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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현대사] 8강, 재벌의 탄생과 근로기준법 :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1. 1960년대의 이해
- 1961 학생회담 등 통일운동 고양
1963.1.3. 민정당 결성(민주당 신·구파)
1964 제 1차 인혁당 사건
1965.6.22. 한일협정
1964.9. 베트남 파병
◆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
1954.1.28. 이승만, 주한 유엔군 사령관 존 헐에게 한국군 1개 사단 파병 제안
1956.10.23. 남베트남 국민투표실시, 베트남공화국 수립, 남베트남 무장 봉기(베트콩)와 북의 지원
1964.5.9. 미국, 25개국에 남베트남 지원 호소 서한 발송
1964.9.11. 1차 파병
1965.3.16. 2차 파병,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
1965.10.9. 3차 파병, 전투병력 파병 시작
1966.2 <미국대사 브라운 국무부에 서한>
‘…유일한 참전국인 우리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
1966.2.23. 한미합의의사록 서명, 브라운 각서 발송
군사부문 지원 : 한국국 현대화를 위한 장비 제공, 파병 장비와 일체의 경비 부담, 베트남 주둔 한국군 지원을 위해 C-54 수송기 넉 대 한국 공군에 제공
경제부문 지원 :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물자 중 결정된 품목과 기타 소요되는 품목을 최대한 한국에서 구매, 한국 기업의 남베트남 진출 기회와 용역사업에 참가할 기회를 제공, 한국의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추가 제공-> 경제발전
1966.4.11. 백마부대 부산 출발
1968.2.12. 청룡 1중대, 퐁니·퐁넛 마을 민간인 70여명 학살
1968.3.16. 미라이 학살 -> 여기서 한국정부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1971. 라오스 영토 내 호치민 통로 봉쇄 작전 개시, 라오스 중립 선언했지만 호치민 통로 묵인, 남베트남군 작전 실패. 미군 비밀 폭격
1973.3.23. 한국군 미군과 함께 철수
1975.4.30. 사이공 함락. 남베트남 패망
파병누계 : 약 8년 간 31만 2853명 참전
전과 : 사살 4만 1401명, 포로 4633명, 귀순 2482명
피해 : 4960명, 부상 1만 962명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자유우방 수호(도미노 방지)
경제성장 동력(미국 한국군 병사에게 2억3천6백만 달러 지불, 군수물자 판매 등 GDP 5배 성장)
군사적 이익 : 한미 동맹관계 강화, 한국군 현대화
베트남 민간인 학살
2. 위와 같은 시대상황을 바탕으로 지금의 ‘재벌’이 ‘정당한 방식’으로 성장 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경유착’과 ‘노동착취’ 그 양 끝에 있던 사람이 전태일과 정주영, 이병철 이었던 것이다.
당시 경제성장 주요/동력 이슈는 원조경제, 경제개발계획, 한일협정, 베트남전쟁, 인력수출, 전태일, 경부고속도로(수출주도형 경제성장)로 설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