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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보는 중국현대사] 1강, 노예와 혁명, 루쉰 <아Q정전>
[문학으로 보는 중국현대사] 1강(9/4), 노예와 혁명, 루쉰 <아Q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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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그간 나의 눈이 지나치게 서구, 백인 사회를 향해 있었다는 문제의식이 처음으로 생겼다.
참여연대 자원활동을 신청하면서 특별히 '문학으로 보는 중국현대사' 강의를 선택했던 건 그런 문제의식의 일환이었다. 또, 다양한 자원활동 분야 중에서도 아카데미 느티나무를 고른 건 재작년 겨울, 친구와 함께 들었던 리영희 읽기 강좌에서 얻은 것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다. 리영희 읽기 강좌에서 다룬 핵심 텍스트가 바로 김삼웅 선생님이 쓴 <리영희 평전>이었는데, 그 책을 통해 처음으로 리영희 선생님의 글쓰기에 많은 영향을 준 존재가 루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루쉰의 문학세계를 다룬 첫 강의는 내게 아주 각별하고 소중했다.
이욱연 선생님은 루쉰이 중국의 문제점을 신랄히 고발한 나머지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소개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새삼 '경계자'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또, 루쉰이 난징, 도쿄 등지에서 유학하면서 신식 문물을 받아들였지만 전통 문화를 깍듯이 지키는 데에도 열심이었다는 대목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근거 없는 상상력(?)을 동원해 생각해보건대 루쉰은 일종의 '경계자'가 아니었을까?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같은 이분법, 그 갈라진 두 세계를 자유롭게 횡단하는 지적 유목민이 아니었을까? 이욱연 선생님은, 루쉰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뒤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구분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라 믿었고, 맑시즘에 도취했으나 그것과는 지속적으로 거리를 유지했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루쉰은 일종의 '영매'가 아니었나, 싶다. 갈라진 두 세계를 자유롭게 횡단하는 존재. 그럼으로써 그 갈라진 두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 사실 경계자가 수행해낼 수 있는 최고의 역할이 바로 '화해자' 아니던가? 나 역시 경계자로서의 삶, 화해자로서의 삶, 영매로서의 삶을 꿈꾸고 있기에 전체 수업 내용 중에서도 이 부분이 특히 각별하게 다가왔다.
또한 루쉰은 혁명이 충분히 '혁명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통치계급의 혁명은 낡은 의자를 빼앗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나는 여기에도 공감하는 바가 컸다. 루쉰은 오늘의 혁명가가 내일의 응고된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보았고, 그런 이유에서 끊임없이 혁명을 의심했다. 또, "문학은 현실을 어지럽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그의 문장은 내게 매우 힘 있게 다가왔다. 일찍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나는 세상의 도덕을 의심하는 작가"라고 선언한 것처럼 말이다. 역시 고수들의 세계는 한 길로 통하는 듯하다.
나는 루쉰이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는 점이 내심 안타깝기도 했는데, 어찌보면 그가 문화대혁명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문화대혁명의 한복판에 살아 있었다면 그가 느끼는 참담함은 어떠했을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이욱연 선생님은, 다다음 수업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딩링이라는 작가를 잠시 언급하시며 그녀는 여성해방론자로, 루쉰 계열 작가들의 남권 의식을 비판했다고 말씀하시면서 수업을 마무리해주셨는데 과연 딩링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뜨겁고 매혹적인 작가일까? 다음 수업도, 그 다음 수업도 기대하는 바가 아주 크다.
글 : 이다솜 자원활동가