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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보는 중국현대사] 2강, 베이징의 희망과 절망, 라오서 <낙타샹즈>
[문학으로 보는 중국현대사] 2강(9/11), 베이징의 희망과 절망, 라오서 <낙타샹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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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으레 '베이징'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곤 사라져갈까? 자금성, 만리장성, 천안문, 왕푸징? 하지만 문학으로 보는 중국현대사의 두번째 강의, '베이징의 희망과 절망, 라오서'를 들은 이들이라면 앞으로 '베이징'이라고 했을 때 단번에 <낙타샹즈>의 작가 라오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사실 라오서는 루쉰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베이징'하면 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작가로 군림하고 있다. 또, 북경어를 가장 아름답게 구사하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낙타샹즈>의 무대도 물론 베이징이다.
라오서는 중국의 밑바닥 현실을 어루만지는 유머 감각을 발휘한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이 그렇게 풍족하고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전통 사회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차별과 물질적 궁핍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레 사범대에 진학하게 된다. 등록금이 없고 교사로서의 미래가 보장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1921년에 첫 소설을 발표한다. 그러다 영국 런던대학에 중국어를 가르치러 건너가게도 되는데, 이곳에서 영문학을 접하며 활발하게 창작 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이 경력은 훗날 문화혁명 때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는 마치 유목민처럼 여기저기를 떠돌며 살았다. 런던에서의 삶을 정리한 다음에는 싱가포르를 거쳤고 이후 상해에 거주하며 집필 활동을 계속한다. 그러고는 33세에 결혼을 하고 산동대학 중문과의 교수가 된다. 아이도 낳았다.
이후 전업 작가 생활을 하던 그는 항일운동을 하는 단체에 몸을 담기도 했으며, 훗날 미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1949년 11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자 중국으로 돌아온다. 물론 이 당시 사회주의에 반대하던 이들은 오히려 거꾸로 출국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라오서는 중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어땠는지 짐작케 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사회주의자 혹은 마오주의자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귀국해 인민예술가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명성을 얻은 그는 창작 활동을 이어나간다. 그러다 1966년부터 1976년,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숙청과 억압이 시작되고 마침내 그는 문화혁명의 초기인 1966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이 장면을 목도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패왕별희>의 감독 첸 카이거였다. 첸 카이거 역시 홍위병 출신으로 격동의 문화혁명기,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바 있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라오서의 자살을 목도했을 당시의 느낌을, 자신의 저서 <어느 영화감독의 청춘>을 통해 회고한다. 그리고 아픈 상처를 영화로 토해내기라도 하듯 <패왕별희>를 만든다.
잘 만들어진 영화나 문학 작품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예술은 시련을 먹고 자란다는 것이다. 인간은 왜 고통스러울수록 노래할까. 인간은 왜 괴로울수록 글을 쓸까. 이것이 바로, 역시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쓰며 살아가고자 하는 나의 근심이다. 나의 '아름다운 근심'이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나는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 사유를 한 자, 한 자 수를 놓듯 새겨낸 선배 예술가들의 삶의 족적을 더듬는다. 강한 영감이 찾아와 내 머릿속의 결을 온통 헝클어놓고 간다. 동시에 그들의 삶을 마구 어루만져주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끌어 안아주고 싶은 격정적인 감정마저 느낀다.
문화혁명의 한복판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홍위병' 첸 카이거와, 그 참담한 현장을 견디다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라오서의 삶에 강한 연민을 느낀다. 그 억압적 환경에서 몸부림치며 분열해갔을 두 예술가의 삶에 연민을 느낀다. 나 같아도 창작에의 의욕은 커녕 삶의 의욕조차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르니...
글 : 이다솜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