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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6강, 근대의 개인은 진정 주체적인가? - 니체
[고전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근대편] 6강(12/16) 근대의 개인은 진정 주체적인가? -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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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 한 강 지나오다 보니 벌써 여섯 번째 시간이네요. 김만권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수록 정치사상을 더 넓고, 깊게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정치철학을 선생님께서 쉽고 재밌게 가르쳐주셔서 흥미가 붙은 거겠죠. 김만권 선생님은 느티나무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기강사라고 불리시는데, 저도 이제 선생님의 그 타이틀 앞에 겸허히 고개를 숙이고 박수를 보내게 돼요.
매 수업의 첫머리에는 지난 시간의 내용을 잠깐 짚어봅니다. 원래는 수강생들이 써냈던 질문을 선생님께서 답변해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오늘은 근래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칸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대자보 행렬들이 바로 칸트가 말했던 ‘이성의 공적 사용’이죠. 덕분에 최근 들어 깊은 회의감에 빠져 있던 선생님께서는 한 주 동안 즐거우셨다고 합니다.^^
1.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선생님께서는 니체를 기분 나쁜 사람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너네 바보지? 생각도 없지? 내가 하는 말도 못 알아듣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실제로 니체는 천재였습니다. 24살에 이미 교수로 채용되었고, ‘아포리아’라고 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형태와 ‘계보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개발하였습니다. 그것도 대충 만든 게 아니어서 ‘아포리아’는 누구든 한 번 쯤은 시도해보고 싶게 하는 매력적인 글쓰기이고, ‘계보학’ 역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진리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뛰어난 방법론이라 합니다.
이쯤 되면 우리 같은 범인들은 열등감과 질투가 샘솟지 않나요? 게다가 저는 니체가 교수가 되었다는 바로 그 스물 네 살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있거든요. ‘니체는 벌써 이 때 교수를 하고 있었구나... 난 뭐하고 산 걸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그러나 천재는 불행하다고 하던가요? 니체는 평생을 편두통과 안질환에 시달렸고, 매독에 걸리기도 하고, 심지어 마지막 10년 동안엔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언제나 유명해지기를 바랐으나 딱 죽는 그 날부터 유명해졌다죠.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무시당하고, 종교계와 도덕주의자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물론 니체는 이후 철학계와 문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2. 자신을 망각한 근대의 개인
우리는 원자의, 원자적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 모든 인간질서의 목적은 인간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삶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반시대적 고찰>
계몽, 이성, 자율성으로 상징되는 근대를 살았던 사상가들은 두 가지 전제를 놓고 ‘개인’을 가정합니다. 첫째는 모든 개인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결정에 따라 행위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외부의 제약 없이 자유롭다면 개인은 창조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자아를 실현하고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이고요. 그러나 니체는 그 가정을 반박합니다.
니체는 어릴 적부터 ‘개인이 진정 주체적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0대에 벌써 자서전을 몇 편씩 썼던 니체는 ‘나는 내가 어떻게 내가 되었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런 니체가 확신을 가진 하나가 있다면 바로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삶을 결정하는 활력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근대의 인간들은 공동체와의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고대인들과 달리 파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기독교를 필두로 모든 사회적 구조나 제도들이 진리라는 이름 아래 개인들이 진정할 삶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망적인 근대의 상황은 물론, 그 상황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되는 법을 자기가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기독교 비판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의 그림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 드리워져 있다. -<즐거운 학문>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었던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야 맙니다. 앞서 말했듯이 니체는 기독교가 개인이 진정한 삶을 깨닫는 것을 막고 근대를 혼탁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는 육체는 영혼보다, 본능과 열정은 이성과 합리성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도록 가르칩니다. 니체가 볼 때 인간에는 디오니소스적인 면과 플라톤적인 면이 있어 이것이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기독교는 오로지 플라톤적인 면만을 강조하였던 것이죠.
또한 신의 진리라는 이름 아래 기독교는 이 지상의 삶이 피상적이고 가공적이고 환상적이며 오류로 가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오늘은 찰나일 뿐이고 현실 세계는 너무 사소하니 영원의 세계인 내세를 중시해야 한다고요.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인간 스스로 지상의 삶을 가치 없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는 노예의 도덕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4. 너 자신이 되어라
비록 우리의 미래가 희망을 위한 어떤 근거를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연히 이곳에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우리의 법과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책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반시대적 고찰>
근대의 개인들은 기독교와 개인을 기만하는 각종 사회적 장치들에 의해 짜여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니체는 지금 당신이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는 것 모두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린 모두 속고 있는 것이고, 세상이 시킨 대로 행하고, 생각하고, 바라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진정한 나를 찾아 ‘다른 시간이 아닌 오늘을 살라’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오히려 삶의 유한성을 원동력으로 삼고 자신만의 도덕, 자신만의 정의,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찾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죠. '너 자신이 되어라!' 음, 니체가 말하는 삶의 태도가 자기계발서의 한 구절 같은 것은 제 기분 탓인가요...^^;
삶은 위대한 중요성을 가진 드물고 고립된 순간들과 수없이 많은 쉼표(자신의 삶과 사회에 책임 없이 살아가려는 수많은 대중)로 이루어진다. (...) 사랑, 봄, 모든 아름다운 멜로디, 산, 달, 바다,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한 번이라도 자신들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전혀 그런 순간을 갖지 못하는데, 대부분의 이들에게 실제 삶이란 심포니에서 쉼표이고 막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나 니체는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오로지 소수의 인간만이 진정한 삶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에 책임을 지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삶을 실천하는 극소수의 천재들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교향곡에서 의미 있는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극소수의 천재는 아닌 것 같아요, 니체가 저를 봤다면 '야, 이 쉼표야!'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평범한 대중에 속해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 기분 나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 니체는 자기 자신만의 기준을 세우라고 했잖아요. 저는 니체에게 이렇게 대답해주겠습니다. '쉼표 없이 교향곡이 가능할 거 같아?'
5. 초인(Übermensch)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 말로 저기 저 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도덕을 지배자들이 민중, 피지배자를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보고,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은 이상적인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초인은 첫째로 기존의 형이상학을 믿지 않으며, 둘째로 인간으로서 삶의 몰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셋째로 ‘너희는 마땅히 해야 한다’와 맞서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정신이 3단계를 통해 변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니체는 이를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달려야 하는 낙타(1단계), 왜 사막을 힘들게 가야하는지에 의문을 품고 자신의 자유를 쟁취한 사자(2단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순진무구한 놀이하는 어린 아이(3단계)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초인의 모습을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차라투스트라는 10년 동안 자신의 기준을 찾기 위해 수련한 뒤 마침내 사회의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선지자가 되어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고 기존의 행복, 이성, 덕, 정의, 연민에 대한 경멸을 연설합니다. 대중들은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지만 그는 초인답게, 굴하지 않고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다시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합니다.
니체는 세상이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대중들이 차라투스트라를 비웃어댔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대중과 그 대중들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는 늘 그대로 반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 되는 법을 찾은 소수의 인간에 속한다면, 우리는 '나'의 가치와 실제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 사이에 늘 존재하는 괴리로부터 좌절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을 긍정하고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니체였습니다. 개인이 진정한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엄청난 용기와 도전으로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 도전과 용기를 희생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 자체로서 삶의 의미로 삼으라는 것이 니체의 가르침입니다.
니체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생각에 휩싸여 까만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글 : 자원활동가 김슬기라
애매했던 점들도 다시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강의 내용을 다시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게
또다른 창작의 고통일텐데 기꺼이 감수해 주시는 활동가님, 복 많이 받으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