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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7강(12/23),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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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가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종강 11일 만에 올리는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근대편’의 마지막 강의 후기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강의 자료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수강생들의 개인 이메일 계정을 통해 공유해주셨습니다. 제 계정으로는 베버 파트만 메일이 와있긴 하던데 다른 분들은 마르크스 ppt까지 다 받으신 거죠? 오늘은 자세한 내용보다는 수업 진행과 소감 위주로 간략하게 후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강의의 마지막 주인공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지난 보강에서 마르크스 공부를 위해 베버를 다루었었고요. 강의 초반부에는 보강을 함께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베버와 마르크스를 다시 한 번 비교해보았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둘은 근대에 벌어지고 있는 비극의 주범으로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지목하고 어떻게 이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지만 제시한 대응 방이 달랐죠. 이에 대해서는 김만권 선생님께서 결론을 내리며 더 명확하게 설명해주시니 저도 후기를 마무리 지으며 자세히 적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계속 베버처럼 멋있게 늙어야 한다고 해서 재밌었어요. 베버는 실제로 젊은 시절의 모습보다 나이 든 모습이 중후하고 근엄해 보이죠. 반면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정말 꽃미남이 따로 없어서 여성 수강생 분들의 마음을 흔들었으나 중년의 모습은...ㅎ 제 생각엔 목적과 수단의 일치를 통해 개개인의 진정한 합리성을 구축할 것을 주장한 베버는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합리화해서 편한 인생을 살아서 외모가 멋있어진 반면,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위해 온갖 고생을 해서 외모가 쇠퇴하지 않았을까 해요...ㅎㅎ 물론 농담. ^^;
그러고 나서 김만권 선생님께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의 생애에 대해 말씀해주셨어요. 마르크스의 집안과 청년시절의 이야기부터 각국을 떠돌다 런던에 정착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마르크스의 삶이 한 편의 영화처럼 펼쳐지는 듯 했습니다.
학자로서 마르크스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바로 경제학자로서의 마르크스와 철학자로서의 마르크스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두 마르크스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룬트 리세>라는 작품을 읽으면 그 오해가 풀린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있는 책은 아닌데 김만권 선생님께서는 수강생들에게 설명해주셨답니다. 요약하자면 ‘인간 소외(마르크스 철학) 때문에 구조 변동(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시작 된다’ 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의 <1884년 경제-철학수고>에 담긴 내용을 배웠습니다. 마르크스는 “국민경제학은 사적소유라는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국민경제학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는다.”며 고전 경제학파를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는 경제모델들의 전제가 되는 사적소유가 애초에 왜 그런 것인지조차 고전 경제학자들은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사적소유까지 인정하는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을 왜곡합니다. 원래 노동은 인간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장 창조적일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인데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을 하는 이와 이윤을 얻는 이가 다릅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이윤의 부스러기만 가져가고, 그 부스러기를 두고 또 서로가 경쟁함으로써 더 가난하고 피폐해집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노동 소외’라고 명하고 구체적으로 네 가지 현상을 지적합니다. 후기에서는 생략. ^^
이런 현실을 타파하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고 그에 대항적인 합리성을 지닌 사회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그 변화의 주체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이며, 이 때 이들이 갖추어야 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합리성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보편적 역사 발전 법칙에 따라 자본의 축적이 극대화되면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계급의식’의 부재 때문입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이 스스로 자본주의의 피해 당사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계급의식에 따라 사고하지 못하는 것이죠. 따라서 마르크스는 정말 이 세계가 변화하려면 노동자들이 정치 교육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확실히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2014년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실험은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고,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계급을 두 부류로 나누기엔 너무도 분화된 사회 속에서 각자의 가치를 가진 채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자본가들의 헤게모니에 장악된 채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는 의식과 행위에 동조하죠.
오늘 강의의 결론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베버와 마르크스입니다. 두 사상가 모두 자본주의라는 운명에 저항하고자 했으나 한 사람은 자본주의라는 주어진 운명 내에서 생각했고 한 사람은 그 운명 자체를 깨부수고자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운명에 맞서는 일을 개인의 책임으로 넘겼기 때문에 개개인을 통합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지도자,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생각해냈다면 한 사람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민주적 집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적 합리성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이러한 철학의 차이는 실제로 두 인물의 삶에서도 차이를 낳았습니다. 한 사람은 의회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한 사람은 스스로 인터내셔널을 창설했죠.
실제로 마르크스보다 조금 더 늦게 태어나고 죽은 베버는 ‘마르크스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독단적이며 책임질 수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마르크스를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 칼 뢰비트는 둘을 비교한 자신의 저서에서 ‘베버는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본주의의 병폐를 진단만 할 수 있었지만, 마르크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을 우리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신념하에 하나의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 강의 후기까지 쓰고 나니 비로소 종강이 실감납니다. 종강 당일에는 더 이상 강의가 없다는 생각에 슬프더니 해가 바뀌고 후기를 쓰면서는 개운한 기분도 드네요. 이 강의에 자원활동가로 참여할 수 있었던 건 정말 굉장한 행운이었어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또 뵙겠습니다. ^^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