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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보강,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베버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보강(12/20), 자본주의 합리성은 진정 합리적인가? -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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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베버 (Max Weber 1864.4.21.-1920.6.14.)
느티나무에서 이례적으로 강의 보충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온갖 연말 모임을 뒤로 한, 또는 게으름을 툭툭 털고 집에서 나선 열정적인 수강생들이 스무 명 가까이 모였어요. 게다가 보강과 불금이 주는 특별한 느낌 덕인지 박주련 선생님께서는 뜨끈뜨근한 붕어빵을 두 봉지 가득, 구문숙 선생님께서는 샛노란 군고구마를 한 아름 간식으로 들고 오셨답니다. 절로 마음이 훈훈해지는 보강이 아닐 수 없지요?
오늘의 사상가는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입니다. 7강으로 준비되어있는 칼 마르크스를 공부하기 전에 꼭 비교하며 공부해야 할 사상가라서 보강으로라도 베버를 준비하셨다는 김만권 선생님의 말씀. 저는 보강이니 만큼 간단하게 후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으나 그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슬픔.
마르크스와 베버는 공통적으로 둘 다 자본주의가 낳은 근대의 비극을 지적했던 사상가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합리성 안에 모순이 있다면 그 걸 깨고 새로운 합리성을 만들어서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베버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을 ‘철장(iron cage)’에 비유하며 결코 우리가 떨쳐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섹터’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만권 선생님이 강조하신 것은 책의 내용보다 베버가 책을 썼던 이유입니다. 베버의 질문은 ‘왜 유독 서구 사회에서만 근대적 자본주의가 나타났는가?’, ‘어떻게 무한한 이윤추구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입니다. 정리하자면 왜 굳이 서구에서 끝없는 이윤추구가 인간의 덕인 양 하는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냐는 것이죠.
책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청교도의 구원예정설로 인해 청교도인들은 열심히 일하면서도 검소한 삶을 꾸리며 부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특히 신을 위해 행하는 지속적인 노동과 부의 추구는 하나의 소명으로서도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렇게 근대적 자본주의는 서구에서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직까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베버는 이윤추구 행위 자체는 사회적 병폐를 만들어내지도 않고 자본주의의 특징도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이윤추구는 언제나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죠. 자본주의가 문제가 되는 건 그 이윤추구가 무절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절제한 이윤추구는 바로 그 프로테스탄트 윤리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베버는 지적합니다.
자본주의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종교적 공동체인 섹트가 있었습니다. 섹트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심적 터전이었고, 개인은 섹트로써 자신의 신용을 대외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고도화, 개인주의, 도시화 등으로 인해 섹트는 급속도로 없어졌습니다. 자본주의가 자기 스스로를 제어하던 윤리적 터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종교적 윤리로 발전한 자본주의는 섹트의 쇠퇴와 함께 계산만이 남으며 급속히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베버는 종교윤리가 상실된 자본주의는 끝없는 타락의 길로 빠질 것이며 “영혼 없는 전문가”를 양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2. 세계의 합리화
베버는 근대 사회가 무엇보다도 탈주술화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근대의 탈주술화란 근대세계가 이성을 초월하여 중세를 지배하던 신의 원리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합리화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버가 볼 때 근대세계의 합리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첫째가 가치의 영역들이 구분된 것, 둘째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맞물려 사회가 관료적·제도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첫째, 가치 영역의 구분이란 모든 가치를 통합하던 신의 권위가 사라지고 과학, 도덕, 법, 종교, 예술 등이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베버는 이를 문화적 분화(cultural differentiation)라고 말하며 더 이상 이러한 가치들은 화해 불가능하므로 근대는 가치다원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둘째, 탈주술화가 낳은 합리화는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낳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를 하는 데에 정확한 계산을 적용하면서 조직을 체계화시키고 노동 효율을 극대화시킨 것을 자본주의적 합리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의 행정 조직에도 파고들었고, 이내 사회 곳곳으로 침투하였습니다.
더불어 베버는 이러한 극단적 합리화가 오히려 비인간화를 초래하면서 운명적으로 비합리성을 길러낸다고 말합니다. 이윤추구가 목적이 되고, 이를 위해 이성을 도구화시키는 삶의 방식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라는 뜻입니다.
3.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합리성
베버는 이미 사회의 가치가 너무 분화된 버린 탓에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물든 근대를 돌이킬 수 없을 것이며 이를 우리의 운명, 즉 빠져나올 수 없는 ‘철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절망하고 있자는 뜻이 아닙니다. 베버가 볼 때 철장에 갇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자유를 되찾는 길이었습니다. 곧, 우리의 자유는 철장을 벗어나려는 비현실적인 소망을 버리고 합리적인 목적과 이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수단을 찾을 때 얻어진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베버는 개인들이 자신이 설정한 목적과 수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책임윤리를 말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초래한 비극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개인이 더 강력한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자유를 찾으라고 말한 베버.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을 구조나 집단이 아닌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베버는 개인이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해버릴 위험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자유를 쟁취할 합리성의 주체로서 개인을 지목했던 것입니다.
4.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바이마르 헌법 제 48조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베버는 니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 개념도 상당 부분 니체의 위버멘쉬와 맞닿아 있죠,
가치가 분화된 사회에서 각각 다른 개인들을 통합하여 국가가 지향할 점을 결단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이가 카리스마적 지도자입니다. 베버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전통주의, 공식적인 법적-합리적 권위와 관료적 규칙들과 단절할 수 있는 상징적 변화 및 제도와 법을 만들 수 있는 초일상적인(extraordinary) 힘’으로 정의합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그냥 어디선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정치라는 시스템에서 길러진다는 것이 베버의 생각입니다. 각각 신념이 다른 수많은 군소정당들을 적절하게 규합하고 그 속에서 자기 권력을 쟁취해내어 지도자가 된 이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추고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이렇게 보면 베버가 바이마르 헌법 초안 위원회의 고문으로 있으면서 바이마르 헌법 제48조를 매우 강조했던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이 문제의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평화를 위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고 공공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이 조항을 악용해 권력을 잡아 논란이 되었고, 우리나라 또한 이 조항을 따와서 문제가 되었었죠.
김만권 선생님께서 영화 ‘변호인’을 적극 추천해주셔서 저도 어젯밤에 보고 왔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여운이 한참 동안 가시질 않았었는데 송강호의 외침이 특히 머릿속을 맴도네요. ‘국가란 국민입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독재자로 변질되었던 역사, 독재자의 딸이 그 자신 역시 독재자가 되어 자기의 입으로 약속했던 국민 행복을 가장 거스르고 있는 오늘을 생각하니 베버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국가가 국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괜찮은 문제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 자원활동가 김슬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