민평등의 주체인 인민을 위한 신문이 창간되었다는 선언은 서재필이 미국의 영향을 받고 쓴 것이 아니라 당대 민중들이 요구하던 내용이었다.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지향하는 체제는 독재의 안티테제인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근대로의 희망 여정>는 이처럼 민족주의를 넘어 민주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며 인민, 자치, 개인도덕 등의 근대적 가치가 우리 사회의 특수성과 맞물려 어떻게 나타났는지 돌이켜보고자 하는 강좌이다.
노비 해방의 길
제임스 팔레라는 서구 학자는 노비가 17세기 조선 인구의 30%를 넘었다는 것을 근거로 조선이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노비가 노예와 마찬가지로 인신매매가 가능했고 주인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며 신분이 세습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 정조 시대부터 신분제 해체의 조짐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18세기 후반 노비들이 급격히 감소한 원인은 일보다는 신분 차별 자체에 고통을 느끼는 노비의 자각이었다. 부를 쌓은 이들은 세금을 내는 양인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수없이 도망을 쳤다. 결국 1801년 조선 정부는 중앙관청의 공노비 66,076명을 해방시킨다. 현실을 인정하고 세금을 확보하자는 입장이 폐단만 제거하자는 보수적 입장을 누른 것이다.
1894년은 가히 노비해방의 해라 부를만하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아래로부터의 개혁과 갑오개혁이라는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를 해방하자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농민군 내 천민부대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위가 점점 올라갔으며 노비 출신의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했다. 갑오개혁에서는 공식적으로 공사노비의 제도를 모두 없애고 인신의 판매를 금하였다. 이후 독립협회가 인권을 강조하며 불법적 노비 매매 등 노비제 잔재를 청산하는 데에 앞장섰다. 양반들의 반발과 저항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여성 해방의 길
시작은 가정부인이자 종교인, 사회인인 활인(活人)으로서의 여성관을 세운 동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의 폐정개혁안은 과부의 재가 허용을 요구하였고 이는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 이후 조선의 여성해방운동은 남성 지식인 및 교육기관에 의한 계몽과 여성의 정치적 진출이라는 두 갈래 길을 걷는다. 독립협회의 여성해방론은 조혼, 축첩, 과부재가금지 등 전근대적인 관습 폐지를 주장하고 자유연애결혼, 부부 동등권 등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현모양처론의 영향으로 여성 사학이 전국에 170여개 설립되었다. 또한 여성은 동학농민운동 전투에 참여하였고 일부는 지도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 단체 참여도 늘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을 여성들이 주도하였고 이후 의병운동, 3.1운동 등에서도 여성의 참여는 이어졌다.
동시대 서양, 중국과 일본과 비교했을 때에는 아쉬운 점이 여럿 보인다. 애초에 여성을 계몽하던 주체는 박영효 등 남성 지식인이었고 여성교육도 사회인이 아닌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여성들이 남성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정치적 진출을 했던 경우가 많은 대신 여성에 의한 여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지는 못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백정 해방의 길
조선의 백정은 가축 도살 및 판매자, 유기 제조인, 광대, 기생 등 특정 직업 종사자로서 천민으로의 차별 대우가 극심하였다. 무어 목사의 회고담에서는 천민 해방이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1894년의 풍경이 나온다. 그 전에는 백정들이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 해서 한눈에 신분이 드러났었는데 갓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령으로 기뻐했던 흑인들’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고 여겨진다. 이후 신분제 잔재를 없애는 과정에서 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를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었다. 조직과 와해를 거듭하던 백정들이 조직한 자발적 결사체가 바로 형평사였다.
발단은 백정 자녀의 학교입학 거부 문제였다. 계급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 친목 등을 추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나던 일본 특수부락민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았고 그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선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일본의 부락민의 차별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후 형평사는 계급 해방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운동과 연계해 발전해나갔으나 1930년대 들어 극악해진 일제의 탄압 아래 다른 사회운동단체와 함께 해체되고 말았다.
민주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 우리 역사에서 희망을 찾는 올바른 방법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평등함"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헌장 제3조다. 신분해방운동의 최종적인 지향점을 이토록 간단명료하게 서술하기도 힘들 것이다. 노비와 백정, 여성이 차별과 배제의 대상에서 평등의 주체로 거듭나기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제도 개혁과 자발적 결사체를 통한 운동이 맞물려 이루어낸 결과였다. 전근대와 근대는 칼로 자르듯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고 민주주의와 평등은 외부에서 주어진다고 해서 이식되는 가치가 아니다. 일제와 독재정권 아래에서 억압당하고 후퇴하였다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민중의 열망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이제 첫 강을 들었을 뿐이지만 외세 개입이 없었어도 자발적인 근대화가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긍정적 역사관’을 갖는 일은 일제 식민통치와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이들에게 동조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근거는 앞으로 이 강좌를 들으며 하나하나 배워가고 싶다.
글 : 자원활동가 박유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